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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실용 정부가 출범했다. 인터넷 상의 댓글들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에서 ‘경제만 살리면 되지’로 바뀌었을 뿐. ‘더 잘살아야 한다’는 뿌리 깊은 강박과 냉소는 더 깊어진 지금 “왜 신화 같은 게 필요하냐”고, 그리스의 신들 따위가 지금 2008년을 살아가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대담집 <신화의 힘>을 권하고 싶다. 20세기 세계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꼽히는 캠벨의 입을 통해 신화에 관한 궁금증은 물론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봤을 질문들의 답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  

물론 대담집이다 보니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 명쾌하게 나오기보다 이쪽저쪽으로 주제가 흘러다니고 있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까’란 근원적이고 막연한 질문 앞에서 캠벨의 신화 이야기만큼 갈증을 풀어주는 책은 드물다. 개인이 혼자 막연하게 궁금해하던 것, 그러면서도 진실일 것이라 믿고 있던 것들이 왜 신화에 들어있는지, 전형적인 어떤 것을 알려주는 메시지로서의 신화의 역할도 분명하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인간 내면의 “집단 무의식”이 바로 신화이기 때문에 인간은 공통된 의식구조를 가지게 된다고 캠벨은 설명한다. 문화적으로 아무 연관이 없는데도 같은 이야기가 그대로 발견되는, 수렵과 농경 유목 사회의 반목과 상호작용은 캠벨의 풍부한 예시로 빛을 발한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따분한 인생 대신 자신의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는, 천복을 쫓는 삶이 신화와 함께 펼쳐진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현대인들이라도 개개인 자신의 인생을 살아내는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자기 개인 신화 속의 영웅이다. ‘큰 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들어가면 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던 키케로의 말처럼 ‘창조의 실재에 대한 느낌’은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다.  

캠벨은 담배 하나를 피워도 태양에게 첫 모금을 마시라고 보내던 수우족 인디언의 시대는 지났지만, 경제화ㆍ실용화에 집중하는 이 시대에 살아가는 현대인이야말로 ‘천복(天福)’의 정거장을 찾아야한다고 조언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고,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은 자신만의 ‘성소(聖所)’를 만들어 우리에게 ‘요구된 일’ 대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이 신화로 발현된다는 캠벨의 지적이 맞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신화를 꿈꾸고 있는 걸까. 월급쟁이의 신화라 불리는 이명박 당선인과 캠벨의 신화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을까 곱씹어보게 만든다.

‘단지 필요한 것은 실뿐인데도 우리를 구해 줄 재물, 권력, 사상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메’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라도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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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말하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1
김혜리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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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은 타인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가. 한이불에서 살 맞대고 몇십년을 함께 산다고 해서 서로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너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자신만만해하고 있을 때쯤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매체나 이미지, 그리고 캐릭터를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배우나 작가는 말해 무엇할까. 기자라는 제 3자에 의해 걸러진 그들을 만나는 ‘인터뷰’ 역시 그러하다. 인터뷰 하나 읽고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만한 착각도 없을 터이다.

 오랜만에 그 착각을 다시 하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인터뷰라는 특성의 한계는 여전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책, 『그녀에게 말하다』-김혜리가 만난 사람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은 저자가 몸담고 있는 씨네 21의 고정코너 이름(김혜리 기자가 만난 사람)과 유사하다. 그 잡지에서 가장 먼저 챙겨 읽거나, 가장 나중에 읽게 되는 코너다.

전문 인터뷰어(intervieer)로 활동하는 사람들의 책을 간간이 읽어 왔지만, 직접 구입한 것은 처음이다. 쉬우려면 얼마든지 쉽지만, 어려우려면 또 그만큼 어려운 것이 인터뷰다. 인터뷰가 그저 질문 몇 개 던지고 답변을 받으면 그만, 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치기와 질문지를 받아 지면을 메꾸는 기자들의 행태가 겹쳐져 인터뷰란 방식은 내게 그렇게 미운오리새끼가 되어 있었다. 정해진 답변을 늘어놓는 성의없는 인터뷰만큼 재미없고 따분한 것도 없다. 지루한 질문지에 그저그런 답변을 적어주는 일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이 책은 총 21명과 만난 인터뷰의 기록이다. 이창동이나 송강호 등의 영화인을 비롯해 구본창, 정구호, 황두진 등 예술이란 이름으로 커버되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라 할 수 있는 ‘쟁이’들이자 고수들이다.

