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물질적인 밤 - 이장욱 산문집 문지 에크리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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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와 어두워진 빛들에게>의 감상문에 표지만 보고 2권을 구입했다고 적었지요. 또 다른 1권이 바로 <영혼의 물질적인 밤>(이하 <영혼>)입니다. 나무가 빽빽한 숲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나무의 몸통은 아예 보이지 않고, 어렴풋이 보이는 나뭇잎의 형태를 통해 간신히 숲 속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숲은 마치 하나의 작품 같습니다. 독자는 작품을 끝까지 읽어야 비로소 보이는 하나의 주제-저자의 의도에 부합한다는 확신이 없지만-를 발견해냅니다. 그 때 느끼는 감정들은 숲속을 헤매다 길을 발견한 나그네의 심정 아닐까요? 저도 나그네처럼 <영혼>의 숲을 떠돌았습니다.

 

이 책의 핵심 챕터는 ‘3-2 문학의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의 비유에서 모티브를 얻어서(151) 쓴 이 챕터는 독자가 적극적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를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집에는 위대한 체류자가 있습니다. 위대한 체류자는 문학의 집에서 자신이 체류하는 곳을 하나의 방으로 만든 이들을 뜻합니다. 복도라든가 좁은 통로였는데 이들이 체류하면서 방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161)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자신만의 방을 마련하는 모습을 적극적 독서에 빗대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독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사람에게 현실세계와 책을 읽는 자신을 분리하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 속 가상세계는 저자가 컴퓨터가 되어 정밀하게 설계한 시스템입니다. 그 시스템을 가동하면서 현실세계를 같이 운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상과 현실을 오가면서 겪는 정보들이 혼돈됩니다. 그 혼란을 방지하려면 책에만 열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독자는 책의 세계를 유영합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경험치가 다르기에 이해도와 공감대가 다릅니다. 그 의미를 인정하며 다양한 견해를 접하면서 자신만의 깊이를 더 깊게 형성합니다. 문학에게 자신의(독자의) 집에서 위대한 체류자의 자격을 주고 머물 수 있는 방을 줍니다.

 

그렇다면 독자도 문학에게서 방을 얻은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아닙니다. 독자가 어떤 목적으로 책을 읽더라도 읽는 과정에는 독자의 경험이 투영됩니다. 그 경험이 문학 뒤에 있는 저자의 경험과 같지는 않을 것이며, 설령 비슷하다 해도 오롯이 알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독자는 그저 문학의 집에 있는 방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내게 한 이야기는 이런 거였다고 말하기 위해서. 여기서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메모도 하고 노트도 쓰니 문을 열어달라는 뜻으로. 그렇게 기다리며 찾은 의미에 의미가 덧붙어 방이 된 것이지요. 독자의 적극적 독서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신분, 위대한 체류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문학과 독자의 사이에서는 결국 독자의 적극성만이 양쪽의 간격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그 적극성에 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던 시대 분석, 캐릭터 분석, 문단별 주제 요약이 포함된다는 걸 이제야 깨닫습니다. 객관적 분석이란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뜻하는 걸. ‘국어에 정답이 어디 있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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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와 어두워진 빛들에게 문지 에크리
하재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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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에서 표지만 보고 2권의 책을 구매했습니다. 그 중 1권의 책이 <내게 와 어두워진 빛들에게>(이하 <내게 와>)입니다. 창가에 어떤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주위는 어두컴컴하고 창문을 통해 흰 빛이 내리쬐고 있습니다. 빛은 주로 희망을 뜻하는데 이 표지에서는 왠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미지의 빛 같습니다. 빛을 바라보며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 생각을 탐험하는 기분으로 이 책을 펼쳤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은 걸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걷다 보면 더 환한 빛을 보리라는 기대를 품고. 그러나 그 빛이 햇빛인지 달빛인지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요? 만약 달빛이라면 평생 어둠 속에서 달빛이 일러주는 길만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는 공간만이 보이는 곳에서, 우리는 달빛을 잃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저자는 그 한 걸음을 내딛고 싶어 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지 못해서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곁에는 자신의 고통을 들어주고 이해해 줄 어른이 없습니다.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줄 어른의 부재는 저자를 어둠 속에서 갈 길을 잃은 어린 아이로 둔갑시킵니다. 그 어린아이가 버티어 낼 수 있었던 이유를 시에서 찾습니다.

