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말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막스 피카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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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아이들 국어를 가르칠 때 나왔던 언어에 대한 설명문을 읽는 기분.
배수아 때문에 샀지만, 이런 글은 사실 패스하고 싶은 글 중 하나다.
하지만,
그녀가 열심히 읽으며 고민하고 재해결한 작품이니 만큼 열심히 읽고 리뷰도 열심히.

 

☆ 언어의 선험성

 

선험성은 사랑으로 인해 인간의 말 속으로 들어왔다.

언어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있는 것.
어렵게 표현하고 있지만 침묵도 언어라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선험성에 더욱 가까운 어른이 더 좋은 표현,
이를테면 새로운 표현을 하지 않을까?
아직 어른의 언어가 깃들지 않은 아이가 선험성에 더 가깝다면 말이다.

 

20쪽,
언어는 단지 필요와 목적에 맞게 조합해놓은 사물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살아온 선조가 보았던 모든 것, 즉 존재했던 모든 지나간 사물들 전체를
음성기호로 표기한, 세계에 대한 체계적이며 총체적 묘사" (F.마우트너)인 것이다.
만약 언어가 오직 필요에 의해서만 활용된다면, 언어는 닳아버리고 수축될 것이다.
언어는 침몰하게 될 것이고, 모든 침몰하는 것들을 자신 안에 담아버릴 것이다.
선험성으로 인해 언어는 단순한 용도, 단순한 전달수단 이상의 위치에 있다.
예를 들어, 단순한 전달수단에서 출발한 침묵은 뭔가가 결여된 것이며
비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선험성에서 출발한 침묵은 인간의 최초를 향해,
혹은 인간의 종말을 향해, 어떤 기대를 향해 뻗어나가게 된다.

 

28쪽,
인공언어는 모든 공간을, 모든 시간을, 마치 압착기처럼 짜내서 폐기해버린다.
그것은 오직 순간만을 위한 언어다. 마치 순간만을 위해 일회적으로
임대한 것과 같다. 사람이 인공언어를 말한다. 하지만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기호를 뱉었을 뿐이다. 그의 세계에는 언어뿐 아니라
사물들까지도 축약되어 존재한다.

 

30쪽,
선험성을 갖춘 언어에는 치유력이 있다. 그런 언어는 인간을 치유할 때,
인간이 스스로를 치유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언어 자체가 먼저 치유를 필요로 한다.

불멸은 유한하며 유한한 것은 불멸한다.
살아 있는 사람은 타인의 죽음을 살며,
죽는 사람은 타인의 삶을 죽는다.
(헤라클레이토스, <<단장>>,62)

 

이 문장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 시절 인간은 선험성이 언어와 대화하는 지점을 알고 있었고,
언어가 말하고 있을 때 언어를 급습했다.
이 문장에서 나오는 치유력은, 궁극적으로 모든 내용을 초월한다.

 

☆ 앞서 주어진 것

 

인간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모든 요소는 앞서 주어진 것인데,
그것은 옛날에만 해당하는 일, 지금은 물건도 믿음도 성취해야만 한다.

 

36쪽,
인류의 원죄 이후로 악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원죄 이후로 행해진 모든
악의 형상이 개별적인 악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의 개인적 악은
원죄로 인해 이후 인간에게 침투한 악과 사악한 경쟁을 벌인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악한 행위가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원죄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자신의 악을 창조해 내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 어느 한 인간이 악하다면,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있는 악의 일부분,
앞서 주어진 악이자 원죄의 일정 부분에 관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이
악하다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그에게 어떤 악도 앞서 주어지지 않았고, 대신 그 스스로가
자신의 인성과 개성을 통해 악이란 개념을 최초로 도입이라도 한 것처럼 이해된다.

 

☆ 언어의 탄생

 

 1) 언어가 몸짓에서 태어났다는 주장
 -> 몸짓은 말과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영역에 속한다.
말은 비범한 존재라서, 심지어 존재 자체를 생성하기도 한다. 반면에 몸짓은,
다른 현상에게 제공할 만큼 풍부한 존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이 몸짓에서 출발하여 여러 단계를 거쳐 언어에 도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 동물의 소리를 모방하여 생겼다는 주장
  -> 동물의 울부짖음은 인간의 말과는 달리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행위가 아니다.