‘내가 읽은 최고의 인터뷰집’이라고 감히 말하는 뒷면의 주례사 비평이 아니라 해도 나 역시 일단은 그 리스트에 이 책을 올려둘 참이다. 1주에 한번씩 책을 내야하는 주간지 기자의 짧은 호흡에서 이렇게도 진중하고 긴 글이 나올 수 있다니 놀랍다. 인터뷰이(interviewee)와 관련된 모든 글과 영상을 찾아서 읽고 보고 생각하고 나와서 던지는 질문들이란. 툭툭 내뱉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문자와 답변자 모두의 내공이 느껴진다. 아무렇게나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처럼 조이지만 칼이 멈추면, 상대방이 쓰러져버린다고나 할까. 날카롭거나 신경질적이지 않게, 저돌적이지 않게 은근하고 조용하게, 둔하게. 인터뷰이만큼 인터뷰어가 함께 드러난다.

 지승호 같은 전문 인터뷰어의 글도 좋지만, 김혜리의 글은 좀더 다른 느낌이다. 지승호의 글이 날것 그대로, 지인과 시시콜콜 수다를 떠는 듯한 인터뷰이를 드러낸다면, 김혜리의 글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함께 슬몃 다가오는 느낌이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지만 서로에 대한 호감과 진심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남녀가 사귀는 것보다 더 좋다는 직전의 기분좋고 설레이는 밀고 당기기의 기분.

인터뷰이가 아닌 인터뷰어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신기한 경험, 나도 그녀에게 인터뷰당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절로 생긴다. 인터뷰는 카메라와 녹음기를 앞에 두고 만나는 사람에게서 진심을 이끌어내는 힘든 작업이지만 그만큼 흥미로운 인간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그녀의 두 번째 인터뷰집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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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핫드링크 노트
프티그랑퍼블리싱 엮음, 박규리 옮김 / 나비장책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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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학교 앞에서 3000원~3500원이면 밥 한 끼를 따뜻하게 먹을 수 있었던 때였다. 언제부턴가 학교 앞에 커피 전문점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격은 1700원부터 3000원이 훌쩍 넘는 것도 있었다.

 ‘곧 없어질 것’이란 내 예상과 달리 이통사 할인 혜택을 등에 업은 패밀리레스토랑의 급성장과 발맞춰 스타벅스를 위시한 외국계 커피 전문점들은 소위 ‘쿨’한 감성들의 hot place로 떠올랐다. 혼자 와서 2시간 넘게 죽치고 앉아 있어도 흘낏흘낏 처다본다거나 이제 그만 나가라는 주인의 은근한 압박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것 외에도 뭔가 있어보인다는 ‘간지’가 한몫했다. 게다가 노트북을 펴놓고 이어폰을 끼고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이의 옆모습은 그야말로 잡지 화보에나 나올 법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너무 흔해졌고,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스타벅스를 살리겠다며 초대 CEO가 구원투수로 투입되고 있지만 처음 그 문화는 너무도 ‘쿨’한 동경의 세계, 그 이상이었다.

 같은 커피를 마셔도 다르게 느껴지고, 뉴욕이나 런던 한복판에 와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을 터. 사이즈부터 시럽을 넣을지, 500원을 더 내고 저지방 우유를 넣을지의 복잡한 주문방식도, 이름도 생소한 여러 가지 커피를 고르는 것도 ‘자기 취향이 그만큼 확실하고 또 그만큼 존중받는다’는 것으로 격상됐다. 까다롭게 주문하면 “아 그냥 대충 먹어,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굴어”라고 타박받던 문화는 Old-Fashion한 구닥다리로 취급할 수 있었으니.

 커피와 관련해 이런저런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나의 핫드링크 노트’처럼 따뜻한 책은 처음이다. 한 장 한 장 읽다보면 이런저런 사회적인 맥락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 그저 따뜻하게 우려낸 차 한잔을 손에 감싸쥐고 여유를 즐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고 유년의 기억으로 대표되는 추억의 회로에 반짝 불이 들어온다. 

