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이런 얘길 어디선가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장정일 아저씨가 말씀하시길,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은 하루키처럼은 못쓸 거라고.

글쎄 얄미운 정일씨의 겸손일까.

각설하고.

 

해변의 카프카 후 오랜만에 읽는 하루키.

신기하게도 하루키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데 가끔은 읽게 된다.

빌려 읽는 책을 싫어하는 내가 꼭 언니의 책장을 살피다가

음, 하루킨 그냥 그런데 하며 만지작만지작 고민을 조금 하고

어느새 꺼내 가방에 훅하고 넣고는 성남까지 와버리는 것이다.

 

그동안의 하루키의 냄새와는 조금 다른.

우선은 시점, 직접 끄집어 내 주는 일은 더 이상 안 하겠다는 듯

멀찌감치 떨어져 그냥 비추어주는 카메라와 같은 어투.

작가 관찰자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의 결합이라 해야 하나.

그 시점이 니들 생활에 이제는 관여하지 않고 난 그저 문제나

제시해야겠다는 작가의 마음가짐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뻔한 말로 하자면 가해자(시라가와,고오로기를 망친 사람들,

에리를 보는 대중들 등)와 피해자(마리와 에리, 고오로기, 카오루,

19세 중국인 매춘부 궈돈리 등)의 대조적 구조로 인간의 문제 (아마도 인간의 사회가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 내는 사회적 폭력?)를 하루키님께서 멋지게 풀어 내셨다는 그런 작품인데,

요즘의 내가 입에 걸레를 물고 삐딱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책 뒤에 실린 엄청나게 긴 두 편의 비평이 짜증나면서

상업과 함께 놀아나는 작가란 생각이 막 드는 건 어째야 할지.

물론 글과 상업이 붙어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긴 하지만,

어쩐지 입바른 칭찬일색인 책들은 이상하게도 아니꼽단 말이야.

 

문제만 꺼내지 말고 발전하는 모습도 아프고 짠하게 보여 주던 예전의 성장 소설이 난 훨씬 좋다, 뭐 그렇다고 마리와 에리 다카하시 등 인물 들의 미래를 안 비춰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쩐지

쓰기 위해 쓰여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도대체 내가 그에게 뭘 원하는진 모르겠지만, 뭔가 아쉽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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