 

 3) 인간이 자연과 동물의 소리를 흉내 내는 중에 자연스럽게 언어가 생겨났다는 주장
  -> 사람이 자연의 소리에 의미를 부여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람에게 언어가 있었다는 뜻이다.

 

☆ 말과 소리

 

정신의 탁월함은 소리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대치점에서,
소리가 둔하고 확실하게 퍼져가는 그 지점에서, 정신은 명료해지며,
소리 자신도 비로소 말로 분명하게 태어난다. 소리가 복종하는 지점에서,
정신은 생기를 얻으며 소리는 정신에 의해 포착되고 길들여진다.

소리는 말에서 이탈해 자신을 사물과 직접 연관시켜 버리는 악마적 능력을 갖추었다.
오히려 정신의 지배를 뿌리치고 도리어 정신을 자신의 하급 수행꾼으로
전락시켜 버릴 수도 있다.

 

57쪽,
의성어는 소리를 재현하는, 단 하나의 성질만을 갖는다.
의성어는 부수적인 성격에 불과하다. "까마귀"는 까마귀는 까옥거림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만약 그 단어가 오직 사물의 음향적인 요소만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사물에게 종속되어버릴 것이다.

 

59쪽,
소리를 정신에게 복종시키기, 아이는 아직 그것을 할 수 없고, 노인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말 속에서 오직 소리에 속하는 것이 많이 들리게 된다.
정신과 소리는 작별을 시작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모든 것이 작별을 고한다.
소리와 정신의 작별은 궁극적 작별에 대한 선행 작별이다.
이윽고 정신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날, 완전히 꺼져버리는 날, 기억상실형 실어증 증세에서처럼,
그때 이름은 오직 음향에 불과한 것이 된다.

아마도 기억상실형 실어증에 걸린 사람에게 이 내용을 적용하면 될 듯하다.


☆ 말과 빛

 

하나의 단어가 말해지는 곳은 환하게 밝아진다. 말 속에 깃든 빛은 소모되지 않는다.
말 속에는 물론 어둠도 깃들어 있다. 어둠이 빛과 가장 가까이 자리하는 장소는
말 속이다. 말 속 어둠은 빛으로 옮겨지기를 원한다. 침묵은 말이며 산란된 빛이고
말의 빛 속으로 수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날, 언어는 더 이상 빛이 아니고, 단순한 조명에 불과하다.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엔
소리만 있으며, 말들은 서로 충돌하기만 한다. 하지만 말은 빛이 되고 싶어 한다.

 

☆ 말과 존재성

 

언어는 모든 목적과 효용을 초월하는 실존적 힘을 가지며 목적과 효용만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존재다. 언어는 채워지기 위하여 스스로 인간을 진리를 향해 몰아붙인다.
언어의 존재성은 과거의 것과 미래의 것을 자신의 현재 속으로 끌어올 수 있다.
그래서 종종, 인간의 도를 넘어서서, 하나의 말 속에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들어 있는 것이 가능해진다.
존재성은 언어를 인간과 사물 사이에 위치하는 제3의 존재로 만든다.
언어가 장벽처럼 사물 앞에 서 있을 경우 인간은 즉각적으로 사물을 장악하기가 불가능하다.

 

☆ 언어의 의미

 

인간의 말이 부재하면 세상의 표준도 부재한다. 마치 어룡이 살아 있던 시대,
동물과 식물이 한계를 모르고 한없이 부피가 늘어나기만 했던 시대와도 같다.
말이 없으면 공간과 시간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공간과 끝나지 않는 시간이 있지만 그것은 영원이 아니다.
언어를 파괴해버리면 인간의 원초적 말과의 연관도 잃어버리고 만다.
인간의 말과 그 말의 표준은 원초적 말로부터 나왔다.
그러면 외부 세계 또한 다시금 무질서로 빠져든다.
언어는 인간을 인간 자신보다 더 어녀어로 말해진 것 자체보다 더 높이 상승시킨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어떤 질문에 대해 대답으로 화답하지 않는다.
또 다른 질문으로 화답한다. 그리하여 언어는 말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에게 멀어진다.
동물에게는 언어가 없기 때문에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사물과 하나가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동물은, 인간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의 자기를 사물에게로
이전해버린다. 그렇듯 언어는 인간에게 단지 객체를 차지하는 것뿐 아니라,
객체와의 거리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역할도 한다.

