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마을여행 - 소통하고 나누는 착한 여행을 떠나자 참여하는 공정여행 1
이병학 지음 / 컬처그라퍼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책장을 하나하나 넘길수록 왜 이리도 애가 타는 듯 먹먹해지는가 모르겠다.
내 고향도 아닌데, 그곳에 나의 추억이 서린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콧잔등이 시큰해지는지.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상기해내는 느낌이랄까. 

저자인 한겨레 이병학 기자가 대한민국을 여행했다.
자동차로 편하게 이곳저곳을 누비며 수박 겉핥기식으로 취재를 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곳곳의 마을을 뚜박뚜박 걸으며 그 장소와 시간 속에 온전히 묻혀
그곳에서 보고 느꼈던 것을 책장 속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의 여행은 강원도로 시작해 충청도 전라도를 지나 경상도로 끝맺는다.
굳이 마을을 여행한 까닭은 ‘마을이란, 사람이 함께 모여 몸 비비고 먹고사는
곳이고, 모여 먹고살다 보면 곳곳에 지명이 만들어지고 푸짐한 이야깃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란다. 저자는 그 이야기를 책에 담고 싶었던 것일 테다.
도시사람들과 농촌 사람이 정을 나누는 참 아름다운 여행을 널리 알리는 것도. 

이 책이 더욱 의미 있음은 1~2년의 짧은 시간이 아닌 10년에 가까운
오랜 시간동안 골짜기 마을, 비탈 마을, 트인 강마을 등을 들여다본 이유에서다.
TV에서 심심치 않게 시골마을의 어르신들이 하시는 “젊은 사람들은 죄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았소.”라는 말씀은 책에서도 여지없다. 

옛 마을 공동체 모습이 사라져가는 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르신들만 남아
별다른 희망도 없던 이 마을들이 농촌체험마을 등을 통해 활기를 되찾았다는 거다.
나 역시 가족들과 지난 8월 초에 양평의 한 체험마을로 휴가를 떠났다.
아직 아이들이 너무 어려 적극적인 체험은 힘들었지만 개울가에서 뗏목을 타고
송사리 잡는다고 물가를 서성이며 옥수수 밭에서 옥수수를 한보따리 따온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책을 보니 이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대한민국 곳곳의 마을에는 내가 아직 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했던, 무궁무진한
흥미로움이 가득한 곳들이 정말 많았다. 단순히 재미거리가 아니라 그곳에
수백 년 된 삶이, 이야기가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이 가슴을 벅차게 한다. 

왜 책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는지 전라도 편에 들어서서야 이유를 알았다.
나의 외갓집. 끝내 가슴에 묻어버린 그 집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난 서울 출생이다. 서울서 나고 서울서 자랐다. 고향이 어디냐 물으면 언제나
서울이라고 답하지만 나의 마음속에선 늘 외갓집, 전라도가 고향이었다.
검푸른 기와가 얹힌 지붕이며 담장, 흙 마당, 지하수를 끌어온 우물(나중엔 수도),
장독대가 놓인 뒷마당, 높다랗게 자란 탱자나무가 한쪽 담장을 대신하고
봄이면 앵두가, 가을엔 땡감이 오감을 즐겁게 해주던 그곳.
방학 때 찾아가면 할머니가 말 그대로 버선발로 뛰어나와 나를 안아 올리시던 그곳.
기차시간에 맞춰 대문 앞에 섰다가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손 흔드시던 그곳.
아침엔 담장을 휘감은 나팔꽃 위에 이슬이 아롱지고 저녁엔 노오란 달맞이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던, 밤새 집 근처를 가로지르는 철길 위로 달리는
기차소리를 들을 수 있던 그곳. 새벽마다 마을회관에서 새마을운동 노래가
힘차게 울려 퍼지던 그곳. 삼촌과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다시는 갈 수 없는
바로 그곳. 아직도 꿈에서나마 볼라치면 눈물부터 흐르는 그곳...
그곳이 글 두렁과 사진 사이에서 얼핏 보이는 듯하다. 

책에서처럼 정말 볼 것도 많고 체험할 것도 많은데 난 외갓집밖에 몰랐다.
돌아다닌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모와 삼촌을 따라 전주공원에 다녀온 기억이
가물가물 나긴 하지만. 어린나이니 누가 데려가주지 않으면 갈 수 없기도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외갓집이 있던 마을 자체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있고 체험거리가 있었기에 굳이 어디로 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대문 앞 텃밭에서 뽑아 먹었던 당근이, 채 익지 않았지만 맛이 최고였던 딸기가,
할머니가 설탕을 뿌려 만든 말린 누룽지가, 왜 이리도 사무치게 그리운 건지. 

밤하늘에 총총 떠 있는 별빛, 타닥타닥 나무 타는 냄새
가족끼리 와서 조용히 쉬고 느끼고 가면 쓰것소
토속적인 걸 좋아하니 그럼 아이들을 데리고 민속촌에 자주 갔느냐는 말을
가끔 듣게 된다. 그런데 난 민속촌에는 별로 가지 않았다. 이유는 인위적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삶도 이야기도 없어서 발걸음을 잘 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자주 다니자며 남편과 약속을 했는데 이 책을 들고
마을 곳곳을 하나씩 찾아다닐 생각이다. 마을의 이야기 끝에는 저자가 친절하게도
어떻게 찾아가는지, 어떤 체험거리가 있는지 연락처와 함께 상세하게 실었다.
검소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조용히 다녀와야겠다.
왁자지껄 놀다 가는 곳이 아니라 그저 가족단위로 몸과 마음을 평안히 쉬고 가길 바라는
마을 어르신들의 바람처럼 내 마음도 그렇기 때문이다. 

다리가 아프다. 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 마치 팔도를 걸어 다닌 양 다리가 아프다.
그런데 마음은 넉넉해졌다. 이렇게 푸근할 수가 없다.
잃었던 보물을 다시 찾은 느낌?
언제고 꺼내볼 수 있는 보물을 담은 쌈지 하나를 얻은 기분?
무엇보다 이제 눈물바람 하던 외갓집을 미소로 추억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책장을 덮고 눈을 감는다.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 한 걸음 내딛는다.
발걸음 끝에 대한민국 마을이 있다. 고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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