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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독서 - 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읽기
이현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총 일곱 편의 고전을 로자 이현우의 강의를 통해 들어본다.
강의를 책으로 엮으면 읽기보다는 듣게 된다.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을 나열하는 것이 불필요하단 생각이 들어
읽는 도중 알지 못했다거나 알고 읽으면 좋을 것들만 메모 후 적는다.
○ 내 욕망은 정말로 내 것인가 ~ <마담 보바리>를 읽어버렸다는 것에
▶ 플로베르와 도스토예프스키
프랑스의 거장 플로베르와 러시아의 거장 도스토예프스키는 같은 해에 태어났다.
거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80년에 플로베르는 81년에 세상을 떠났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빈민구제병원 의사의 아들이었고 플로베르는 외과 의사의 아들이었다.
▶ 플로베르와 사실주의
플로베르는 창작 초반 초감각적인 낭만주의 말기 소설을 쓰다가 점차 사실주의 소설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마담 보바리>.
사실주의 소설에는 전형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고 아주 자세한 세부 묘사가 있어
마치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현실을 엿보는 듯한데, 요즘은 대부분의 소설이
묘사를 간소하게 처리한다, 영화와 경쟁하면서 문학의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 플로베르에게 소설이란?
겸손한 작가들이 말하는 '읽을거리'로서의 소설이 있고, 그 이상 뭔가 '필수적인'
소설이 있다. 소설이 세계의 인식의 한 부분을 담당한다고 생각할 경우
세계를 바라볼 때 소설을 제쳐놓는다면 인식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과학과 철학만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는데 그걸 소설이 보여준다는 것,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 플로베르였다.
가장 두드러진 경우가 러시아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인데
그들은 소설을 생계 수단이나 재미로 쓴 것이 아니라 '뭔가와 경쟁하기 위해'
썼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역사와 경쟁하기 위해 '전쟁과 평화'를 썼다고.
▶ 플로베르와 사르트르
말년에 플로베르에게 오랫동안 몰입한 작가가 사르트르인데 화루종일 카페에 앉아
<집안의 천치>라는 글을 썼다고 한다.
"나는 <마담 보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플로베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담 보바리>는 위대한 작품이다." 플로베르는 어렸을 때 멍청해서
집안의 천치라고 불렸다는데 집안의 천치가 어떻게 이런 위대한 작품을 썼는지
궁금해서 방대한 분량의 작가론을 쓴 것.
▶ 보바리즘
욕망은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는 폭군이다.
욕구는 생리적 요구로서 만족에 도달할 수 있지만,
욕망은 정신적 요구로서 어떤 경우에도 만족에 도달할 수가 없다.
엠마는 욕망을 채우려 했지만 그게 거의 화수분 수준이라 충족하지 못한 채
삶을 탕진하게 된다. 하지만 엠마 보바리는 특별한 여성이 아니다.
남들처럼 모방하고 욕망하는 그저 보통 수준의 여자다.
플로베르도 말하길 "우리는 모두 엠마 보바리다. 나는 엠마 보바리다."
라고. 이를 '보바리즘'이라고 한다. 이 말을 정의한 쥘 드 고티에 따르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기능',
곧 환상이 자아내는 병이 보바리즘이다.
○ 용서받지 못할 죄란 무엇인가 ~ <주홍글자> 법과 정의를 되묻다
이 작품을 '간통과 사랑'으로 읽는 일은 매우 쉽다.
쉬운 게 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죄와 벌, 법과 정의의 문제'로 읽어야 한다.
그녀의 모습은 이 세상을 구원할 아기를 안고 있는 신성 무구한 성모마리아의
거룩한 모습 같은 것을 분명히 떠올리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대조를 통해서만 그런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었을 뿐이다.
위와 같은 시작의 작품,
그런 그녀를 간통녀로만 받아들여 '뻔뻔한 여인' 정도로 읽어버린다면
작품 스스로도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 너새니얼 호손
호손 가문의 선조는 군인과 정치가, 치안판사로서 크게 명성을 떨쳤고,
몇 대조 할아버지는 마녀 재판에 관여했던 유명한 판사였다고 한다.
그런 집안이지만 결국 가세가 기울어 호손의 할아버지, 아버지는
선원이 되었고, 아버지는 객지에서 죽었단다. 그 아들이 바로 너내니얼 호손인데,
그는 서문에 조상들이 자기를 두고 다음과 같이 험담할 것이라 적어 두었다.
"저 녀석은 뭐하는 놈이야? 이야기책을 쓴다지. 그게 무슨 가업이야?