 

☆ 말과 진리

 

진리는 막강하다. 진리의 한 문장으로부터 막강한 힘이 나온다.
언어는 진리 아닌 언어가 과도하게 말해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진리 아닌 것이 언어를 과도하게 점령하게 되면, 비록 언어가 진리를 말할 능력을
유지한다고 해도 진리를 보유하는 능력은 상실한다. 언어는 계속해서 안간힘을 쓰며
증명을 통해 어떻게든 진리를 붙잡고 있으려고 한다. 하지만 언어의 능력이 간신히
진리를 말하는 수준에 불과할 뿐 진리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부여하지는 못하므로
진리는 언어 안에서 더 이상 현존하지 못한다.

하나의 세계 속에 속하면서 말은 한계를 갖는데 오직 잡음어에 불과한 파괴된 말만 한계가 없다.
진리의 어휘를 말로 하는 것, 그 소리를 따라 흉내 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말은 어떤 결정적 행위를 통해 인간에게 도달해야 한다. 그래야만 말은 진리의 양태를 갖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말은 단지 우연히 인간과 마주친 것이며, 다른 모든 우연적인 사물과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것일 뿐이다.

 

☆ 말과 결정

 

언어는 결정의 행위로 스스로를 갱신한다. 이 원초적 권역에서 언어는 다시 원초적 상태가 된다.
하나의 무의미한 말, 이미 사용되어버린 말은 결정의 행위에 받아들여짐으로써
의미 있는 것으로 태어난다. 결정의 행위에 의해 말은 단지 한 가지 사실만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말은 다시 정확해진다. 자유의 행위에서 말은 선택되고 제한된다. 인간의 어법이 형태를 찾는다.
자유의 행위가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어법도 따라서 분명해진다.

인간이 더 이상 언어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언어는 파괴된다. 말과 말은 서로 젤라틴처럼
엉겨붙고, 말과 사람도 엉겨붙는다. 인간은 더 이상 말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젤라틴 말 덩어리는 사람에게 달라붙어 자기 마음대로 끌고 간다.
거기에 인간의 자아는 더 이상 없다.

 

☆ 인간에 내재한 전체로서의 언어

 

인간 안에 내재한 전체로서의 언어를 쉽게 가을이 되면 추운 나라를 떠나 이집트로 날아가는
새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새들은 자신들의 눈앞이 아니라, 자신들 안에 이집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몸에 난 깃털과 마찬가지로 새들에게 속한 어느 것이라고.

 

114쪽,
귀머거리와 벙어리인 자에게도 전체로서의 언어가 내재한다.
그는 비록 말은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이치를 터득한다.
침묵하는 전체로서의 언어가 그 안에 들어 있다. 그 언어로 그는 농아의 장벽을 극복할 수 있다.
그는 언어네 참여하며, 말하는 자에 속한다.

 

118쪽,
어린아이의 언어는 전체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 이전의 언어다.
전체성 스스로가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아이의 말에는 하루의 그림이 침묵하고 있다. 그림은 침묵하면서 아이의 안에 있는
침묵하는 언어를 향해 이야기한다. 어른의 말에도 하루의 그림이 있다.

 

121쪽,
오늘날의 말은 이제 내면 언어의 전체성과, 그리고 침묵과 거의 아무런 연관이 없는 상태다.
말은 자신의 전체성을 내면의 심연에 두고 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말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알 뿐이다. 말은 고립되었다.
언어의 전체성은 더 이상 말에 어떤 효력도 발휘하지 않는다.

 

☆ 언어의 구조

 

주어, 서술어, 명사, 조사 등으로 설명하면 됐던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

'주어, 술어, 목적어. 위협적인 사물에 대항하는 침묵의 무한성을 헤치고 나가기,
주어라는 통나무로부터 출발하여 다른 곳으로 향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장이다.

