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고 싶지 않아서 이 책을 내내 읽는데, 읽다보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그러니까 거의 마지막 즈음,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하기로 결정했을 때, 갑자기 욱씬 거렸다. 어쩌면 그 사람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하다가 실제로 그렇게 가정을 이룰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하고 살고 싶어하다가, 그렇게 살게 되겠지, 생각하는 순간, 욱씬거렸다. 왜 .....
"우린 끝난 사이였어. 당신도 분명히 알았고."
제스는 일어나 있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기억에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니콜스 씨도 일어나 있었다.
"우리 관계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관심 없어, 알겠어? 하지만 우린 당신이 떠난 후에 최저 생계비로 겨우겨우 살았어. 그런데 이제 당신은 딴 사람하고 살면서 그 사람 애들을 부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우리 애들을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고 해놓고 말이야. 그래, 그런 일이라면 난 분명히 안 좋은 반응을 보일 거야, 마티."
"내 돈으로 사는 거 아니야. 린지 돈으로 사는 거지. 당신 애들을 위해 린지 돈을 쓸 수는 없어."
"내 애들이라고? 내 애들?" (p.362)
며칠전에 내게 있었던 대화가 너무 생각나서 이 부분을 읽는데 너무 힘들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일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든, 사실만 놓고 보자면 그는 나를 떠났고 다른 여자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니까. 책 속에서 마티는 '린지 돈으로' 라는 핑계를 댔지만, 현실의 내게는 .. 관두자. 부질없지, 다. 이렇게 여기서 백날 써봤자 뭐가 달라진다고...
제스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비가 내리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복도를 따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그녀 앞에 금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검은 모직 원피스에 어울리는 구두를 신었고, 매장이나 은행에서 일하지만 록음악도 즐긴다는 인상을 완전히 포기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 선택하는 스타일로 머리를 잘랐다.
"마티가 여기 있나요?"
제스가 말했다. 여자는 입을 열ㄷ스 하다가 제스를 위아래로 훑어 봤다. 슬리퍼를 신은 발과 구겨진 하얀 바지를. 그러고는 몇 초 후에 살짝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고, 제스는 그녀가 자신을 알아봤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제스가 누군지 알았다.
"기다리세요."
여자가 말했다.
문이 반쯤 닫히고, 좁은 복도를 향해 그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트? 마트?"
마트.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와 티비 프로에 관해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한풀 꺾여 들려왔다. 여자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제스는 반투명 유리판 뒤로 그들의 그림자를 봤다. 그러고는 문이 열리고, 그가 서 있었다.
마티는 머리를 길렀다. 길게 기른 앞머리는 10대처럼 세심하게 옆으로 넘겨져 있었다. 제스가 알지 못하는 짙은 남색 청바지를 입었고, 살이 많이 빠졌다. 마치 제스가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제스."
제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둘은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그가 힘겹게 침을 삼켰다.
"말하려고 했어."
그 순간까지도 제스는 마음 한구석으로 이것이 진실임을 믿지 않으려 했다. 뭔가 커다란 착오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티는 친구와 지내고 있다거나, 마티의 상태가 다시 안 좋아졌는데 자존심 강한 마리아 코스탠자가 이를 인정하지 않은 거라고.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착오가 아니었다.
제스는 목소리를 되찾기까지 잠시 시간이 걸렸다.
"여기야? 그동안 당신이 지낸 곳이……여기란 말이야?"
제스는 비틀비틀 뒤로 물러서며, 더없이 깔끔한 앞쪽 정원과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거실을 빤히 바라봤다. 진입로에 주차된 차에 엉덩이가 부딪혀, 제스는 한 손을 뻗어 균형을 잡았다.
