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가니스트
로버트 슈나이더 지음, 안문영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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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 표지에 '신이 외면한 저주받은 천재. 신을 거부한 완벽주의자 이야기'라고 적혀 있다. 나는 내가 천재가 아니라서, 내가 완벽주의자가 아니라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으면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내가 체험하지 못하는 천재들의 고매한 정신세계를 조금이나마 엿보고자 하는 욕심이리라. 그 유명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에 버금간다는 책 소개글도 나를 유혹하였다. 그래서 이 책 <오르가니스트>도 그런 욕심과 호기심에서 선택하여 읽게 되었다. 

1803년 에쉬베르크에서 요하네스 엘리아스 알더가 태어난다. 그는 유리 깨지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하지 못하고 갇혀 있기도 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다 어느날 숲속에서 엄청난 청각의 경험을 하게 되고 목소리는 울림이 좋은 저음으로 바뀌게 되지만, 대신 짙은 담록색의 눈동자가 소 오줌마냥 누런 빛으로 바뀌고 만다. 저주받은 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안고 살지만 엘리아스는 목소리를 갈고 다듬고, 에쉬베르크 성당에서 오르간이라는 신비로운 악기를 만나고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오르간을 연주하게 된다. 신이 내려주신 그 재능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한다. 사촌 엘스베트를 너무나 사랑하여 그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때문에 삶의 의욕을 포기하고 아무도 갖지 못한 음악적 재능마저 내팽겨쳐버리고 만다. 

<향수>에서는 후각이 발달한 비뚤어진 천재가 나오는 데 비해, <오르가니스트>에는 청각이 엄청나게 발달하여 자연 만물, 주위 사람들, 음악의 모든 소리를 음표 하나하나로 분석하여 들을 수 있고, 한 번 들은 것을 더욱 훌륭하게 재창조할 수 있는 음악적 천재가 나온다. 그는 불행하게도 악보를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었지만 그가 연주하는 음악은 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 들었다 놓았다 죄었다 풀었다 하는 힘을 가졌다. 왜 신은 한 가지를 주면서 다른 한 가지는 주지 않는 것일까. 야속하게 느껴질 뿐이다. 

엘리아스의 음악적 재능과 그 연주가 이 소설의 한 축이라면, 또 다른 한 축은 엘스베트를 향한 그의 사랑이다. 그는 사촌여동생 엘스베트가 태어날 때 이미 그 어린 아기의 심장박동을 가려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심장박동과 똑같은 것을 알아차리고 이미 그 때부터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불쌍한 사람들은 무엇을 찾아 헤메야 한단 말이냐? 그들은 이 연인에서 저 연인으로 다급하게 쫓아다니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미 까마득한 옛날부터 한 인간을 점지해주셨다는 사실을 몰라. 그들과 똑같은 심장박동을 지닌 한 인간을 말이지. 참으로 소인들이야! 그들은 믿음도 없고, 또 하나님이 그들에게 시간과 장소를 알려줄 때까지 참고 기다릴 줄도 모른다니까!" (184쪽)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그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비록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깨끗하고 고결한 사랑을 탐내는 것이다. 

이 책은 신에게 순응하고 때로는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 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거기에 대처하는 인간의 모습, 인간관계들을 세심하게 묘사해놓았다.
엘스베트가 루카스 알더와 결혼하여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절규하며 신을 원망하는 엘리아스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소리친다. "나, 요하네스 엘리아스 알더가 몰락한다면, 그것은 내 의지이지. 당신의 의지가 아니란 말이야!"(228쪽) 자기 두 발로 똑바로 바닥을 디디고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저 하늘 위 어디 있는지, 실은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신의 의지대로 좌지우지되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약한 모습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의 강한 면모를 볼 수 있어 좋았다. 마치 내가 감히 신을 향해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차마 그러지 못하는데 그는 마구 소리질러주었다. 그 때 엘리아스는 붕대를 감고 있는 어떤 아이를 보게 되고 이 환상 속에서 결국 기절하게 된다. 그 후 그의 누런 눈동자는 본래의 담록색으로 변하게 되지만, 엘스베트를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는 이제 그 무서운 사랑의 올가미에서는 벗어났지만 더이상 삶의 의미를 잃은 것이다. 가장 힘들게 하는 그 무엇이 사실은 그를 가장 살게 만들고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었다. 슬픈 일이다.
에쉬베르크에는 세번의 대화재가 발생한다. 첫번째 화재는 누군가의 방화인 것이 분명한데, 범인이 누구인지는 마지막에 밝혀진다. 그 사이 다른 용의자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희생된다. 마녀사냥식으로 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고가서 여럿이서 살해해버리고 만다. 그 중에는 엘리아스의 아버지 제프도 있었는데 아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죽을 때까지 괴로워하면서 산다. 군중심리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혼자서는 절대로 하지 않을, 하지 못할 일을 여럿이 모이게 되면 별다른 죄책감이나 저항 없이 너나할 것 없이 달려들어 해치워버리는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괴로워하며, 후회하며, 돌이켜 눈물짓는 나약한 인간이면서..