청교도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려고 해야 되는데 이야기책이나 써가지고 뭘
하겠다는 거냐. 인류에게 무슨 공헌을 하는 거야? 풍각쟁이나 되는 게 나았을 거야."
이렇듯 호손은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죄책감과 자의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호손, 미국 문학의 대표 작가가 된다.
▶ 호손의 결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는 레빈과 안나가 나오는데 레빈은 이성과 정신,
육체를 대표한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레빈과 안나의 결합일 텐데, 결국 육체를
택한 안나는 죽고 레빈만 살아남는다. 톨스토이의 경우 일단 욕망의 길로 빠져들게
되면 해피엔딩이란 있을 수 없지만 로렌스는 동의하지 않는다.
호손은 모호하게도 그 두 가지 결말을 다 보여주는데 따져 보자면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에 가깝다. 선과 악이 동일한데, 서로 대립물처럼 보이지만 그것의
동일성을 보여주는 게 헤겔식 변증법의 논리이기도 하다. 이런 논리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죄인들을 그리고, 헤스터 프린도 말하자면 '위대한 죄인'이다.
○ 정신보다 육체가 더 중요하다 ~ <채털리 부인의 연인> 온전한 자기의 발견
▶ 작품의 배경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큰 격변이 일어났고 우리는 폐혀 가운데 서 있다.
(...) 이것이 콘스턴스 채털리가 놓인 대략적인 처지였다. 전쟁으로 인해서
그녀는 머리 위로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사람이란 살면서 겪고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대표작이자
가장 유명한 '성애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시작이다.
이 작품은 막연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게 아니라 1차 세계대전 직후라는
구체적인 시대적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데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전쟁으로 불구가 된 남자와 그의 아내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가 코니 채털리만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비극이라는 것으로 구도를 잡았기 때문이다.
▶ 한국의 에로티시즘과 이 작품의 차이
토속적 배경이 나온다고 해서 한국의 토속적 에로티시즘과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예술과들과 교양 있는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콘스턴스와 그녀의 언니 힐더는,
말하자면 미적 측면에서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따라서 두 자매는 어릴 적부터 예술이나 이상적인 정치 사상 등에 대해
조금도 위압감을 느끼지 않았다.
예술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자랐다는 것인데, 우리들이 생각하는
시골스러움, 즉 촌스러운 것과는 다르다. 자연스런 활력 속에 지성이 더해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배경이 있다는 것이 이와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한국소설과 이 소설의 차이점이다.
불륜을 다룬다고 하면 거의 육체적인 본능을 다룬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토속적인
에로티시즘이라고 얘기하는 게 대부분 그런 식이다. 이를테면 나도향의 단편을 소재로 한
<뽕> 같은 영화. 물론 <채털리 부인의 연인>도 영화로 몇 가지 버전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육체적 본능만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 <햄릿>의 긴 망설임은 어디서 오는가
▶ 작품의 배경
서양에서는 근대와 중세가 나뉘는 분기점에 개인의 발명, 개성의 발견이라는 테마가 등장한다.
중세에 수도사나 수녀들을 그린 그림을 보면, 얼굴이 다 비슷비슷하다.
개별성을 그리지 않았던 것인데, 개인의 발견이라는 것은 자기 내면의 발견과
연결돼 있다. 자기만의 독자적 영역, 공유되지 않은 비밀 같은 것을 발견하고 의식하게
되는데,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그 시기와 맞물려 있다.
개성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되면 문학사조상으로는 낭만주의가 된다.
▶ 햄릿의 위치
햄릿에게는 기존 사회가 부여한 규범이 있다. 그가 지켜야 할 규범은 그저 그에게 주어진
것이니 그걸 준수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자기 자신이 가치의 창조자이고
입법자인 세계가 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의 주인공인 햄릿은 결국
그 사이에서 고투하는 인물이다. 어쩌면 현대인들도 여전히 그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을지 모른다. 그런 이유에서 햄릿이란 작품은 우리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 햄릿의 원작
편집본이 사후에 나왔기 때문에 셰익스피어가 인정한 확정 텍스트가 없다.
이것을 빼놓지 않고 끝까지 공연하면 네 시간이 넘는 분량인데,
그가 살았던 시대에 연극 공연은 두 시간 정도였다고 한다.
<햄릿>은 통상 1604년에 나온 '제2사절판'과 작가 사후에 나온 '제1이절판'을
절충하여 편집한다. 1603년 나온 '제1사절판'은 원고가 아니라 공연했던
배우 몇 명이 기억을 되살려 만든 공연본이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생각이다.