고대의 언어는 주어, 술어, 목적어가 줄을 지어 차례로 등장하는 게 아니라 모두 한꺼번에
공중으로 상승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어휘도, 주어도 동사도 아닌,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제품이 문장을 지배한다.

 

129쪽,
인간이 긴 중복문을 쓰던 시대의 시간은, 오늘날의 시간보다 덜 주관적이었다.
그런 문장은 날카롭지 않고, 일단 외형적으로도 난폭하지 않다.
애매한 것, 넓게 펼쳐진 것에서 출발하여 하나인 것, 분명한 것으로 돌진하는 정신의 구조가
그런 문장에서 나타난다.

오늘날 문장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짧게 던져놓는다. 언어는 거칠고, 또한 경솔하다.
인간이 대상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최종 결과로서 문장에 하역된다.
더 이상 아무것도 문장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 언어의 다원성

 

쉽게 알 수 있는 그 다원성을 말하는 것이 맞다.

저자가 제목으로 내세운 '고지 독일어'를 우리의 '표준어'로 생각하고 읽으면
좀 더 쉽게 읽을 수가 있고, '방언' 같은 경우는 우리의 사투리보다는
'나만의 언어'로 생각하며 읽으면 도움이 된다.

 

☆ 파괴된 말

'잡음어'에 대한 것이 대부분인데, 말이 파괴됐기 때문에 잡음어가 생겼다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설사 인간이 없을지라도 잡음어는 스스로 공간을 가득 채워버릴 기세다.
잡음어는 인간으로부터 튕겨져나와 인간의 주변을 빙글빙글 돈다.
그 상태로 독자적인 조직인 양 인간에게 작용한다. 오직 덩어리로서, 오직 질량만인 존재로서.
그것은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을 건드리지 못한다.
단지 정신의 하부구조에만 영향을 끼칠 뿐이다.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반사신경에만.
인간은 말의 주인이다. 그러나 잡음어의 하인이기도 하다. 인간의 태초부터 잡음어에 반응하여
허둥거렸고, 잡음어에 쫓겨 달아났다. 잡음어와 함께 그 어떤 무엇이 인간의 앞에서
허둥지둥 움직이고, 인간은 거기에 휩쓸려 함께 허둥거린다.

저자는 잡음어가 나타났기 때문에 내적인 역사가 없어졌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그저 모든 것을 통과시키게 됐다는데,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한다.

 

☆ 말과 사물

 

인간은 사물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사물이 인간에게 도착했음을, 인간이 사물을 받았음을
창조자에게 알리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인간이 말을 가진 이유다.
인간의 말은 다른 무엇보다도 창조자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창조의 결산서다.

말로 인하여 비로소 사물이 있다. 사물은 말로 인하여 부풀어오르며, 말로 인하여 팽창한다.
그래서 사물은 말을 기다린다. 사물은 인간을 재촉하여, 인간이 그 이름을 부르도록 만든다.
사물들 사이에는 주목받고 싶은 경쟁심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인간의 주의를 끌어
인간의 말이 자신에게 오게 하려고 분투한다.

 

사물을 말하려면 각  부족(인종?)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빠져서는 안 된다.
저자는 티베트어, 그리스어, 아프리카 언어를 통해 그것을 말하는데, 신분에 따른 말,
수량에 따른 말 등에 대한 것은 흔히 들어봤지만 아프리카 언어들이 오직 현재 시제만을
다룬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들에게 과거와 미래는 그저 '현재가 아닌 것이라는 것'.

언어는 자유이며, 따라서 아름답다. 매번, 말이 사물을 온전히 말하는 데 성공할 때마다
인간은 행복한 동시에 우수를 느낀다. 언어에는 잃어버린 전체성에 대한 그리움이 깃들어 있다.

저자는 인간이 사물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인간을 응시한다는 역발상을 한다.
사물의 응시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 바로 말이며, 대답을 건네면서 인간은 언제나 질문만 하는
존재로부터 벗어난다고~


사물의 질문과 응시에는 신의 시선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인간을 향한 신의 질문이 들어있으며
이 흔적에서만 사물은 신의 대리인이다. 인간이 말을 갖는 것은 인간이 이성의 섭리를 따르기
때문만은 아니고 세상의 섭리가 객체의 섭리가 인간의 사고를 돕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사고하기도 하지만 사물로부터 사고되기도 한다.