엘리아스는 엘스베트를 너무나 사랑했고, 음악을 사랑하고 그 재능을 조금 꽃피운 죄밖에 없다. 그는 <향수>에서 진정 아름다운 향기를 위해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그루누이처럼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고, 잔인한 면도 없는, 어찌보면 평범한 속내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에게는 그저 엘스베트 한 명만 있으면 되었는데,, 그 한 명이 없어서 그는 자신을 버렸다.
사랑,,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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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바로 살아라 - 신정일이 쓴 조선의 진보주의자들
신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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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보수냐 진보냐 갈림길에서 선택하라고 할 때 나는 어느 쪽을 선택할까. 보수와 진보의 정확한 정의도 잘 알지 못하는데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똑바로 살아라>. '신정일이 쓴 조선의 진보주의자들'이라는 거창한 소제목까지 달고서 머리카락 한올, 수염 한올이 서슬퍼렇게 살아있는 선배의 눈동자를 책표지 전면에 장식해놓은 이 책. 지은이 신정일은 조선사에서 진보주의자 12명을 뽑아내어 그들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는 내가 잘 아는 이름도 많았으나, 낯설은 이름도 눈에 띄었다. 

중종의 신임을 얻어 개혁을 시도하였다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결국은 개혁에 실패한 조광조 이야기, 국사책에서 말로만 들었던 '문체반정'의 주인공 박지원의 이야기, <택리지>로 유명한 이중환의 이야기 등등 중고등학교 국사 수업시간에 들었던 배경지식만 있다면 재미나게 읽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황진이를 자유롭게 살다간 진정한 페미니스트로 묘사한 점도 신선했다. (물론 얼마전 한창 황진이 붐이 일었을 때 다 나온 관점이지만.)

하지만 조선사 600년의 역사에서 딱 12명을 추려냈는데, 그 기준이 사뭇 모호하다. 평소 잘 알고 있던 조광조, 허균, 박지원, 정약용, 김옥균 등에는 동의는 하지만 진부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반면에 정여립, 김개남, 강일순은 고개가 갸우뚱해지면서 커다란 의문부호가 생겼다. 왜 진보주의자에 이 사람들이 들어갈까. 

정여립은 기축옥사를 일으킨 반역자라고 알고 있었다. 국사책에 몇 줄 그렇게 나왔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이후 호남지역의 인사들은 거의 벼슬길이 막혀버렸다는 정도였다. 그런게 그가 진보주의자라고? 무슨 말일까. 반역 이라는 말은 당연히 그 당시의 집권층이 얹어준 불명예스러운 이름일테지만, 그가 과연 무슨 일을 했길래.

정여립은 왕위세습을 부인하고, 충군사상을 부인하고, 국가는 천하의 공물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왕위 세습을 부인했다니, 얼마나 깨어있는 생각인가. 너무나 당연히 임금은 대물림을 하는 시절에 말이다. 국사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점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역사란 승리한 자의 몫이라지만, 나는 당연히 정여립은 반역자, 어이없게 반역을 도모하다 실패하여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니.

