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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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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전의 힘
읽고 나서 결론이 한가지로 정리되는 것보다 다양하게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대개는 고전이 그렇다.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소설 <영생의 묘약>, <미지의 걸작>으로 삶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보게 되었다. 역시 발자크!
2. 친절한 큐레이션
이 책은 내용 뿐 아니라 구성까지 탁월하다.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생기는 궁금증을 해결하기위해 보통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보게 되는데 이 책은 옮긴이의 해설, <미지의 걸작>을 각색한 영화 <누드 모델>소개, 본문에서 언급된 13명의 화가와 작품, 생애 등이 정리되어있다. 특히 미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서술된 ‘옮긴이의 해설’이 흥미로웠다. 이렇게 친절한 ‘큐레이션 북’이 있었나.
3. 고급스러운 표지
부드러운 녹색 천위에 금박 글씨가 얹힌 고급스러운 표지 덕분에 어디에 대고 찍어도 책 자체가 작품이 되는 마법. 표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비주얼, 내용, 구성까지 완벽한 <미지의 걸작>, 이 책 자체가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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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사유하기
1. 프렌호퍼를 통해 들려주는 발자크의 예술적 담론
진정한 예술가라면 비루한 모방에 그치지 말고 내적인 의미를 추구해야 하며, 포착한 것을 재현하는 것에 있어서 자신만의 철학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프렌호퍼.
프렌호퍼가 푸생과 포르뷔스, 이 두 젊은 화가에게 들려주는 예술적 담론은 이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감히 완벽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예술은 그야말로 범인이 도달할 수 없는 숭고한 경지로 인식되기까지 한다. 내면의 사유 없이 외면으로 드러난 형태에만 집착한 결과물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는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술의 임무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네, 자네는 비루한 모방자가 아니라 시인이야82
자네들은 자네들 눈앞에 펼쳐진 형태의 첫 번째 외양에 만족하지. 혹은 기껏해야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외양에 만족해버리지. 하지만 승리하는 투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 라파엘로는 그렇게 했네(...) 그의 위대한 우월함은 내적 의미에서 비롯되네. 내적 의미는 그의 작품 안에서 형태를 부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지. 형태는 그림 안에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것이네. 그것은 관념과 감각을 서로 주고받기 위한 중개물이며, 하나의 거대한 시야. 모든 형상은 하나의 세계이네. 84
여기 자네그림에 무엇이 빠져 있나? 아주 사소한 것이지. 그런데 그 사소한 것이 전부이기도 하네.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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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렌호퍼의 ‘미지의 걸작’
(스포주의)
프렌호퍼에게는 10년 동안 작업한 ‘카트린’이라는 여성을 그린 작품이 있지만 아무에게도 실물을 공개한 적이 없다. 이 작품은 마치 ‘피그말리온의 조각’ 같은 것으로 프렌호퍼에게는 영혼을 지닌 사랑하는 여인(같은 존재)이다.
너무 많은 지식은 무지와 마찬가지로 결국 부정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의 지식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의심하고 부정하고 있다. 스스로에게 갖는 이 의혹은 터키와 그리스, 아시아로 가서 다양한 모델들과 자신의 그림을 비교해 보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프렌호퍼. 하지만 프렌호퍼의 미지의 걸작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된 푸생은 포르뷔스를 동원해 자신의 연인인 질레트를 보여주는 대신 미지의 걸작을 보여 달라고 제안하고 이 거래는 성사된다. 작품을 공개한 후 프렌호퍼는 자신의 작품에 도취되어 말한다. “자네들이 이토록 완벽한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겠지.” 그러나 공개된 프렌호퍼의 작품을 보고 푸생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그저 수많은 이상한 선들에 짓눌리고 혼란스럽게 쌓인 색깔들만 보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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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프렌호퍼가 놓친 것.
프렌호퍼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 타당하고 날카로운 비평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다른 화가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예술의 절대적 진실성에 다가갈 수 있는 인물이었다. 예술에 관한 한은 프렌호퍼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푸생이 옳다면 프렌호퍼의 그 모든 것은 손에 붓을 쥐지 않은 성찰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관찰하고 포착해서 모방을 한 이후에라야 새로운 것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인데 프렌호퍼의 작품에는 관찰과 모방이 없었다. 예술이라는 거대 담론을 놓고 보면 내면의 사유가 훨씬 차원이 높은 행위이며 ‘관찰’은 아주 사소한 것이다. 그러나 프렌호퍼 자신이 말하지 않았는가. 예술에는 사소한 것이 전부인 것이라고. 사소한 것을 놓친 프렌호퍼는 결국 전부를 놓쳤다.
누구나 머리로는 이해 못할 게 없고 화려한 언변으로 못할 게 없다.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고 예술을 빌어 발자크는 인생을 통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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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호퍼는 우리의 예술에 열정적으로 빠져 있는 인물이고, 다른 화가들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본다네. 그는 색채에 대해, 선의 절대적 진실성에 대해 깊이 성찰했지. 하지만 탐구가 지나쳐서, 탐구의 대상 자체를 의심하게 되었어. 절망의 순간들에, 그는 데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선으로는 오로지 기하학적 형상들만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 이것 또한 지나치게 절대적인 사고야. 왜냐하면 색채가 아닌 선과 어둠만으로도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지.(...)데생은 골격을 부여하고, 색채는 생명에 해당하지. 그런데 골격 없는 생명은 생명 없는 골격보다 더 불완전한 것이라네. 여하튼, 이 모든 것보다 더 진실한 무언가가 있네. 바로, 화가에게는 실천과 관찰이 전부라는 것이야.(...) 그를 모방하지 말게. 작업하게. 화가는 손에 붓을 쥐고서만 성찰해야 하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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