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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 사랑의 시작을 위한 서른아홉 개의 판타지 - 이제하 판타스틱 미니픽션집
이제하 지음 / 달봄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요즘 인기리에 출간되는 일본 소설의 일러스트를 모방한 책 표지를 보고는 신인작가인가? 하며 책장을 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라는 작품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대 작가였다 나는 그 작품을 영화인지 TV문학관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영상물로 접했고 참 독특하고 쓸쓸한 이미지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예술 장르는 표면적으로 달라 보이지만 저 깊은 바닥에서 지하수 처럼 한줄기로 만나 같이 흐르고 있다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예술가가 이 작품의 작가 이제하 일 것이다 한가지만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인생이 얼마나 찬란해 질까? 라며 예술을 동경하는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이제하는 놀랍고도 놀랍다
이번에 출간되 이 책에서도 그는 여지없지 자신의 능력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판타스틱 미니픽션집’이라 이름 지어진 이 책에서도 이야기뿐 아니라 그림을 직접 그려 넣어 이야기 이상으로 판타지에 독자를 빠져들게 하였고 자신의 노래 모음 CD까지 별책부록으로 함께 발간하였다
코 때문에 이혼한 커플의 코를 성형해준 의사이야기, 집안의 기대를 온 몸으로 받던 30대 노총각 이야기 그리고 싱글로 살아가는 40대를 부러운 눈으로 보는 동시대 가장 이야기 등등 가벼운 콩트로 시작된 책은 읽어 갈수록 오랜 시간 예술가로서 살아온 통찰력이 보이고 이야기의 깊이는 끝이 없어진다 코처럼 아주 짧은 콩트와 비슷한 어찌 보면 장시 같기도 한 에피소드도 많지만 ‘사라의 문’, ‘비’ 와 같이 깊이 있고 무게감 있는 단편도 수록 되어 있어 읽는 내내 긴장감을 놓지 않았고 현실과 환타지를 넘나들며 종잡을 수 없는 읽는 재미를 작가는 선사하기도 한다
책을 다 읽고 드는 생각은 ‘내가 무엇을 읽은 걸까?’ 하는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여성지 속에서 흔하게 읽었던 가족의 일상사 콩트가 떠오르기도 하고 한국문학전집이나 이상 문학상 전집 속 단편들이 떠오르기도 하는 등 요즘 만나기 힘든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작품과 작가의 연령을 연계해서 바라보는 것은 예술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만 가볍게 보고 읽기 시작한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은 과연 작가의 연륜이 없다면 이렇듯 장시도 콩트도 단편소설도 아닌 듯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야기의 모음이 그것들을 완전히 능가하는 환타지 이야기를 독자에게 선사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인상적으로 읽은 ‘비’라는 작품에서 작가의 연륜에서 비롯한 통찰력이 보이는 부분을 다시 읽으며 서평을 마친다
“군인 묘지라 무덤조차 계급이 정연해서, 소위 이하의 졸병들은 모두 하얀 나무 묘비, 그 이상의 장교들은 모두 석비다. 밋밋한 잔디의 무덤들을 밟으며 거니노라면 때로 땅 밑에서 졸병들의 유골들이 일제히 터트리는 홍소가 아우성쳐 올라와 들리는 듯하고 질서 정연히 박힌 그 무수한 백목비들은 그 바람에 일제히 지각을 뚫고 죽순처럼 솟아 오른 듯하다 6.25동란 때 전사한 졸병들의 수는 도대체 몇 십만 몇 천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