동학농민혁명을 얘기하면 반드시 따라나오는 이름은 '전봉준'이다. 그런데 12명에 전봉준의 이름은 없고 김개남이 들어가있었다. 시험공부를 할 때 전봉준은 당연히 외워야 하는 이름이고, 김개남과 손화중은 외워두면 좋은 이름이었는데. 책에서는 전봉준은 온건주의이고 김개남은 급진주의였다고 한다. 둘다 농민의 입장에서 개혁을 하고자 했지만 전봉준이 전세를 살피고 한발 물러서는 정책을 취했다면 김개남은 늘 돌진을 외쳤다고 한다. 저자는 그래서 김개남을 진보주의자로 꼽았다. 전봉준의 그늘에 가려져있던 그를 밝은 햇빛 아래로 끌어낸 것이다. 그런 저자의 신선한 발상에 동의하기도 하지만, 사실 급진적인 개혁은 늘 커다란 희생을 동반하므로 과연 그것이 옳았는가 하는 판단을 내리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나온 강일순은 솔직히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조선이라는 꽉 막힌 나라에서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업적이 있다는데 글쎄 소개되어 있는 사례들을 읽어보면 사이비 종교의 교주 같아 보이는데.. 그래서 이 부분은 저자와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아무리 열린 생각으로 책을 읽는다 해도 기본적으로 나는 그 당시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 있는 21세기에서 판단을 하는 것이므로 그 때의 진보주의를 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국사 교과서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에 따라, 왕의 업적에 따라 서술된 정보들을 배우다가 이런 새로운 기준으로 분류되어 있는 역사를 읽으니 재미도 있고, 아는 사실은 알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모르고 있던 사실은 새롭게 알게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열심히 책을 읽다 보면 한번씩 나오는 오자, 탈자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마지막 교정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써주면 좋았을 걸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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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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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소설을 많이 읽고 있다. 일본소설 특유의 가벼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기피한 적도 있었는데, 최근에 읽은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등은 꽤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명성이 자자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도 읽어보기로 했다. 제131회 나오키상 수상작인데다 작가도 유명한 만큼 책에 대한 평이 극단적이었다. 유쾌하고 좋은 소설이라는 평도 많지만 가볍고 의미없다는 평도 꽤 많았다. 나는 과연 어떤 평을 내릴 수 있을까, 열린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정신과 의사인 이라부는 보통의 의사들과는 사뭇 다르다. 덩치도 산만하고(덩치 큰 의사가 없으라는 법은 없지만)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앵앵거리는 목소리에, 정신과에 찾아온 환자들에게 무조건 비타민 주사부터 놓으려 하고, 매일 핫팬츠를 입고 비타민 주사를 놓고 나면 벤치에 벌러덩 누워버리는 간호사를 데리고 있는 아주 독특한 의사이다. 찾아오는 환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지만 얼렁뚱땅 농담짓거리 속에서 의외로 환자의 환부를 정확히 꼬집어낸다. 신기하다. 이야기가 겉도는 것 같지만 정확하게 급소를 찾아가는 것이. 

이라부가 만난 5명의 환자 이야기가 장편소설 속에서 마치 단편처럼 구성되어 있다. 짤막짤막한 이야기들이고, 무겁지 않아서 쉽게 읽어진다. 소리내어 '으하하' 웃는 건 조금 오바인 것 같지만 가만히 읽다가 '키득키득'거려지는 재미는 쏠쏠하다. 다섯편의 이야기 중 특히 표제작인 <공중그네>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베테랑 서커스단원이 언젠가부터 공중그네를 타다가 네트에 떨어지는 일이 빈번하다. 캐쳐인 젊은 단원이 아무래도 자신을 밀어내는 것 같아 괘씸하다. 젊은 단원들에게 뭔가 어필하고 싶지만 가까이 다가서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노인네처럼 설교만 하게 되고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지고 만다. 이 모든 게 그 캐쳐 때문이다. 그는 주위의 권유로 정신과의사 이라부를 찾아가는데 무작정 주사부터 놓고는 서커스단이라는 소리를 듣고 아이처럼 좋아하며 서커스단 연습시간에 뛰어들어온다. 밝고 유쾌하고 긍정적인 이라부는 서커스단원들 틈에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스르르 녹아들어간다. 베테랑 공중그네 곡예사는 비디오로 촬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문제는 캐쳐가 아닌 자신에게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급변해버린 서커스단 속에서 새롭게 들어오는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에서부터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온전히 믿고 자신을 던져 맡겨야 하는 캐쳐에게서 멀어져버린 것이다.

