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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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실린 시를 제외하면 시를 읽은 적이 거의 없다. 소설은 어떻게든 제 경험을 끌어와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 보겠는데, 시는 그게 어렵습니다. 시 속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시에서 어떤 시대를 다루는지 짐작도 어렵습니다. 그냥 제가 상상력이 없는 셈이지요. 친절한 소설도 즐기기가 어려운데 시는 오죽할까요. 그렇다고 시인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시인이 쓴 에세이나 산문을 읽기도 합니다. 소설을 읽을 때 감수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감수성을 기르려는 노력입니다. 시인의 작품을 많이 사서 읽지 않고, 몇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는 편입니다. 그 중 한 명이 시인 정호승의 작품입니다.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출간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제 시인 작품 시리즈를 업데이트하자고 생각해서 읽었습니다.

 

이 산문집에서 고통은 다양하게 변주됩니다. 인내가 됐다가 분노도 됩니다. 때로는 방황과 망설임도 됩니다.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할까요? 한 순간만이라도 잊으려고 다른 집중할 것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한 순간만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한 순간은 너무 짧습니다. 긴 인생 속에 몇 순간만 고통을 잊는다면 마음이 너무 버겁지 않을까요? 저자는 순간을 지속하기 위한 방법으로 용서를 제시합니다. 이 때, 용서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마음을 빠트리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고통을 느낀다면 어떨까요? 신체적 증상이나 태도로 드러납니다. 마음이 고통스럽다고 신호를 보내는 셈이지요. 그 신호를 무시하고 일상을 이어간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자신을 용서할 타이밍을 놓칩니다. 마음이 겪는 고통은 해소되지 못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 고통은 트리거와 마주치면 다시 되살아납니다.

 

이럴 때 저자의 잊으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중요하다는 말은 큰 힌트가 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인생은 깁니다. 그러나 무한하지 않습니다. 유한합니다. 유한한 긴 인생 속에서 고통을 떠올리지 않는 순간은 짧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시간은 깁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아가는 자세는 필요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더 알차게 보내기 위한 방법입니다. 이 때 우리가 마음에 간직해야 할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 방법입니다. 그 방법이 곧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만약 잘못만 마음에 새기고 방법을 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음도 몸도 인생도 극과 극을 오가는 진동 상태에서 살아가는 셈입니다. 평생 이렇게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자정능력이 괴멸합니다. 언젠가는 스스로 나아갈 힘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용서라는 말은 그저 사과를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닙니다. 관계 속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발견하는 행위입니다. 이 행위가 너무 어렵다는 걸 알기에 때로는 망각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용기를 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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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을 팝니다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우리 마음을 병들게 하는가
제임스 데이비스 지음, 이승연 옮김 / 사월의책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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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을 팝니다>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판다라는 행위에는 이익을 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시스템 속에서 정신병을 팔아서 이익을 보는 걸까요? 생각해 보면 요즘처럼 교양 심리학 도서가 활발하게 출간되는 시대는 없습니다. 특히, 뇌 과학과 연관을 짓는 도서가 많습니다.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의 양에 따라 마음 상태가 바뀐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책에서는 뇌의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할 수 있는 약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현 시대는 마음의 문제를 약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과연 마음의 문제를 개인에게만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개인을 둘러싼 환경에는 문제가 없는 걸까요? <정신병을 팝니다>는 현 시대에 팽배한 물질주의가 사람의 마음의 상품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물질주의는 개인의 환경을 꾸준히 상품화했습니다. 의식주는 물론이고 취미의 영역까지 상품화했습니다. 책을 읽으려면 책을 구입해야 하고, 일기를 쓰려면 문구를 구입해야 하고, 연극을 보려면 관람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의 부정적 요소를 해소하려는 취미는 소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환경이 물질주의를 기반으로 성립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유일하게 물질주의가 상품화하지 못한 영역이 마음 건강입니다. 마음은 형태가 없습니다. 사회적 교류를 통해 저절로 나아질 수 있습니다. 약물의 효과를 입증할 데이터가 없습니다. 마음은 물질주의가 상품화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기술이 발달하여 감정 변화에 따른 뇌의 변화를 스캔할 수 있습니다.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의 종류와 역할을 파악하게 됩니다. 기술의 발전은 마음을 상품화할 기회를 제공한 셈입니다.

