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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
이바라기 노리코 지음, 박선영 옮김 / 뜨인돌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왜 하필 한국어야?
저자인 이바라기 노리코가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왜 하필 한국어냐고.
질문을 받은 때 저자가 딱히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고.
한두 가지가 아닌 복합적인 동기에서였기 때문이기에 요즘에는 이렇게 답한단다.
“이웃나라 말이잖아요.” 그런데 답을 들은 대다수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니
그들에겐 아직도 우리가 참으로 먼 나라이기만 한가보다.
한글이 있어 행복한 일본인 작가,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시로 평단과 대중을 사로잡으며 그 입지를 굳건히 한
여류시인 이바라기. 약학부를 졸업한 그녀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연극을 보고 문학의 길을 걸었다는 것도 참 이색적이다.
아마도 저자에게 있어 문학은 그녀 자신의 운명이지 않았을까?
그녀가 한국어, 한글에 관심의 싹이 튼 것은 참으로 오래전 일이라고 한다.
아마도 열다섯 쯤? 본격적으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그 후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74년. NHK 국제국 아나운서이자 재일 한국인 김유홍 선생이 가르치는
야학에서라고 한다. 대학원 교육도 아니고 야학에서 조선어 강좌를 가르치는 이에게
「내 인생 최고의 스승」이라는 타이틀을 걸었다면 저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내게도 이런 스승이 있었다면 외국어 하나쯤은
정말 잘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김유홍 선생을 만나 한글을 배운 이후로도 10여년의 시간동안 한글을 공부했다면
얼마나 깊이 한글을 사랑하고, 그로 인해 저자가 행복해했을 그 심정이
책을 읽는 내내 느껴졌다. 감동할 지경으로.
우리말을 배워줘서 고마워요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나서인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마주친
한국인 아주머니가 저자가 한국어를 배운다는 걸 알고 그녀에게 한 말이다.
그 아주머니의 마음에 공감 한 표를 던진다. 나 또한 한국어를 잘 하는
외국인들을 보면 마냥 기특(?)하고 흐뭇해서 고맙다고 말하고픈 심정이니까.
뜨개질처럼 재미있고 따뜻한 말, 한글
저자와 함께 한글을 배우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글을 마치 편물(뜨개질)기호 같은 문자야.”
코 늘림, 코 줄임, 교차뜨기 등 뜨개질처럼 한글도 모음에 막대기가 하나인가
둘인가, 왼쪽을 보는가, 오른쪽을 보는가에 따라 전혀 뜻이 달라지기도 하니
그럴 만도 하겠다. 갑자기 가요의 노래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참 센스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한국의 우리, 정이라는 말은 독특한 의미라고 했다.
물론 외국에도 our가 있고, 정은 한자로 情이지만 그 뉘앙스는 외국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라고 하니 한국, 한글만의 정서가 담겨서이지 않을까.
우리가 더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말, 한글
한국 사람들은 외국어에 참 열정적으로 시간과 노력, 자금을 들여 투자한다.
특히 영어를. 그 다음으로는 중국어, 일본어가 주 대세를 이룬다.
나 또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왜 하필 일본어냐고.
아니 요즘 일본어를 배우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이고
일본어 학원은 북새통을 이루며, 일본어 교재는 불티난 듯 팔린다.
씁쓸하다. 어디 일본어뿐이랴. 아침마다 배달되는 신문 사이에는
각종 어학원 전단지가 가득 끼워져 있다. 성인은 물론 유아에 해당하는
아이들을 상대로 한 학원까지. 한글은 등한시 된 지 오래다.
얼마 전 버스에 함께 탄 학생들의 입에선 욕지거리와 함께 외계어, 신조어가
난무해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글을 제대로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요즘 어린 학생들 사이에선
일본인 작가마저도 사랑한 우리의 언어가 그렇게 짓밟히고 있다.
저자는 단순히 호기심에 의해 오랜 시간 한글을 배운 것이 아니다.
한글은 우리 한국이라는 그릇에 담긴 우리 고유의 것이며, 그 얼이 담긴
한글을 그리고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책을 읽는 내내
자숙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고마웠다. 개인적으로 한글을 참 좋아하고
나름대로 한글을 제대로 알기 위해 사전까지 찾아가며 열심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저자처럼 열심이었냐고 물으면 머뭇거려진다.
이제 이바라기 노리코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언어, 한글을
더 깊이 그리고 더욱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겠다.
나도 이 가을 한글로의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