" 우리의 크라튈로스는 주장한다. 모든 사물마다 그 사물의 천성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하나의 올바른 명칭이 존재한다고. 그런데도 몇몇 사람들끼리 합의를 통해 자기들이 가진
소리의 저장고에서 임의로 말조각을 꺼내 그 사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제멋대로
정해버린 것이라고. 그런 식으로 결정된 것은 그 사물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
이름에는 자연에서 유래하는 공정함이 있고, 그 공정함은 어느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플라톤, <크라튈로스>)

 

☆ 말과 행위

 

말 자체를 넘어서는 과잉이 있는 말만이 행위를 드러낼 수 있는데,

행위는 자신의 근원을 잊지 않는다.
행위는 주저하면서 움직이다가 다시 말로 되돌아간다.

위에 나오는 '본능행위'라는 단어가 궁금해 찾아보려던 찰나 다음과 같은 반가운 글을 발견했다.

본능행위에는 일치의 힘이 있으며, 괴리가 발생하면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도울 줄 안다.
본능적 행동은 늘 인간 속에 내재한다. 설사 반드시 외부로 실행되지 않을지라도
잠재적인 영향을 미친다.

(중략) 본능행위는 말과 행동 사이에 아무런 괴리가 없던 낙원 상태에 대한 기억이다.

물론 본능행위도 다른 행동과 마찬가지로 어떤 시간의 영역 안에서 일어나지만,
여기서 시간의 존재는 별 의미 없는 우연에 가깝다.

 

저자는 오늘날,
인간의 말 중 안정적인 말보다 역동적인 말이 더 많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수동적이면서 정적인 말은 짧은 휴식시간처럼 역동적인 말과 말 사이에 잠깐 놓일 뿐이며,
수동성도 인간에게 설 자리를 잃었고, 수동성은 침묵을 필요로하는데 오늘날의 말과 인간은
침묵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침묵, 비역동적이며 정적인 말들은 놀이처럼 오직
아이들에게만 남아 있다고.
슬픈 일이다.

 

☆ 말의 시간과 공간

 

하나의 문장은 시간 속에서 진행된다.
괴테의 '커다란 배 한 척이, 막 여기 운하에 도착하려 한다' 를 통해 저자는
배의 선택을 통해 그 속에 현재, 과거, 미래가 공존하며 각자 따로 있기도 하다고 말한다.

정신이 내재하는 말은 공간 또한 창조해낸다. 시인은 이 내부의 공간에서 시를 쓴다.
시는 매 순간 가까움 속으로 멂을 가지고 오며, 동시에 가까움을 떨어진 곳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그리하여 시는, 이곳 한 사람 앞에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모든 곳에서 노래되는 듯하다.
하지만 파괴된 말, 잡음어는 정신의 편재를 악마적으로 모방하기 때문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고,
오늘날의 공간은 잡음어로 가득찼다.

 

☆ 말과 인간의 형상

 

인간의 얼굴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다가 목적 지점에 도달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내려와 그 자리에 안착한 것이다, 고로 말이라는 장치 때문에 인간은 얼굴 이외의 다른 것이
신체 위에 자리할 수 없고, 말 이외의 다른 것이 인간의 얼굴에서 나올 수 없음도 당연하다고.

언어는 인간과 인간의 결합이며, 연결이고 접근이다. 또한 인간을 향한 사물의 접근이기도 하다.

인간의 말과 형상이 관계가 있기에 이런 제목이 나왔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연결될 줄은 몰랐다.

 

190쪽,
수직성 자체는 오늘날까지도 인간 형상의 최우선 요소다.

그 수직성을 이루어낸 창조적인 움직임의 뒤를 이어서, 뼈와 근육,

피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 같다. 최초로 말이 침묵을 깨고 터져나올 때의
그 결정성과 인간 형상을 이루는 수직체의 결정성은 하나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직립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직립을 한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스스로를 직립시킨다.

진리의 말은 인간을 위로, 신의 섭리로 끌어올린다.