 물론 이 책의 감성과는 무관하게 커피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는 무성하다. 직장인 한 사람이 커피 값으로 지출하는 돈이 월평균 2만원에 가깝다는 통계도 나왔다. 2006년을 강타했던 ‘된장녀’ 논란도 빠질 수 없다. 하지만 외신에서 “한국의 외로운 2ㆍ30대 젊은이들은 주로 카페(스타벅스ㆍ커피빈)에서 커피 한잔과 베이글 등을 먹으면서 공부나 일을 한다”고 언급할 정도로 사회적인 현상이 되어버렸다.

 별다방, 콩다방으로 대표되는 외국계 커피 전문점의 위세 속에 맥도날드, 롯데리아 등 패스트푸드점의 영역 넓히기, 할리스 등으로 대표되는 국내 체인의 사업 확대. 이런 일련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소규모의 카페들까지…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확실히 한국의 차(커피) 문화 저변이 넓어지고 진일보한 것만은 사실이다. 에스프레소 기계 판매가 새로운 혼수품에 추가됐다는 이야기까지 들리는 것을 보니…

 이상할 정도의 열풍과는 달리 관련 책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우리 까페나 할까”란 제목의 책부터, ‘스타벅스를 마시는 여자, 스타벅스 주식을 사는 여자’란 책까지… 정작 중요한 알맹이는 뺀 느끼한 책들의 홍수 속에서 ‘나의 핫드링크 노트’는 비현실적인 재료와 레시피를 앞에 두고도 기분좋은 세계여행을, 그리고 차를 마시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자연스레 역사와 기후, 그리고 문화를 ‘차’라는 기호식품을 통해 알게 되는 기분은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하다. 다만 요리책과 에세이의 그 어디도 아닌 중간쯤에 서 있는 듯한 책의 컨셉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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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디아스포라(Diaspora)란 말은 본래‘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라고 한다. 최근 이 용어는 모든 이산자들을 통칭해 일컫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이‘디아스포라’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안적 삶의 방식으로 각광받는‘노마드(유목민)’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개념이다.‘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의 저자 자크 아탈리는 5억명 이상이 이민자, 망명객, 노숙자, 이주노동자이며 매년 10억명 이상이 여행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디아스포라들은 노마디즘의 향유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책의 저자인 서경석이 20년간 런던 ㆍ 광주 ㆍ 카셀 ㆍ 브뤼셀 ㆍ 오스나브뤼크 ㆍ 잘츠부르크 ㆍ 파리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21세기의 노마드’가 아닌 외국인등록증을 항시 휴대해야 할 의무를 지닌‘체제 바깥의’디아스포라일 뿐이다.

 그를 대중에게 알린 ‘나의 서양미술 순례기’에서 나타나듯 그동안 그는 독자적인 에세이스트라기보다는 서승 ㆍ 서준식의 동생이었다. 이 책에서야 비로소 그는 우리사회에서 낯설기만 한 개념인 ‘재일조선인 2세’로서의 정체성을 토로하며 그가 왜 이렇게 세계를 떠돌아 다닐 수밖에 없었는지 이야기한다. 사실 주류 사회로의 출세가 철저히 막혀있어 직업선택의 자유가 거의 없는 소수자들에게 남겨진 공간은 예술이 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술이나 마약 등의 통로로 빠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겨질 만큼 그의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희망보다는 막막함이 더했으리라. 흑인들의 연예 ㆍ 운동스타 비율이 높은 것도, 이단이나 주변화된 소수자 중에 뛰어난 예술가가 많았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물론 디아스포라에 대한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디아스포라’가 세계화시대 한 나라 민족의 국제경쟁력이라는 지적이 그 하나다.‘뉴스위크’지는 인도가 경쟁국들을 따돌리며 치고 나갈 수 있는 것은‘디아스포라’의 힘 덕분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디아스포라’가 경쟁력이라고 떠드는 것이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다. 한 경제신문은 디아스포라를 초국가적 민족공동체의 개념으로 소개하면서 650만 명이나 되는 우리 해외교포들이 강력한 디아스포라 집단을 형성한다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술 더 떠 중국의 화교 네트워크처럼 한상들이 모국의 경제발전을 도와주길 기대하기도 했다.

