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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 1 - 눈동자의 집, 개정판 ㅣ 위험한 대결
레모니 스니켓 지음, 한지희 옮김, 브렛 헬퀴스트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어린이 책답지 않은 낮은 채도의 그림 속의 아이들의 우울한 표정이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고라도 하는 듯하다.
아낌없는 사랑을 아이들에게 주는 보들레어家.
아이들이 브리니 해안에 놀러간 사이 집이 화재로 전소되어 갑작스럽게
고아가 된 사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신들에게 남겨진 막대한 유산을
성인이 될 때까지 관리하는 은행가 포 아저씨의 집에 잠시 머물다가
고조부의 10촌쯤 된다는 친척, 올라프 백작의 집으로 보내진다.
여기저기 더러운 얼룩이 묻은 회색 양복, 면도를 하지 않아 얼굴에 털이 덥수룩하고,
붙어 있어 일자로 보이는 눈썹, 무엇보다 매섭게 번뜩이는 두 눈동자는
그를 몹시 굶주리거나 매우 화난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올라프 백작에게 느꼈던 첫인상은 암울한 현실이 되었다.
연극배우인 올라프 백작은 바이올렛, 클로스, 서니에게 울퉁불퉁한 침대를
하나만 주고 온갖 집안일을 시키며, 클로스의 뺨을 올려붙이기까지 한다.
너무나도 어린 나이. 부모님의 사랑이 담긴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에게
마냥 눈물 흘리며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건 사치였다.
어떻게든 올라프 백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훨씬 더 추악하고, 훨씬 더 잔인하다
눈동자 속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원작을 보기 전에 짐 캐리 주연의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이라는 영화를 봤다.
아이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몇 번을 봐도 못할 짓이지만 올라프 백작이
혼나는 장면은 그야말로 통쾌했다. 더 혼내줘야 한다고 흥분하며.
그렇지만 그렇게 당할 올라프 백작이 아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
위험한 대결이 13개 묶음의 책에 실리진 못했을 것이다.
영화에서 본 올라프는 차라리 신사였다. 책에서 만난 올라프는
훨씬 더 추악하고, 훨씬 더 잔인했다. 너무나도 뻔뻔하게 아이들을 부리고
그들의 재산만을 노리며, 합법적으로 빼앗기 위해 연극을 통한 진짜 결혼식을
계획하거나, 그 계획이 무산되지 않기 위해 서니를 볼모로 잡아
바이올렛과 클로스를 위협하는 모습에 구역질까지 느꼈다.
눈동자는 마음의 창이며, 소유자를 대변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눈을 바라보며 소통하지 않는가. 그러나 아이들을 옥죄며 감시하는 듯
올라프의 발목에, 문에, 벽에 새겨진 눈동자는 예외이다.
그것에선 일말의 동정심조차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다
레모니 스니켓, 본명 다니엘 헨들러는 참으로 친절했다.
“작가인 나로서도 이렇게 불행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슬플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행복한 아이들의 행복한 이야기를
읽고 싶은 독자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이 책을 내려놓고
다른 책을 찾아보세요. 감사합니다.”
이 얼마나 친절하냐 말이다. 그런데 난 이 경고를 무시했다.
덕분에 난 심장이 아리는 고통을 보들레어家 아이들과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레모니 스니켓(다니엘 헨들러)는 나쁜 작가이다?
어떻게 이토록 끔찍한 글을 썼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눈곱만한 희망이라도 주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이라도 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레모니 자신의 마음 그 기저에 잔인함과 몰인정함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니라고 본다. 세상에는 올라프처럼 천인공노할 추악함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니까.
얼마 전 유족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재산을 노려 친척들 간의 역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뉴스기사는 허위가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레모니는 그만의 특유의 재치와 날카로움으로써 그런 이들을 캐릭터로 만든 것뿐이다.
궁금했다. 영화에서 올라프가 응징을 당하긴 하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난 건 아니기에.
어쩐지 그 후에 더 무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
불길한 예감은 늘 적중한다던가. 남은 12권의 책들이 어디 한 번 읽어보시지 하며
노려보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책이지만 사실 두렵다.
1권에서 느낀 고통은 충분하지 않다는 건가. 그러나 질 수 없다.
때문에 앞으로도 레모니 스니켓의 경고를 무시할 것이며,
나도 바이올렛처럼 끈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아이들이 당할 시련에
함께 맞설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