말의 진리를 통해 인간을 곧게 세우는 수직성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하부로부터의 자비이기도 하다. 자비는 상부로부터의 수직성에 호응한다.

 

말이 없다면 인간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마법의 힘을 나타내는 신비한 기호에 불과할 것이다.
원격 장치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처럼 인간의 형상은 움직일 것이다. 말로 인하여 형상은
자기 자신이 되었고, 인간에게 속하게 되었다. 인간이 이야기를 할 때면, 인간의 전체 형상은
급작스럽게 오직 말의 테두리로 돌변한다. 인간은 형상으로 말을 둘러싸고, 형상에 둘러싸이기
전까지 오직 환영이기만 했던 모든 것이 실제가 된다.

 

☆ 말과 목소리

 

이 책의 목차를 훑어 봤을 때 먼저 읽어 보고 싶던 이것을 꾹 참고 차례로 읽었다.

 

목소리는 신호다.

가장 전면에 있는 일차적인 신호. 목소리의 음색은 말 위에 드리운 보호막과 같다.
목소리는 아득히 먼 곳에서 와서 아득히 먼 곳으로 간다. 그러나 목소리는 말을 담는다.
말은 아득한 것을 현존하게 만든다. 인간이 말에 실어 보낸 진리는, 태초에 인간이 떨어져 나온
그 원초적 진리의 흔적을 목소리에 깃들게 한다. 인간의 목소리에는 인간의 본성이 인간의 근원적
기질이 더 많이 들어 있는 반면, 말에는 그 기질로부터 인간이 수행한 내용이 들어 있다.
얼굴은 듣는 행위의 일부다. 얼굴은 목소리에 속하며, 목소리의 침묵에 속한다.
전화 목소리는 추상적이다. 그것은 말의 진실한 의미에서 볼 때, 전체성으로부터 퇴거한,
전체성을 이탈한 목소리다.

 

말과 목소리는 인간의 본성을 균등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말과 목소리 사이에 균열이 생긴 근원은
인간의 원죄다. 원죄를 유발한 말은 말을 전달한 목소리보다 그 사건에 더 깊게 연루되었다.
목소리는 그 자체로 자신의 근원과, 영원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말은 정신의 특별한 행동에
의해서만이 그것들과 연관된다.

 

거짓말하는 자의 목소리는 표현되는 말과 보조를 맞추기 못한다. 목소리는 절룩거리며 말을
뒤따를 뿐이다. 뒤따르면서 커다란 쇳소리로 비명을 질러댄다.

 

라디오의 목소리는 말이 활주하는 기계적 매체에 불과하다. 라디오의 말이 지금 이 자리에
실재하는 인간의 말과 절대로 같은 효과를 낼 수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음악은 목소리를, 모든 목소리의 울림을, 최초의 인간이 목소리를 내었던 태초의 시간으로
인도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인간의 모든 목소리는 음악 속에 숨겨져 있다.
음악은 인간에게서 목소리를 덜어내어 태초로 데려갔다가, 인간이 침묵하며 기다리는 동안
태초로부터 다시 회귀한다. 그리고 목소리가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 그림과 말

 

침묵하는 그림은 말에게 자신의 침묵에 관해 전달한다. 그림은 말이 무절제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그림은 말을 붙든다. 그림은 말할 수 없는 것, 공인된 비밀의 세계로 돌진하려는 인간을
제지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그림 앞에 선 말은 그림이 침묵하는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다. 그와 반대로 추상화에서는 말이 흡수되지 않는다.
대신 밀려날 뿐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의 표현 중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자는 아이들이 표현하는 그림 또한 언어라고 말한다.
그림은 우선적으로 말을 통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원초적 그림이 존재하며,
그것이 모든 그림들 속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말은 그림 이상의 것이다. 말이 본질을 잃으면 조형예술도 그 본질을 잃는다.

 

꿈과 그림에 대한 다음의 이야기는 역자인 배수아가 아주 좋아했을 듯하다.