원래 셰익스피어가 의도하지 않은 판본이 먼저 나오는 바람에 1604년에 바로 출간된다.
최종적인 편집본은 작가 사후에 나오게 되고, 당시에는 저작권 개념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 차용도 많았던 것으로 보아 모든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독자적인 창안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결국 셰익스피어가 완벽한 텍스트라고
승인한 버전의 <햄릿>을 지금 우리가 갖고 있지 않다는 것.
○ 멀쩡한 정신만으로 살 수 있을까 ~ <돈키호테> 그 숭고한 광기에 대하여
셰익피어와 세르반테스가 동시대 작가이고 같은날 죽었다고 한다.1616년 4월 23일,
이 날을 기념한 것이 1995년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책의 날' 로
상당히 의미심장한 우연의 일치.
▶ 투르게네프의 햄릿과 돈키호테
햄릿은 사색가형, 돈키호테는 행동가형으로 단순히 유명한 두 주인공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당시 러시아에는 햄릿형 사색가만 너무 많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었고, 돈키호테형 행동가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돈키호테를 읽어 보면 기사도, 즉 방랑기사로서의 사명감에 과도하게
몰입해 있는 것 말고는 대단히 사색적이고 현명하다. 따라서 돈키호테가
생각이 모자라고 행동이 앞선다는 건 좀 단순화된 이미지이기는 하다.
어찌되었든, 이 두 인물을 유형화 해서 세계 문학사에서 늘 붙어 다니게
만든 것은 투르게네프의 공로~
▶ 모던한 작품 돈키호테
단순히 근대소설의 효시라는 의미로 모던한 게 아니라, 그전의 이야기들과는
달리 작품에 어떤 '자의식'이 있는데, '이건 이야기이고 소설이다'는 그런 자의식.
그런 건 포스트모더니즘 시기에 흔히 메타소설이라고 불렸던 작품군에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근대소설의 효시에 해당하는 이 작품이 어떻게 그런 성격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은 인위적으로 쓰인 소설이다' 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한다. 모더니즘 영화가 리얼리즘 영화와 다른 점은 이것이 영화라는
걸 보여준다는 데 있다. 관객에게 '영화적 환상에서 벗어나라'고 환기시키는 식,
연극으로 치면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와 비슷. 그런 예술적 전통이 소설에도
있는데 <돈키호테>는 그런 경향의 선두에 서는 작품이다.
▶ 세르반테스에 대해
스페인의 황금기가 저물던 시대인 16세기 후반, 마지막 전쟁인 레판토 해전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전쟁에 참가해 열심히 싸웠고, 살아
남기는 했지만 한쪽 팔을 잃었다. 귀국 중 해적들에게 납치 당해 5년간
포로이자 노예 생활을 하게 되고, 여러 차례 탈출 시도를 하고 반란을 주도해서
해적들의 경탄까지 자아냈다고 한다.
작품 속 책을 태우는 장면에서 <라 갈라테아>를
태우지 말 것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작가의 포스트모던적 유희를 진작 알고 봤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자신의 작품을 등장시키며 웃음을 자아내는 경우가 지금은 많지만,
당시에는 없던 유희를 사용한 대단한 작가 세르반테스.
그런 세르반테스지만 <돈키호테>의 에피소드 중 몇 가지는
이미 출판한 자신의 작품을 짜깁기 한 것으로 밝혀져 핀잔을 듣기도 했다고~
▶ 시대적 산물 돈키호테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스페인은 이중의 시대였다.
무적함대가 위용을 자랑하며 전성기를 구가해 신대륙 개척 이후 막대한 부를
가져와 흥청망청 소비하다가 16세기 후반 전성기의 마지막 불꽃과 같은 전투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 후 제국의 영광과 낙천적 분위기는 전혀 알지 못하고,
오로지 환멸과 좌절만을 경험하는 이중의 시대.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돈키호테의 이중성, 그에 대한 작가의 이중적 태도가
이해된다. 또한 한 가지 배경만으로 설명이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는데,
이중성을 염두에 두면 설명되는 것들이 많다고 저자 이현우는 말한다.
○ 사람은 무한한 꿈을 가져야만 하는가 ~ <파우스트>의 구원을 삐딱하게 바라보다
▶ 파우스트의 지필 시기
24세, 초창기 대표작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보다 한해 먼저 시작함.
2부까지 완성한 것은 1831년 그의 나이 82세인데 다음해 세상을 떠났다고.
작가 생전에는 출간되지 않고 다만 다 써서 봉투에 넣어 밀봉해 유고로 남김.
