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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 / 시아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취직을 하고 처음으로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학생일 때는 돈 쓸 일도 없었고, 신용카드를 올바로 사용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신용카드가 한장쯤 있는 것이 연말정산 때도 유리한 것 같고, 현금이 없어도 물건을 구입할 수 있고, 사용내역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므로 나의 소비생활을 점검할 수 있겠다 싶어서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이렇게 첫 카드는 나의 의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직장에 찾아와서 달콤한 말로 온갖 혜택을 설명하는 영업사원들에게 홀랑 넘어가서 신청서를 작성하여 배달받은 카드가 너댓장. 실제로 크게 돈 쓸 일이 없으므로 한두개 빼고는 다 지갑속에서 잠자는 카드였다. 과감하게 카드를 가위로 잘라버리고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해지해버렸다.
신용카드를 잘못 사용해서 여기저기 빚을 지고, 여러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고, 파산을 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절대로 안 그래야지. 나는 절대로 충동구매 같은 건 안 할거야. 라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막상 내 손에 막강한 카드 한장이 있으니 기분 내킬 때 그냥 '긁지,뭐.' 이런 경우도 종종 생기게 되었다. 생각보다 씀씀이가 커진 것이다. 내가 명품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쇼핑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부모님과 같이 외식하고, 부모님 선물 사드리고, 읽고 싶은 책들 사보고 하는 정도인데,, 충동구매 같은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니까,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한 지금 사용하는 카드 결제액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안심하는 것이다. 두려우면서도..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는 신용카드, 대출 등 금전적인 문제로 발생한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조카의 약혼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휴직중인 경찰 혼마는 차근차근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그녀가 개인파산 전력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시작된 추적은 살인사건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세키네 쇼코는 신용카드로 인해 빚더미에 앉아 그 빚을 갚기 위해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고군분투하지만 결국엔 개인파산을 선택한다. 그런데 몇년후 혼마의 조카의 약혼자인 세키네 쇼코는 신용카드를 한장 만들려다 개인파산한 적이 있었냐는 약혼자의 질문에 소스라치게 놀라고는 그 다음날부터 행적을 감추고 만다. 개인파산한 적이 있는 세키네와 조카와 약혼한 세키네는 동일인물이 아니었다!
처음 두 사람의 얼굴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약혼자 그녀가 성형수술을 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일까. 아니면 이 소설이 출판된지 좀 오래되어서일까. 그건 아니었다. 그녀는 술집에서 일했던 세키네의 신분을 산 것이었다.(혹은 빼앗은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산다는 것. 어떤 사정이 있길래 본래의 자신을 포기하고 남의 이름으로 살게 된 것일까.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은 나를 통째로 잃어버리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닌 남의 추억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는가. 서글픈 일이다. 또한 무서운 일이다. 내가 남으로 살게 되면 그 남은 무엇으로 살고 있단 말인가. - 여기서 살인사건의 냄새가 나는 것이다.
술집에서 일하던 세키네 쇼코는 단지 행복해지고 싶어서 신용카드를 사용하다 돌이킬 수 없게 되어 개인파산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세키네 쇼코로 살고자 했던 그녀는 자기가 아닌 아버지 때문에 가족 전체가 빚더미에 앉게 된다. 사실상 아버지의 잘못이지만 고통은 그녀와 어머니까지 함께 받게 된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고,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뿌리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과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대책임을 져야 하는가? 부채도 상속받는 유산이라고 한다. 부채를 물려받지 않으려면 상속포기를 하면 된다고 한다. 가족이라고 묶여있는 사람들이지만 한 개인의 잘못이 그 가족 전체를 벌할 수 있는 것인가. 의문이다. 이 작가의 다른 소설 <모방범>에서도 보면 범인의 가족들은 도망치거나 숨거나 항변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을 받는다. 그 때도 이런 의문이 들었지만 답이 안 나온다.
배경이 1990년대 초. 사라진 세키네 쇼코를 추적하기 위해 옛날 행적을 찾아다닐 때 보면 1980년 중후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지금은 2000년하고도 8년이 지났으므로 약간의 고루한 면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건 그저 숫자에서 오는 선입견일 뿐이다. 지금 읽으나 이 책이 출판된 그 때 읽으나 신용카드로 인한 폐해로 뒤범벅인 현실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으니 별 위화감은 없다.
마지막에 드디어 발견한 그녀. 신조 교코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녀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하지만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버린 결말은 약간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만큼 확실히 그녀를 잡았다는 것이니까 속이 후련해지기도 했다. 여운이 남는 뒷마무리였다.
미야베 미유키. 이 작가는 사회문제를 추리소설, 미스테리소설이라는 흥미로운 장르에 담아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쉽게 읽히는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며칠동안 가슴에 묵직하니 생각할 꺼리가 남게 된다. 신용카드라는 편리한 수단이 사람 목을 죄여 오는 칼날이 된다. 내가 들고 있는 카드도, 내가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용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 날카로운 끝을 보여줄 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