 

꿈의 그림은 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림은 자신들의 충만함으로 스스로 번식하고 번식하면서,
말의 영역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꿈의 그림에는 구원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
꿈의 그림들이 여기저기 부유하면서 불안하게 움직이는 것은 말을 향한 그리움의 징표가 아닐까?
아침에 일어나 최초로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말없는 꿈의 그림들과의 투쟁에서 마침내

구원받았다는 신호가 아닐까? 인간은 꿈에서 깨어난 후 찾아온 최초의 말과 신중하게 교류한다.


꿈의 독립성은 인간의 낮의 그림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낮의 그림은 꿈의 그림에 의해 더욱
부유하며 떠다니고, 인간을 위해 대지에 발붙이는 시간이 더욱 줄어든다.

오늘날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에 있는 회화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얼굴은 인간 자신보다
더욱 앞에 있다. 얼굴은 스스로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누설한다.
얼굴은 그 자신보다는 다른 것에 가깝다. 그래서 얼굴은 경솔하다.

 

☆ 말과 시

 

한 편의 완전한 시를 보면, 마치 이 세상에 다른 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시는 매번 새로운 것을 이야기한다는 인상을 준다. 말해진 장소 그곳에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든 곳에서 이야기를 한다. 시의 완전성은 인간의 것일 뿐 아니라 언어의 것이기도 하다.
언어 자체, 언어의 객관성은 완전함을 원한다. 언어는 완전성 안에서 스스로를 알게 된다.
언어의 완전성이 인간 자신의 완전성이기도 하다는 것은 인간에게 영예로운 일이다.
말은 이처럼 강력해서 탄생 이후 줄곧 스스로를 증거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말은 죽음마저도 관통해야 하며 죽음 가운데서도 생존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은 삶을 모두 통과한 후 죽음으로 들어서기를 원한다. 삶에는 말을 위한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
그리하여 인간은 말로 인하여 불멸이 된다.

오늘날 시인은 단지 사물의 말만을 갖는다. 시인은 말로 사물을 사냥하고 다닌다.

 

☆ 시의 선험성

 

시의 선험성이란, 지나간 세대 혹은 당대의 시인들로부터 각각의 시인들에게 전달되는 시적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살아 있는 시인과 죽은 시인이 있기 이전에, 이미 모든
시인에게 앞서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의 선험성은 인간의 창조적 행동 안에서 스스로
창조되며 인간의 구조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시를 읽으면, 시인이 선험성을 기다리면서 가졌던 떨림을 느낄 수 있다.

그 떨림을 리듬 속에 들어 있다.


또한 선험성을 만난 뒤의 안도감도 느껴진다. 리듬은 떨림이면서 동시에 안도다.

시적 선험성이 없는 시인은 시의 정신을 붙들어 놓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이것은 현대 건축의 경우와 유사하다. 역학법칙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서 있을 수 있게 된 건물,
그 어떤 위대함도 없는 건물처럼. 그러나 역학법칙은 위대함이 있을 때 비로소 고양된다.

선험성의 과잉은 시를, 시인 자신의 개성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시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시인보다 먼저 시를 노래하며, 시인보다 더 오래 시에 남는다.


이 과잉은 시의 결함까지도 감싸안는다. 위대한 시라고 해도 그 안에는 결함이 있는데,
그것은 시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단절과 관련 있는 인간 자체의 결함이다.
이 과잉은 시를 해석 불가한 존재로 만든다. 시의 선험성은 인간을 태초에 있었던 시간,
원초적 상태로 데려간다. 원초적인 것은 창조와 연결되기 때문에 해석이 불가하다.
과잉이 없으면 시는 한눈에 꿰뚫어보인다. 기계구조가 그러하듯이 투명하게 설명이 가능해진다.

 

시의 선험성이 결여된 시에는, 시적인 특별함 자체가 없다.
오늘날 많은 시들은, 자신들이 표현하는 것이 우연히 말이라는 질료 속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시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같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행위를 통해, 어떤 수학 공식을 통해, 어떤 기술의 매커니즘을 통해.
그런 경향은 시를 평준화시켜 저급한 수준의 시가 탄생하는 바탕을 마련한다.

 

배수아, 그녀의 말이 맞다.
이 책은 진지하다.
그저 국어책에 실려야 할 작품에 지나지 않는 그런 작품은 아니었다.
인간과 말에는 삶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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