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쓴 원고를 책으로 만든 책 - 새끼 고양이, 길 잃은 고양이, 집 없는 고양이를 위한 지침서
폴 갈리코 지음, 조동섭 옮김 / 윌북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고양이가 묘어(猫語)로 쓰고, 폴 갈리코가 영어로 번역하고, 조동섭이 한국어로 옮겼다?
지금은 고양이를 기르고 있지 않지만 애묘가로서 솔깃한 글귀가 아닐 수 없다.
작가인 고양이가 새끼고양이, 길 잃은 고양이, 집 없는 고양이들을 위해 만든
지침서라고 하니 더더욱 그 내용이 궁금했다. 대체 뭘 알려주고 싶어서 글을 썼을까. 

타자기를 놓고 뒤돌아 앉아 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무척이나 재밌다.
뭔가 비밀스러운 작업이라도 하고 있는 듯.
이 책의 원고를 어떻게 발견했는가에 대한 사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지은이, 아니 영어로 번역을 맡은 폴 갈리코에게 원고를 넘긴 이는
큰 출판사에서 교육 관련 책을 만드는 편집자인 이웃이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집 앞으로 배달된 암호로 가득한 원고를 받아들고
난감해 하다가 문득 암호해독에 관심이 많은 폴이 생각났다나?
암호 연구가들이 가장 어려워 한다는 문자와 숫자의 조합으로 이뤄진 이 원고는
몇 달 동안 방치돼 있다가 뜻하지 않게 첫 문장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원고의 암호가 술술 풀리더란다.  

거얀이. 이 원고를 작성했을 것 같은 주인공인 거얀이가 뭔가 한참 생각하다가
알고 보니 그것은 고양이이며, 일부러 암호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
뭔가 둔탁하고 무딘 것으로 타자기를 조작했음으로 원고는 암호처럼 보인 것이다.
사람의 날렵한 손가락이 아닌 고양이의 말랑말랑한 발바닥이 있는 둥근 앞발 말이다.
그러니까 고양이가 암호를 일부러 작성한 것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단 것. 

결국 이건 폴 갈리코의 영역, 그러니까 영어권에 있는 고양이가 영어로
작성했다는 결론 아닌가? 그럼 고양이가 묘어(猫語)로 썼다는 글귀는 바뀌어야 한다.
영어는 묘어(猫語)가 아니니까 말이다. 묘어라고 하면 반드시 고양이만 알아들어야 할
그 무엇, 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절대 모를 언어여야 하는 거 아니냐 말이다.
그리고 글을 아는 고양이가 그리 많지는 않을 테니 지은이인 고양이가 정말
고양이만을 위한 원고였다면 차라리 자신의 육성을 테이프로 녹음하던가 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두 가지 결론이 보인다.
하나는 인간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어떤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 종족들의 우월성을 알리려고 영어로 작성하되 일부러 암호인 것처럼
타이핑을 엉망으로 해서 원고를 작성해 갖다 놓았든가, 아니면 폴 갈리코
혹은 원고를 건네 줬다는 그 이웃이 똘망똘망해 보이는 고양이 한 마리를 잡아서
앞발을 잡고 억지로 타이핑을 시켜 원고를 만들었든가.
두 가지 모두 가능성 있어 보인다.  

어찌됐든 폴이 원래 작가라고 우기는 고양이가 생후 6주 만에 사고로 엄마를
잃으면서 생존을 위해 야생생활을 버리고 인간의 집을 접수하기로 한다.
그리고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자신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쩔쩔매게 만들고 그걸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릴 줄 알며, 자신만의 재산
예를 들어 침대(특히 인간의 것), 의자(사람들이 앉을 수도 없는)등을 차지하는
과정, 인간의 집을 접수한 고양이로서 잃지 말아야 할 자세와 태도,
인간을 꼼짝 못하게 하는 소리 없이 울기, 그리고 다시 자신의 자녀를 교육시켜
또 다른 인간의 집을 접수해 자신이 왕 노릇 하게 만드는 비법까지
나를 포함한 인간이 보면 혀를 내두르고 경악할 만한 것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정말이지 반박을 하고 싶은데, 그러고 싶은데. 할 말이 없었다.
인간의 심리를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는 얄미운 고양이 같으니라고.
내용으로 미뤄보아 이 원고를 작성한 고양이는 암컷인데 인간 여자를
매우 조심하라고 한다. 인간 여자나 고양이나 아주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 역시 반박하기 힘든 내용이 들어있다. 이 고양이 심리학 전공했나? 

갑자기 중학교 때까지 키웠던 고양이가 떠올랐다.
이름은 고순이었는데 책에 실린 일러스트에서처럼 하얀색 바탕에
머리, 등, 궁둥이에 황토색 반점이 있는 정말 사랑스러운 고양이었다.
다른 고양이들 같지 않게 둥글고 귀여운 눈이며 고양이들의 비장의 무기인
그 소리 없는 울기. 처음엔 한 번 야옹~했다가 다음엔 입모양만 야옹하며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다. 고양이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걸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나 또한 내 팔뚝만한 생선을
우리 인간가족이 먹지 않고 고스란히 고순이에게 내어준 적도 있으니.
아니 그런데! 그것이 모두 고순이의 작전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아연실색 할 수밖에. 살며시 배신감도 느껴지고 말이다.
그랬니? 정말 그랬던 거니, 고순아? 

하지만 인간이 승리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읽다보면 영물로 여겨지는 만큼 정말로 고양이가 사람의 머리 꼭대기위에
앉아있는 걸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렇지만 난 확신한다.
설사 실제로 고양이가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 자신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얻어냈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는 고양이보다 우월하다는 사실 말이다.
그건 바로 우리 인간이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고양이조차도 신비해 마지않는 성(性)과 구별된 그 사랑.
그리고 고양이도 스스로 의아해하긴 하지만 자신이 접수한 가정의 가족들을
사랑했다고 고백했듯이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참 기가 막혔다. 고양이에게 조종당했던(?) 내 모습이라니.
그렇지만 변함없는 사실이 있다면, 난 여전히 고양이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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