 

마음도 신체처럼 약물을 복용하면 회복된다는 논리를 구축하려고 많은 집단에서 노력합니다.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신경전달물질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연구에 거대 자본이 투입됩니다.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의 양을 조절할 수 있는 약물에 대한 연구에도 투입됩니다. 거대 자본은 위의 연구를 토대를 약물을 팔 수 있는 데이터를 만들어 냅니다. 문제라면 약물을 팔려면 처방전이 필요하지요. 거대 자본은 약을 처방할 수 있는 권위자가 필요했고, 그 권위자는 병원입니다. 병원 역시 신체적 건강 이외에도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생깁니다. 거대 자본과 병원은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주의는 병원이 정신건강의학과를 신설하게 하고, 사람들이 마음 건강을 위한 약물 복용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해 온 것입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자본을 회수하기 위해 마음의 문제를 진단하는 폭은 넓어지고, 약물을 처방하는 경우도 많아집니다. 사람들은 원래 지니고 있던 자정작용을 잃게 되고 약물에 의존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정신병을 팝니다>는 이 시스템 속에서 어떤 주체가 이익을 보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사회적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짚어줍니다. 마음 건강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도 일목요연합니다.

 

물론 병원에 가서 약물을 처방을 받는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병원은 마지막 보루로서 필요한 곳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교류를 통해서 균형 잡힌 마음을 지닐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음의 진동 폭이 작을 때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저의 진통 폭이 클 때는 자정작용이 어렵습니다. 그럴 때는 병원에 가서 의사와 상담을 하는 자체가 환경 변화이기 때문에 심리 문제 해결을 도울 수 있습니다. 다만, 다시 자정작용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정작용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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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담쓰담 치유하마 놀이터
아오야마 미치코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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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오야마 미치코의 작품은 서점대상 후보에 자주 오릅니다. 일본에서 실시되는 서점대상은 전국의 서점 직원들이 가장 팔고 싶은 작품을 고르는 상입니다. 일반인과 가장 가까운 입장인 사람들이 뽑는 상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일상생활에 잔잔한 울림을 주는 책이 많습니다. 매년 서점대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뜻은 아오야마 미치코의 소설이 일상생활에 깨달음을 준다는 뜻이겠지요. 특히 하나의 매개체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일상생활의 고민을 극복하는 전개방식이 꽤 훌륭합니다. <쓰담쓰담 치유하마 놀이터>에서는 놀이터에 있는 하마 조형물을 매개체로 삼아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여기 하마의 입을 만지면서 기도하는 어머니 사와가 있습니다. 사와의 소원은 학부모 모임 사람들과 관계가 원만해지는 것입니다. 사와는 딸을 두고 있습니다. 학부모 모임 참여를 어머니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참여합니다. 거기까지라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사와는 다른 학부모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질까봐 걱정합니다. 사와는 학부모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키누가와 씨에 대한 좋지 않은 평도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합니다. 사와는 딸이 학부모 모임에서 평이 좋지 않은 아이와 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의무감에 참여해서인지 친밀하게 교류하는 이가 없습니다. 그저 원만하게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랍니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언급을 별 거 아니라고 얼버무립니다. 그것을 계기로 학부모들과 서먹해집니다. 자신이 늘 걱정했던 일이 발생한 셈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서 하마의 입을 만지며 소원을 빈 것입니다. 모임에서 고립되면서 사와는 새삼 키누가와가 부러워집니다. 다른 학부모들이 자신에 대해 좋지 않은 평을 한다는 사실을 알 텐데도, 자신의 사정에 맞추어 행동하니까요. 누군가가 부럽다는 것은 자신도 그 상대처럼 되고 싶다는 뜻입니다. , 사와의 마음에도 모임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시간을 활용하고 싶다고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런 마음이 갑자기 생겨날 리는 없습니다. 사와는 키누가와에 대한 험담을 듣기만 합니다. 평소 주위의 평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연한 키누가와의 태도를 관찰하며 부러워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 마음이 사건을 계기로 커진 셈이지요.

