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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움직이는 소리 5
윤지운 글.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챕터12 동시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4권에서 이어지는 챕터로, 분량 비중은 4권>5권)
앞에서 말했다시피 산호는 자기만의 대화 체계에 따라 대화를 나눕니다. 그렇다 보니 주위 아이들에게 산호의 이야기는 거짓이 섞인 사실이거나 사실이 섞인 거짓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도 거짓도 아닌 과거 속 산호의 이야기는 현재의 산호 앞에 백퍼센트 진실을 털어 놓아야만 하는 상황을 제공합니다. 그 상황에서도 산호는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합니다. 지금까지 무난했던 자신의 대화 체계가 무너지는 듯하고, 자신의 말이 혜리에게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일지도 모릅니다.
말하고 싶은 것,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하기 싫은 것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경우에는 결국, 그 이야기와 관련된 소재를 꺼내지 않는 편이 상책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아닌 단편적인 사실만을 늘어놓게 될지도 모르고, 그것은 남들에게 유통기한이 존재하는 사실일 뿐이니까요. 산호는 자신의 대화 체계에 이 원리를 적용했을 법도 한데, 왜 그렇게 했나 보니 순간적인 울컥 때문이라고 합니다.
챕터13 손에 쥐었던 물방울이
물로 손을 적시면 시간이 흐른 뒤에 마릅니다. 물이 언제 묻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을 만큼 마릅니다. 그런데 손으로 물방울을 쥡니다. 순간적인 감촉만 있을 뿐 더 빨리 마를 테고, 그러면 더욱 갈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산호가 원하는 순간이 바로 이 손으로 쥔 물방울 같습니다.
산호는 혼자 있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 하고, 상대방과 있을 때는 배려라는 이름의 눈치를 봅니다. 늘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관계와 그 순간을 원합니다. 그런 관계인 사람이 가족,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의 혜리, 대학에서 만난 태온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산호는 은연중 배려라는 이름의 눈치를 보고, 복잡한 체계의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아마 늘 그렇게 생활해 왔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산호의 앞에 배려할 필요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 상대, 그저 자신이 떠들고 싶은 말해도 되는 상대가 등장합니다. 태온의 또 다른 인격인 레오입니다. 산호에게 레오는 자신이 막 굴어도 관계가 변하지 않을 존재입니다. 그러면서 레오 하나만이 자연스럽게 마음을 털어놓는 사람이고, 태온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저 눈치를 보고 복잡한 체계를 유지하며 이어가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산호가 레오를 또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친구로 받아들인 이유가 이것이라면, 산호는 누군가를 위한 배려조차도 없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순간을 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과 전혀 관련이 없는 레오와의 관계가 소중해진 셈입니다. 언제 어떻게 다시 볼지 모르는 레오와의 관계가 산호의 손에 쥐어지던 물방울 같습니다.
챕터14 1테라의 인간
태온이가 레오의 존재를 인식하고 생활하면서 느끼는 기분과 선호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감정의 변화들을 섬세하게 그리는 챕터입니다. 성격이 다른 두 인격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무난한 생활을 위해서 둘 중 한 명은 숨거나 자신이 아닌 척을 해야 합니다. 태온과 레오는 서로 협의 하에 현실에서 태온이로 살아가기로 합니다. 두 사람의 기억이 공유되어도 태온이가 꼭 필요한 순간에 레오가 나오게 되면서 두 사람의 생활은 마냥 무난하게 흘러가지 못 합니다. 레오가 태온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도 레오 나름대로 원하는 것, 예를 들면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거나 누군가와 사귀고 싶은 순간 같은 일들이 있었을 텐데 두 사람의 무난한 삶을 위해서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태온은 산호와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을 컴퓨터 본체에 비유하고 레오를 하드디스크에 비유하더니, 이번에는 자신을 온전하지 않은 1테라의 인간이라고 표현합니다. 태온은 레오의 정체를 숨겨야만 하는 상황이니, 1테라 중 절반밖에 가동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레오의 존재를 털어놓으면 안 되는 사회 체계 속에서, 태온은 레오까지 받아들여 주는 순간을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숨겨진 드라이브까지 전부 드러낸다면 자신은 1테라의 인간이 될 테니까요. 태온은 그러고 싶지만 레오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을 위해서 그 모든 순간을 외면했을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고 다른 사람들처럼 무난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외면했던 모든 순간들이 산호가 쥐고 싶어 하던 물방울과 비슷해 보입니다.
* 위의 리뷰는 개인 블로그에 올린 내용과 동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