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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괜히 듬직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무언가를 딱히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했습니다. 당혹스러운 상황이라도 그 사람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파동이 일어나고 자신에게 밀려왔습니다. 여러 개의 파동은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 알려주는 선택지였습니다. 그중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골라서 하면 됐습니다. 딱 한 가지 길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원하는 곳까지 갈 수 있는 길은 많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또 길을 걸어가는 방법도 매우 많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지금까지 거친 길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보여준 선택지에서 고른 길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길을 자신의 의지로 걸어온 것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의 의지대로 걸어온 것일까요?
<작별하지 않는다>의 후반부로 향할수록 열망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선의 부탁을 어떻게든 들어주려는 경하의 여정, 약속을 지켜내려는 인선의 여정,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생사가 불투명한 사람을 기억하려는 인선의 어머니의 여정. 이 모든 것에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1. 경하의 열망
경하는 인선과 있으면 든든합니다. 모든 행동에는 목적이 있고, 실패해도 의미가 남는다는 분명함을 느낍니다.(44쪽) 같이 있다 보면 경하도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세울 수 있고,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도 분명하게 고를 수 있습니다. 경하가 헤맬 때마다 길을 알려준 인선이 경하를 의지하려고 합니다. 경하는 거절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경하가 인선에게 다른 길을 보여줄 수도 있기에 기꺼이 눈보라가 치는 제주로 향합니다.
눈보라 속에서 경하는 인선의 집까지 가야 합니다. 교통편도 부족하고 눈길은 미끄럽습니다. 도중에 내리막길에서 떨어지기도 합니다. 원래대로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은 인선입니다. 하지만 경하 옆에 인선이 없습니다. 오히려 인선의 부탁을 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능선으로, 아무 것도 기다리지 말고, 누구의 도움도 믿지 않고, 망설이지 말고 등성이 끝까지(26쪽) 향해야 합니다. 제주에서 경하는 인선의 부탁을 들어주는 길 이외에는 없으니까요. 스스로 움직여야 할 이유가 그것뿐이라면 결과를 알 수 없어도 걷겠다는 열망이 가득한 여정입니다.
2. 인선의 열망
인선은 경하로부터 함께 통나무들을 심어 먹을 입히고, 눈이 내리길 기다려 그걸 영상으로 담아보면 어떻겠냐(46쪽)는 제안을 받습니다. 두 사람은 이 프로젝트를 실시하기로 약속합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매년 되새기지만 경하의 사정으로 때로는 인선의 사정으로 허공을 떠돕니다.
프로젝트가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인선과 경화 사이를 오가는 동안, 인선은 계속 나무를 마련합니다. 나무를 심을 시기와 눈이 내릴 시기를 염두에 두고 나무를 마련합니다. 경하가 제안을 철회하겠다고 말한 뒤에도 혼자서 계속 일을 진행합니다. 약속이 허공을 떠다니는 사이, 프로젝트는 어느덧 자신과의 약속이 됩니다. 습기를 머금어 젖었다가 말라서 단단해진 나무 위를 덮어줄 눈. 그런 눈을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은 인선의 열망입니다.
3. 인선의 어머니의 열망
인선의 어머니는 교도소를 여러 곳 방문합니다. 신문 기사를 모읍니다. 살아남은 사람을 모아서 단체 활동에 앞장서기도 합니다. 헤맵니다. 방황합니다. 더 이상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된 시대를 제외하고.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서만 행동하는 사람이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되새기며 행방을 찾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행동들입니다. 할 만큼 했으니 포기하자는 마음과 행방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부딪친 적이 진짜 없을까요? 아마 있겠지요. 그 때마다 ‘포기하자. 이감된 날짜를 기일로 하자.’(321쪽)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이감이란 말은 사람이 살아있을 때 성립하는 말입니다. 기일을 살아있을 때의 순간으로 정하자는 말에 어떤 기분일까요? 살아남은 사람은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세간의 말에 저항하고 싶은 인선의 어머니의 열망입니다.
이들의 열망은 타인과의 교류 속에서 생깁니다. 자신에게 길을 알려줬던 인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경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모두 누군가를 위해 행동을 취합니다. 행동이 가로막혔을 때, 다른 길을 알려주는 세간의 속삭임이 들립니다. 선택지가 늘어난 셈입니다. 그 순간에도 이들은 처음 정했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장 좋은 행동합니다. 이행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위한’ 행동이 ‘자신을 위한’열망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문득 제 열망이 사실은 누군가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