 

사와는 용기를 내어 키누가와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교류를 통해서 사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또한 마음 속 깊이 묻어뒀던 자신의 인생 지도도 찾게 됩니다. 지금까지 해야 할 일로만 가득했던 일상에 하고 싶은 일도 더하는 방법을 발견합니다.

 

한편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학부모 모임에서 고립되었기 때문에 혼자서 지내기 싫어서 키누가와와 교류를 시작한 거 아니냐고요. 그렇다면 사와는 이기적이지 않느냐고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요, 카누가와는 몰랐을까요? 자신에게 닿는 사와의 시선을. 평소 자신을 바라보던 사와의 시선을 알고 있었기에 사와가 말을 걸었을 때 교류의 물꼬를 틀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사와의 고립은 계기입니다. 이기적 태도로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우리는 자신이 부러워하는 사람에게 선뜻 다가서기 어려워합니다. 상대의 영역에 함부로 침범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먼발치서 관찰은 할 수 있습니다. 본받고 싶은 점을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상대와 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잡는 것. 교류를 통해서 깨달은 점은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는 것. 이 두 가지 사항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저는 이 사항을 어떻게 생활에 적용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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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백온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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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일본 소설을 읽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의 정서를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달에 1권 정도는 한국소설을 읽자는 마음으로 매달 한국 소설을 결제합니다. 문제라면 한국소설을 워낙 읽지 않아서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가늠이 안 됩니다. 그래서 잡지도 읽어보고 SNS도 검색합니다. 그러다 매년 출간되는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알게 됩니다. 현대와 밀접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어서 굉장히 흥미롭더군요. 그 뒤로 매년 읽고 있습니다.

 

<2025 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는 총 7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고, 소설마다 평론이 실려 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감정에 몰두해버리고는 하는데 평론이 실려 있어서 객관적인 분석을 읽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모든 소설이 제 감정을 툭툭 치지만 가장 큰 한 방을 먹인 소설은 <바우어의 정원>입니다. 따라서 이 감상문에서는 <바우어의 정원>을 다루고자 합니다.

 