▶ 파우스트의 욕망은 곧 괴테의 욕망
지적 욕망은 곧 괴테 자신의 욕망이기도 했다. 시나 소설을 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연과학까지 손을 댄 엄청난 지식욕을 갖고 있었다고.
칠순이 넘어서 십대 소녀에게 구애했다는 괴테의 성적 욕망, 그와 관계가 있었던
여성들로 인명사전을 만들 수도 있을 정도라는데, 실연을 당하기도 했지만
자발적으로 포기한 적도 있고 그럴 때마다 작품을 한 편씩 썼다는 것이 괴테 창작의 비밀.
마지막으로 권력욕과 지배욕, 파우스트는 위 세 가지 욕망에서 모두 끝까지 가보는 인물.
만약 인간의 욕망을 위 세 가지로 구분한다면 그 모든 욕망의 끝까지 가보는 것이
'파우스트 프로젝트'인데 결론은 '도달할 수 없다'는 것.
▶ 오이포리온과 바이런
악마에게 영혼을 팔기로 약속하고 생전 원하는 것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얻기로 한다.
그레트헨 후 두 번째 성적 욕망 충족 대상인 헬레나, 그녀와 낳은 아들 오이포리온은
파우스트가 상징하는 '영원히 남성적인 것', 즉 멈추지 않는 것, 끝까지 간다는 것의
또 다른 형상이기도 하다. 여기서 오이포리온은 괴테가 직접 시인 바이런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어떤 점을 생각하고 만든 것인지 연상은 조금 어렵다.
▶ 지배자 비극과 나치
지배자 비극은 퍽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자기가 기획한 과업을 실행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강압적인 통치자, 권력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파우스트>라는 작품이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보면 이 문제의 현실감을 느낄 수
있는데, 파우스트적 지배자 형상이 20세기 나치 독일에서는 영웅적 지배자의
모델이 된다. 나치는 많은 작품을 금서로 지정했는데, <파우스트>는 유독
열광적으로 수용한다. 괴테가 그런 혐의를 벗으려면 파우스트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반면교사 식으로 그의 파멸을 그리고자 했다면 이 작품도 정당화되지만,
애매하게도 괴테는 파우스트가 충분히 구원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것이 이 작품의 문제점이라 지적한다.
○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석상손님>매력적인 난봉꾼 돈 후안의 작별
▶ 이름에 대해
스페인에서는 '돈 후안', 프랑스와 영미권에서는 '돈 주앙', 이탈리아에서는
'돈 조반니', 푸슈킨의 작품에서는 '돈 구안'인데 이는 '돈 후안'을 러시아 식으로
읽은 발음으로 '구'라는 발음이 러시아어 뉘앙스로는 '죽음'과 연관된다.
돈 후안의 파멸로 끝나는 작품의 결말을 미리 암시한다고.
▶ 석상손님의 의미와 가치
돈 후안 직계 텍스트로 돈 후안 텍스트 가운데서는 가장 짧은 단편에 속하지만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고, 연구와 해석도 많이 나와 있다.
기사단장의 석상은 남편이면서 법과 아버지의 권위를 뜻한다. 정신분석학에서
부권적 권위란 기본적으로 '금지시키는 것'인데 프랑스어로는
금지(non)와 이름(nom)이 발음이 같다. 성장과정에서 금지시켜 주는 자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없으면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가 된다. 커서는 아티스트나
건달이 되는데 이는 아이에게 금지, 즉 법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금지도 작동하지 않는 돈 후안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욕망에 대한 금지도
없고, 타협도 없고 모든 걸 성취하려고 한다. 그런 돈 후안에게 푸슈킨은
시인으로서의 자질까지 부여하는데 다른 텍스트에서는 그저 난봉꾼일 뿐,
시인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매력적인 돈 후안이 된다.
▶ 돈 후안주의
돈 후안주의란 현재의 충만을 근거로 해서 미래의 죽음과 죽음 후의 심판을
거부하거나 간과하는 태도다. 현재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데,
실상 현재란 '지나가는 것'이다. 청춘도 기분상 영원할 것 같지만,
지나가고 있거나 이미 지나간 것이다. 그것과 비슷하게 돈 후안주의는
현재의 젊음, 젊음의 현재를 어떤 규범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는 제약 없는
것으로 숭배하고 예찬하는 태도인데, 여성 편력이라든가 쾌락주의 같은 것은
부차적으로 따라붙는 것이다.
<오탈자>
72쪽 2줄 : 헤스터과 -> 헤스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