"그동안 내내? 지난 2년 동안 우린 근근이 먹고 살았는데, 당신은 이런 고급스런 집에서 신형……신형 토요타를 굴리며 살았다고?" (p.353-354)
마티는 제스가 힘든 걸 모르지 않았다. 제스가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몇 번이나 얘기했으니까. 그는 그녀가 힘든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티가 자신이 편한 길을 택하고, 자신이 고생으로 밀어 넣은 여자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더이상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마티의 선택이다. 그의 선택이다. 언제나 우리는 선택 앞에 놓여있고, 선택을 했다면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게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취했다면 무언가를 놓아야 할것이다. 다, 당신 팔자다. 당신이 선택했고, 당신이 책임 져야 한다. 그 뒤에 찾아오는 기쁨도 당신 것이듯이, 슬픔도 당신 것이다. 후회도 당신 것이다.
"난 지난 2년간 파산 상태였어요. 그런데도 마티를 보호하면서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더하지 않으려고, 자기 아이들 일로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구요. 그런데 그러는 동안 마티는 새 여자 친구와 저렇게 잘 살고 있었어요." (p.372)
분노만이 남지는 않기를 바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할 권리가 있으니까. 당연히 그걸 선택해야 하니까.
다 괜찮을 것이다.
나도 괜찮을 것이다.
그들은 병원을 나서 하얀 빛이 쏟아지는 봄날의 거리로 들어섰다. 이해하기 어렵게도, 현실은 삶의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듯했다. 차들은 좁은 공간으로 후진을 하고, 버스는 사람들을 토해내고, 근처 난간을 칠하는 일꾼의 라디오 소리는 크게 울려 퍼졌다. (p.407)
지금은 머릿속이 온통 에드로 가득 찼다. 에드가 돌아보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에드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어둠 속에서 속삭이듯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 그가 커피를 건네며 가볍게 손이 스치면, 전기가 온몸을 궤뚫고 지나갔다. 그의 눈길이 그녀에게 머물면 기분이 좋았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p.421-422)
"잠에서 깨어났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그가 제스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봤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진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요. 내 삶 전체가 재앙으로 바뀌었는데, 난 그냥……괜찮았어요. 당신을 보면 안심이 돼요." (p.425)
"그럼 기다릴게요." 에드가 그녀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정말이냐고 묻듯이. "기다릴 거예요. 당신이 원한다면요." (p.433)
제스는 이를 닦은 후, 욕실 불을 끄고 방으로 돌아갔다. 에드는 이미 거대한 호텔 침대에 누워, 그녀가 들어오도록 이불을 젖히고 있었다. 그가 침대 옆 스탠드를 껐고, 제스는 어둠 속에서 그의 곁으로 누웠다. 촉촉한 피부가 닿는 걸 느끼며, 매일 밤이 이렇다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제스는 과연 그의 다리를 휘감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 않고 조용히 그의 곁에 누워 있을 수 있을까. (p.432-433)
처음에 니키는 제스가 괜히 과장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물네 시간이 지난 후에도 제스는 여전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니키와 탠지는 제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고나서는 차와 토스트를 준비해 가져갔지만, 제스는 벽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창문은 여전히 열려 있고, 바깥은 제법 쌀쌀했다. 니키는 창문을 닫고, 사다리와 드릴을 차고에 가져다두려고 밖으로 나갔다. 차고는 롤스로이스가 없으니 휑해 보였다. 니키가 한두 시간 후에 접시를 가지러 돌아가보니, 차와 토스트는 차갑게 식은 채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었다. (p.443)
두 사람이 함께 그런 시간을 보내놓고 어떻게 단칼에 관계를 끊을 수 있는지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한순간 더없이 행복해 보이다가 다음 순간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될 수 있는지. 나이가 들면 그런 문제들이 전부 해결되는 줄 알았는데, 보아하니 아닌 모양이었다.(p.476)
"죄송해요. 아저씨 물건들은 거기 있는데 전부 박스에 담겨 있었어요. 이젠 거기 살지 않나봐요." 놀랄 것도 없는 소식이었지만, 제스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얻어맞기라도 한 듯 양손으로 배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p.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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