내가 대학 새내기일 때, 많은 선배들에게 귀여움을 받았었다. 새내기는 무엇을 해도 이쁠 때이고, 뭘 하든 선배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을 한참 누리고 있다가, 내가 2학년이 되고 후배들을 받게 되었다. 20살 새내기는 너무나 이뻤다. 더이상 나와 내 동기들은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밀려나게 되었다. 우리는 헌내기가 된 것이다. 이런 일이...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고 우스운 생각들이지만, 그 때의 그 감정들을 잊어버릴 수는 없다. 이 베테랑 곡예사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모두 자신을 주목하고, 믿고, 추켜세워주던 그 때만을 기억하고 있다가, 점점 더 젊은피들이 수혈되자 자신이 밀려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 감정이 어떤 건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공중그네>는 가벼운 문체로 참 읽기 쉬웠다. 읽기 쉽다고 가치 없는 글은 아니다. 다섯편 모두에서 사소한 듯 보이지만 누구나 겪어보았을 일상 속의 소소한 감정들을 유쾌하게 그려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었다. 라이벌 선수가 스스로 다쳐주기를 바라는 마음, 새로운 도전을 하지 못하고 늘 잘 하는 것만 하는 심리, 꽉 짜여진 생활 속에서 일탈을 해보고 싶은 마음 등 나도 한번씩 다 겪었고, 또 언제 다시 그런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오를지 모르는 감정들을 유쾌하게, 무겁지 않게 그려내고 있었다. 


왠지 문학은 깊이가 있어야 하고, 약간은 어려운 듯해서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왠지 있어보이는, 그래야만 '문학'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일 수 있다는 편견이 있지는 않나 반성해본다. 글을 읽고 나서 생각할 꺼리를 남겨야 좋은 글이고,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공중그네> 역시 참 좋은 소설이었다. 가벼운 일회성 읽을 거리가 아닐까 염려했었는데, 그정도로 폄하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오쿠다 히데오의 다른 작품들은 어떤 웃음과 어떤 생각할 꺼리를 남길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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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메릴 호
한가을 지음 / 엔블록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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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면? (시간여행이라는 간단한 말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엄마가 우주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어느날 갑자기 18세기의 바다에 떨어져서 해적들과 싸우면서 목숨을 지켜야 한다면?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 무슨 일을 하든 어떠랴.
주인공 주모이는 아버지의 공장이 사채업자들에게 넘어갈지도 모르는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마치라는 특이한 소녀와 함께 평행우주간의 모험을 하게 된다. 

이 책에서 해양역사와 배, 무기 등에 관한 작가의 풍부한 배경지식이 화려하게 꽃피고 있다. 이런 분야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대단함에 입이 쩍 벌어진다. 하지만 이 소설은 청소년 문학이라고 분류되어 있다. 주인공도 14살 정도의 중학생인데 그 중학생이 아무리 어릴 적부터 범선을 좋아하고 해양소설을 읽었다 해도 그렇게 전문적이고 해박할 수 있는지는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다. 나이가 어려도 충분히 관심 가는 분야에 공부를 하고 어른 못지 않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평범한 중학생으로 설정이 되었다면 더 공감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한복판에서 보물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에 해적들의 습격을 받아 이리저리 피터지는 싸움을 하는 장면은 긴박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장면이었다. 마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전투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약간 잔인한 묘사들이 눈에 거슬렸다. 영화나 소설, 아니 그보다 현실이 더 잔인하고 인정이 없지만 그래도 청소년 문학이라는 장르의 책에서 이런 세세한 묘사들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너무 '청소년'이라는 문구에 얽매여서 선입견을 갖고 책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채업자로 위장한 엠엠엘단은 모이의 아버지에게서 사라져버린 아내를 그리워하고 미워하는 그 마음을 빼앗아가려고 했다. 공장이나 돈이나 집이나 이런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의 한 부분을 지워버리겠다고 한다. 당장에 필요한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뜬금없다 생각이 들면서도, 그 마음이 없어져버리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버려서 슬프고 밉고 잊어버리고 싶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그와 사랑했던 추억들, 기억들을 지워버리면 삶이 반짝거리지 못할 것 같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실제로 현실에서는 매번 그 말을 지킬 수 없더라도.

해양모험소설로 약간의 어려운 말들이 나오긴 하지만 재밌게 술술 읽어 나갈 수 있었다. 갑자기 바다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해수욕장이 아닌 망망대해 한복판. 그냥 시원하게 넘쳐나는 그 물들을 보고 싶다. 보고 있으면 갑자기 다른 세계로 가는 웜홀이 열리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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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 / 시아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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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을 하고 처음으로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학생일 때는 돈 쓸 일도 없었고, 신용카드를 올바로 사용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신용카드가 한장쯤 있는 것이 연말정산 때도 유리한 것 같고, 현금이 없어도 물건을 구입할 수 있고, 사용내역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므로 나의 소비생활을 점검할 수 있겠다 싶어서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이렇게 첫 카드는 나의 의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직장에 찾아와서 달콤한 말로 온갖 혜택을 설명하는 영업사원들에게 홀랑 넘어가서 신청서를 작성하여 배달받은 카드가 너댓장. 실제로 크게 돈 쓸 일이 없으므로 한두개 빼고는 다 지갑속에서 잠자는 카드였다. 과감하게 카드를 가위로 잘라버리고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해지해버렸다.