 일부 학자들은 디아스포라를 오히려 바람직한 존재로 규정하기도 한다.“국민 국가의 폐해를 넘어서 민족이라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개념을 버려야 하는 지금, 우리 모두는 디아스포라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디아스포라’를 둘러싼 복잡한 의미와 역사적 맥락의 한 면만을 보는 것이다. 그의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고향의 공동체를 쫓겨나 자살하는 것으로 마감되기에 더욱 그렇다. 디아스포라가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는 세계화 시대의‘워너비’라면 디아스포라들은 행복해야 정상일 텐데, 그들은 정말 행복할까? 이 책의 대답은‘아니오’다.

‘아니오’란 대답의 가장 확실한 근거는 디아스포라와 자살의 연관성이다. 그는 재일조선인의 자살률이 일본인들의 그것보다 높을 것임을 확신한다고 귀뜸한다. 국민이나 고향 같은, 개인을 이 세상에 잡아매둘 끈들이 튼튼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살을 막을 장치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근대 내셔널리즘이 만들어낸 국민 개념은‘왜 한국인으로 태어났는가?’,‘왜 여자로 태어났는가?’와 같은 생의 우연성과 관련된 물음에 답할 수 없을 뿐더러 디아스포라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우리 망명자들’이란 글에서 디아스포라들은‘어떻게 저항하거나 싸울 수 있을지 생각하는 대신, 친구나 친척의 죽음을 바라는 것에 익숙해진다’고 지적했다. 서경석 역시 아우슈비츠 이후의 세계에서도‘인간이 여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제시한 승리의 상징이던 쁘리모 레비가 어떠한 설명도 없이 자살했음에 주목한다. 그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의 무덤을 찾아가는 여행도 계획되지 않았을 것이고‘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란 책도 당연히 없었을 것이라면서.

 그렇다면 디아스포아에게 자살(죽음)은 영원한 해방으로 가는 길인 것일까?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를 증명해야하는 존재로서의 피곤한 삶이 그들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모는 것이 아닐까? 다수자가 규정해 놓은 소수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절망감 같은. 내게 디아스포라와 자살은 죄를 짓는다는 종교적 의미가 아닌‘어깨의 짐을 완전히 벗는’절망감의 끝에 선택하는 일종의 자기 방어행위, 혹은 자신을 씻어내는 정화행위로까지 비춰진다.

 서경석의 해석에 따르면 이봉창은 독립투사라기보다는 재일조선인의 원형으로 해석되어야 맞다. 식민지 시대 피식민지를 조국으로 두고 일본인의 양자로 일본에서 살았던 그의 생애를 알게 되고나서야 그런 정의가 낯설지 않다. 이봉창은 거사 직전 김구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떠나는 것이니 기쁜 얼굴로 찍으십시다”라고 했단다. 죽으러 가기 직전에 싱글싱글 웃을 수 있다? 그도 인간일진대 어찌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하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죽어도 별로 아쉬울 것 없는’, 아니‘죽어도 슬퍼해 줄 사람 하나 없는’개인 이봉창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이란 점에서 팔레스타인들의 자살 폭탄 테러와의 연관성도 찾을 수 있다.‘워너비 디아스포라’는 예전에도 현재도 디아스포라 자신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모어와 모국어의 관계는 어떤가? 모어인 조선어를 지킨 채 죽어간 윤동주와 자신의 언어를 잃은 채 지배자의 언어를 모어로 삼고 자란 저자를 비교할 때 새로운 언어를 또 배울 수는 있지만 모어(맨 처음 습득되는 언어)를 바꿀 수 없는 사람에게 모어의 부정은 절대적인 절망상황이다.