 

저자는 시를 쓰면서 나에게 행해졌던 어떤 폭력으로도 나의 존엄은 훼손되지 않았으며, 살아남아 증언하는 나 자신의 언어로 인해,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91)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시를 쓰는 행위가 변화의 여지를 제공한 셈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빛을 내는 방법을 익히며 자신만의 길을 지금까지 걸어왔으리라 생각합니다.

 

문득 저는 무엇을 원동력으로 삼아서 길을 걸었는지 돌이켜 봅니다. 여전히 빛을 찾으려고 제자리에서 두리번거립니다. 이해받고 싶은 감정이 표류하는 지금, 글을 읽고 쓰는 행위로 제 마음을 붙잡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 과정이 원동력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도 변화의 여지를 줄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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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꿈 트리플 16
양선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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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날개절제술>을 읽었습니다.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기획한 트리플 시리즈 중 하나였습니다. 꽤 흥미롭게 읽어서 다른 책도 구경해 보자는 마음으로 검색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말과 꿈>의 표지가 절 사로잡았습니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누구, 그 누구는 표정도 몸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치 태양처럼 형태를 이루며 어딘가를 비춥니다. 과연 어디를 향해서 빛을 비추고 있을까요? 소설을 읽으면서 그 빛의 도착지를 찾고 싶은 마음에 읽었습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소설 중에서 무엇을 골라 이야기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빛의 도착지가 비교적 선명하게 들어나는 <말과 꿈>을 다룰지 <퇴거와 나중에 함께 묶인 다른 산문들>(이하 <퇴거>)을 다룰지를. 전자는 공감을 얻는 리뷰를 쓰기에 좋을 것 같고, <퇴거>는 메시지를 함께 찾는 리뷰를 쓰는데 적합해 보였습니다. 고민 끝에 <퇴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되도록 구체성을 띠는 리뷰를 쓰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므로 꽤 어려운 도전이 될 것 같습니다.

 

<퇴거>의 줄거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는 내 친구를 향한 감정들입니다. ‘의 집에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활동만 하는 친구를 보면 안타깝습니다. 추운 겨울 수도관이 얼었다며 밖에서 뜨거운 물을 붓는 친구를 보면 고맙습니다. ‘가 생계를 유지하려고 일하며 보내는 시간이 몇 시간인지 생각하면 집에만 있는 친구가 얄밉기도 합니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다양하게 감정이 탄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아웃풋으로 이어지기는 어렵습니다. 친구는 가 그럴 수 있도록 해 주는 원동력이 되어 줍니다.

 

는 집에서만 글을 씁니다. 친구 옆에서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왜 친구가 떠나지 않는지 걱정되고 궁금하기도 하지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이점이 몹시 매력적이라서 가 먼저 이제 나가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아티스트 웨이>(줄리아 카메론 지음, 2012, 경당)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아티스트 웨이>에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억압받는 어린 아티스트가 존재하며, 그 어린 아티스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돌봐야 한다고 합니다. <퇴거>의 친구는 어쩌면 의 어린 아티스트가 아닐까요?

 

가 언제 어떤 이유로 친구를 만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친구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와 비슷한 연령대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에 발견한 친구이겠지요. ‘는 그 친구를 지금까지 키워왔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세 탕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면서도요. 왜 그랬을까요?

 

는 고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쉬고 싶은 마음과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의 비율이 늘 불규칙하게 변화합니다. 이런 일상을 반복하면서 는 친구가 자신처럼 활동하며 독립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친구가 먼저 를 떠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을 공들여 키워온 친구의 숨을 자신이 멎게 하는 형식을 갖추기 싫어서입니다. 나쁜 사람이 되기가 싫어서 친구가 먼저 떠나기를 바라는 가 진정 나쁜 사람일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는 줄곧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친구가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었던 환경과 친구가 기뻐했던 활동을.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는 친구와 관계를 유지할 힘이 서서히 빠집니다. 애써 친구를 붙드는 이 선택이 옳은지 의문스럽기도 합니다. 이제 친구, 네가 날 붙잡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빛에 담겨 있지 않을까요? ‘간절한 기도처럼 느껴집니다.