은화는 배우입니다. 배우 경력이 단절된 배우입니다. 다시 배우를 시작하려고 오디션을 보러 갑니다. 그곳에서 과거 같이 드라마 치료 워크숍에서 알게 된 동료를 만납니다. 은화와 동료는 내담자의 보조 자아를 연기합니다. 보조 자아에게는 가이드라인이 있습니다. 내담자가 어색해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가이드라인입니다. 보조 자아는 처음에는 가이드라인에 맞추어서 이야기합니다. 치료가 진행되면서 분위기에 익숙해진 내담자가 자신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 때는 가이드라인을 벗어나서 내담자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순발력과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 대목입니다. 감정을 격렬하게 호소하는 내담자 앞에서 은화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은화가 보조 자아는 잘못했다고 빌고 변명하는 역할이었다고 회상하는 이유일 것입니다.(68) 그 이후, 내담자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은화는 모릅니다. 다만, 추측해 볼 여지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화도 내담자처럼 재우고 있는 보조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은화는 보조 자아가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떱니다. 은화에게 보조 자아는 일종의 부채(負債)입니다. 스스로 과거의 행동이 잘못이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그 행동의 원동력이 대상에 대한 분노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과 불편함을 외면합니다. 정림과 만났을 때 부채를 떠올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기억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조 자아로서 심연에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마음에 새긴 채로 보조 자아가 깨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같은 잘못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을 구원처럼 여기며 살아왔기에 떠오른 셈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같은 잘못을 하지 않는 자세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보조 자아가 움직이지 않으면 동일한 잘못을 하지 않을까요? 보조 자아에게도 발언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보조 자아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보조 자아도 스트레스를 느낍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분노로 변화합니다. 분노는 동일한 잘못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잊게 합니다. 대상만 바뀌고 같은 잘못을 저지를 확률이 높습니다. 이런 상황을 막으려면 보조 자아를 어르고 달래야 합니다. 네가 기억하는 서사에서 이 부분만 주의하면 돼. 잘못을 계속 떠올리며 같은 잘못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면 다시 용서를 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어. 그러니까 속죄하며 살아가면 돼. 가끔 네가 숨쉬기 힘들면 이야기를 들어줄게. 지금처럼 내게 신호를 줘. 보조 자아를 무작정 재우려 하지 않고, 공감을 해 주며 차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보조 자아에게 자신도 같이 살아가는 동료라는 인식만 심어줘도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다시 심연에 돌려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조 자아의 신호를, 반응을 무시하지 마세요. 모든 것이 높게 쌓이거나 깊이 새겨지면 폭발합니다.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러기 전에<아티스트 웨이(줄리아 카메로, 경당)>에 소개된 아티스트 데이트도 하나의 방법으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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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불평등 - 시간의 자유는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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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소셜미디어에서 <시간불평등>이라는 제목을 봤습니다. 신선했습니다. 과거에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었습니다. 주로 에세이 형식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책에서 자주 접했던 문장이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라는 문장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이 주어져 있으므로 다른 이들보다 배로 노력하며 계발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자주 읽다 보니 잠을 많이 자는 건가, 너무 쉬려고만 하나 생각하며 노동 이외에 꿈을 이루기 위한 무엇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늘 피곤했고, 잠시 쉬는 틈에는 불안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불평등하다니! 지금까지 믿어온 명제를 흔들리게 해서 읽었습니다.

 

책에서는 노동과 일을 구분하여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끝까지 읽었는데도 노동과 일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이해한 선에서 노동과 일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려고 합니다. 노동은 살아가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 위한 것입니다. 일은 경제적 구조를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한 한도 내에서는 노동의 동기는 기본적 생활 유지이고, 일의 동기는 자발적 마음입니다. 그 비중은 엇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시스템 안에서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쪽은 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자발적이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무엇을 발견해서 도전하라고 교육받습니다. 자발적 요소를 강조하는 교육입니다. 그런데 자발적인 무엇이 경제순환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 ‘게으르고’ ‘국가로부터 공짜로 얻어내려 한다.’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132) 사회에 무의미한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는 셈입니다. 자발적인 일보다 경제순환에 도움이 되는 노동을 해야만 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발적인 무엇을 기본적 생활을 위한 노동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노동과 일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노동과 일이 같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셈이지요. 이 공식을 성립할 수 있을 때까지 사회는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사회는 이미 돈을 매개로 한 경제순환이 기본적 생활을 위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개인이 돈을 벌고 쓰면서 생활을 유지하는 구조입니다. 이 순환이 잘 돌아가는 사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 지표를 위해 복지제도를 마련하겠지요. 다만, 그 제도에서 개인의 일은 철저히 배제됩니다. 진짜 그 일을 하고 싶었다면 기본적 생활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진작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일을 절실히 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자발적 마음과 상관없이 경제순환에 도움이 되는 노동을 하라는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게다가 시간은 노동을 통해 일을 실현할 수 있을 때까지 건강을 유지해 주지 않습니다. 시간제한이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일을 포기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회는 한 주에 5일을, 하루 8시간 이상을 노동에 사용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잠을 줄여야 할까요? 아니면 휴식을 줄여야 할까요? 그렇게 하면 노동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요? 사회는 그렇게 하면 너무 힘드니까 네 일을 줄이면 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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