신용카드를 잘못 사용해서 여기저기 빚을 지고, 여러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고, 파산을 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절대로 안 그래야지. 나는 절대로 충동구매 같은 건 안 할거야. 라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막상 내 손에 막강한 카드 한장이 있으니 기분 내킬 때 그냥 '긁지,뭐.' 이런 경우도 종종 생기게 되었다. 생각보다 씀씀이가 커진 것이다. 내가 명품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쇼핑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부모님과 같이 외식하고, 부모님 선물 사드리고, 읽고 싶은 책들 사보고 하는 정도인데,, 충동구매 같은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니까,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한 지금 사용하는 카드 결제액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안심하는 것이다. 두려우면서도..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는 신용카드, 대출 등 금전적인 문제로 발생한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조카의 약혼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휴직중인 경찰 혼마는 차근차근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그녀가 개인파산 전력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시작된 추적은 살인사건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세키네 쇼코는 신용카드로 인해 빚더미에 앉아 그 빚을 갚기 위해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고군분투하지만 결국엔 개인파산을 선택한다. 그런데 몇년후 혼마의 조카의 약혼자인 세키네 쇼코는 신용카드를 한장 만들려다 개인파산한 적이 있었냐는 약혼자의 질문에 소스라치게 놀라고는 그 다음날부터 행적을 감추고 만다. 개인파산한 적이 있는 세키네와 조카와 약혼한 세키네는 동일인물이 아니었다!

 

처음 두 사람의 얼굴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약혼자 그녀가 성형수술을 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일까. 아니면 이 소설이 출판된지 좀 오래되어서일까. 그건 아니었다. 그녀는 술집에서 일했던 세키네의 신분을 산 것이었다.(혹은 빼앗은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산다는 것. 어떤 사정이 있길래 본래의 자신을 포기하고 남의 이름으로 살게 된 것일까.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은 나를 통째로 잃어버리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닌 남의 추억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는가. 서글픈 일이다. 또한 무서운 일이다. 내가 남으로 살게 되면 그 남은 무엇으로 살고 있단 말인가. - 여기서 살인사건의 냄새가 나는 것이다.

 

술집에서 일하던 세키네 쇼코는 단지 행복해지고 싶어서 신용카드를 사용하다 돌이킬 수 없게 되어 개인파산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세키네 쇼코로 살고자 했던 그녀는 자기가 아닌 아버지 때문에 가족 전체가 빚더미에 앉게 된다. 사실상 아버지의 잘못이지만 고통은 그녀와 어머니까지 함께 받게 된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고,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뿌리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과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대책임을 져야 하는가? 부채도 상속받는 유산이라고 한다. 부채를 물려받지 않으려면 상속포기를 하면 된다고 한다. 가족이라고 묶여있는 사람들이지만 한 개인의 잘못이 그 가족 전체를 벌할 수 있는 것인가. 의문이다. 이 작가의 다른 소설 <모방범>에서도 보면 범인의 가족들은 도망치거나 숨거나 항변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을 받는다. 그 때도 이런 의문이 들었지만 답이 안 나온다.

 

배경이 1990년대 초. 사라진 세키네 쇼코를 추적하기 위해 옛날 행적을 찾아다닐 때 보면 1980년 중후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지금은 2000년하고도 8년이 지났으므로 약간의 고루한 면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건 그저 숫자에서 오는 선입견일 뿐이다. 지금 읽으나 이 책이 출판된 그 때 읽으나 신용카드로 인한 폐해로 뒤범벅인 현실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으니 별 위화감은 없다.

마지막에 드디어 발견한 그녀. 신조 교코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녀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하지만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버린 결말은 약간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만큼 확실히 그녀를 잡았다는 것이니까 속이 후련해지기도 했다. 여운이 남는 뒷마무리였다.

 

미야베 미유키. 이 작가는 사회문제를 추리소설, 미스테리소설이라는 흥미로운 장르에 담아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쉽게 읽히는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며칠동안 가슴에 묵직하니 생각할 꺼리가 남게 된다. 신용카드라는 편리한 수단이 사람 목을 죄여 오는 칼날이 된다. 내가 들고 있는 카드도, 내가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용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 날카로운 끝을 보여줄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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