내 상상 속에서 친구가 살았던 나의 방은 네 벽면이 유리로 만들어진 밀실이다. 나는 그 투명한 큐브 앞에서 친구의 사소하고 무기력한 생활을 온전히 관찰할 수 있다. 친구는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친구가 떠나버린 밤, 나의 세간들이 누구의 손길에도 어지럽혀지지 않고 정갈하게 비치되어 있는 바로 그곳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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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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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굉장히 핫한 작가 욘 포세의 작품입니다. 2023년 노벨 문학상 수상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처음 접하는 작가인데, 과연 제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읽었습니다. 왠지 정답이 있을 것 같아서 감상문을 적기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2015년에 영어로 출간된 작품이라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1장부터 의문이 생겼습니다. 올라이는 자신의 부인이 아들을 낳을 거라고 거의 확신합니다. 요한네스라는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요한네스는 올라이의 아버지 이름이기도 합니다(10). 왜 올라이는 아버지의 이름을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려는 걸까요? 이 책을 읽는 내내 신경이 쓰였습니다.

 

2장부터 요한네스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처음에는 이 요한네스가 올라이의 아버지인지 아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요한네스는 어부로 일한 듯합니다. 배를 타고 바다에서 낚시를 할 생각을 하는 걸 보면요.

 

요한네스는 외출을 했다 친구 페테르를 만납니다. 페테르의 배를 타고 이곳을 빠져나갑니다. 페테르가 요한네스를 데리고 도착한 그곳은 아마도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세계가 아닐까요? 자신들의 도움으로 어른이 된 자녀들의 아이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요.

 

그렇다면 기억은 다 사라지는가. 그건 아닙니다. 기억을 그저 묻어둡니다. 이런 인생을 살았던 때도 있었다는 증표로. 현생을 지내기 바쁜 시기에는 잠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이곳을 떠날 시기가 되면 묻어둔 기억들이 고개를 듭니다. 요한네스가 아침에 자신의 습관대로 움직이려다 이질감을 느낀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요? 몇 회차에 걸쳐 삶을 살아온 모든 요한네스의 습관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올라이가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요한네스라고 한 이유도 비로소 짐작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임종과 동시에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지 묻기 위해서 아닐까요? 아이들은 생존방식, 사고방식을 누구로부터 배우나요? 바로 어른에게 배웁니다. 아이들이 물려받은 삶의 지혜를 세상을 떠난 사람의 시작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우리의 삶은 굴러갑니다.

 

우리는 다양한 분류 기준에 따라 여러 역할을 맡습니다. 그 역할에 주어지는 삶의 지혜를 잘 살려서 살아가는 하루, 그 하루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저 방안에서, 어린 요한네스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어린 요한네스, 그의 아들, 이제 그의 어린 아들은 이 험한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살아가는 동안 겪는 가장 힘든 싸움 중 하나일 것이다. 자신의 근원인 어머니의 몸속에서 나와 저 밖의 험한 세상에서 제 삶을 시작해야 한다, ...(후략)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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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감정들 - 나를 살아내는 일
쑥 지음 / 딥앤와이드(Deep&WIde)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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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을 꿈꾸던 때가 있었습니다. 원이 되어 다른 원들과 맞물리며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설령 제가 그 자리를 이탈했을 때, 그 자리는 쉽게 다른 원이 채울 수 있다고 해도요.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별이 빛을 뿌립니다. 저 별처럼 재능을 다듬을 수 있었을까 생각합니다.

 

별은 처음부터 오각형이었을까요? 오각형보다 꼭짓점이 많았을까요, 적었을까요? 꼭짓점이 많았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많았던 꼭짓점이 굴러가는 동안 다섯 개만 빼고 전부 닳아 없어진 것이지요. 그 닳아 없어진 꼭짓점을 다시 되살리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신에게 남은 꼭짓점을 더 날카롭고 뾰족하게 다듬은 거지요. 다른 원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어서 맞물리지는 못해도, 그 자체로 빛이 나기 때문에 원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원이 되지 않더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빛이 되어주지요.

 

그런데 제 꼭짓점은 참 웃겨요. 닳을 거면 닳아서 원이 될 것이지, 짧은 선분이 되어 꼭짓점을 유지해요. 선분이 짧으니 다른 원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맞물릴 수 있어요. 그렇게 맞물리다 선분이 길어지면 다른 원이 절 튕기지요. 그러면 또 다시 굴러서 선분의 길이를 짧게 만들고, 다시 튕기고. 이것을 반복합니다. 별처럼 두드러지는 꼭짓점이라도 있었다면 그걸 날카롭게 다듬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고요.

 

원도, 별도 될 수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개척해 놓은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마다 저 같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다들 원이 되기 바빠서 별이 될 생각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번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별빛을 보며 다시 구르자고 결심합니다. 이번에는 다섯 개의 꼭짓점만 남길 수 있다는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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