 600만명이 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단지‘값싼 노동력’으로만 받아들이는 대다수의 사람들. 사실 단일민족이란 허구에 오랫동안 익숙해왔던 우리들로서는 쁘리모 레비의 이중적(이탈리아인/유대인) 정체성과 서경석이 재일조선인 2세로서 갖는 정체성 혼란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와 쁘리모 레비의 저작이 10년도 넘은 후에야 출판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디아스포라에 대한 무관심이 원인일 듯 싶다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에서 서로의 몸을 적시며 버티는 디아스포라들의 현실과 엑소더스처럼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한국인들이 겹쳐진다. 영어 공용화론을 비롯, 지자체들마다 경쟁적으로 도입하는 영어마을, 조기교육 열풍 등 영어를 모어로 만들지 못해 난리인 세태. 이는 모어와 모국어를 구분하지 못하는(혹은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몰이해가 빚어낸 현상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모국어는 한국어이되 모어는 영어이길 강요받고 있는‘심정적 디아스포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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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또 읽고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홍은택 지음 / 창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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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홍은택, 창비 2005)

 해외를 돌아다닐 때 가장 반가운 곳은 어디일까? 가보고 싶었던 박물관? 한국 민박집? 저렴한 중국식당? 아니다. 주머니 사정 빤한 배낭여행자로 돌아다닌 짧은 경험에만 의거해 이야기한다면 가장 반가운 곳은 다름아닌 맥도날드다. 저렴한 가격에, 가장 싼 메뉴를 시켜도 눈치 보지 않고 오래 눌러앉아 있을 수 있고, 여행 중 생돈 내고 써야 하는 화장실까지 이용할 수 있으니…

 한국 어딘가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익숙함과 편안함은 덤이다. 한국이 아닌 다른 곳, 익숙한 내가 아닌 낯선 나를 찾아 떠나온 여행길에서조차 익숙함을 찾게 만드는 장소가 바로 맥도널드다. 세계화 시대, 한국 외의 다른 땅에서 볼 수 있는 체인점이 어디 맥도날드뿐이랴만, 그래도 맥도날드의 황금 아치를 발견할 때만큼 익숙한 기분이 들게 하는 곳은 아직 찾지 못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찾아간 낯선 도시의 휴일 아침, 유일하게 열었던 맥도날드가 없었다면 내 여행은 훨씬 비참했을 테니까. ‘아리랑’ 등의 낯선 이름을 달고 있는 한국 식당보다 ‘골든 아치’로 유혹하는 맥도날드가 더 끌린다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의심받으려나?

 더 이상 늦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자전거를 짊어지고 미국으로 떠나온 저자에 따르면 미국 일주 여행은 극단적으로 말해 이쪽 맥도날드에서 저쪽 맥도날드까지 왕복하는 것이다. 좀더 극단적인 해석을 덧붙이자면 이제 지구상에서 그렇지 않은 나라를 찾기란 굉장히 어려워졌다.

 가난한 여행자에게 맥도날드는 짧은 축복일지 몰라도 저소득층이고 소수인종인 사람들에게 맥도날드는 빠져날 수 없는 깊은 수렁과 같다. 어떤 일이든 열심히만 하면 괜찮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신화는 맥잡(MACJOB)에 의해 깨지고 있다. 패스트하고 스피디한 써비스 시스템은 저임금 시간제 노동의 시대를 열었고, 열심히 일해도 빈곤에서 탈출하긴 불가능하다. 장시간 노동에 지친 이들과 이들의 자녀들에게 값싸고 편하게 칼로리를 공급받을 수 있는 맥도날드는 친구나 마찬가지다. 노동계급과 서민을 대변하지 못한 민주당에 실망한 근로빈곤계층과 버거킹 맘1)들은 자신들의 지역구를 블루(민주당 후보가 이긴 지역을 표시) 대신 레드 아메리카(공화당 후보가 이긴 지역)로 만든다. 맥도날드의 본질과는 맞아떨어지는 색깔일지 몰라도 삶과는 동떨어지는 현실을 보여주는 아이러니다.

 연봉 1200만 원 이하의 가정이 늘어나는 만큼 월소득 500만 원 이상의 가정도 함께 늘어나는 양극화 시대의 한국. 통계로 환산될 때의 시차나 오차를 감안한다면 필시, 지금 한국인의 평균적인 삶은 더 팍팍해지고 있을 터. 자본의 방임을 전제로 사회가 조직되고 운영되는 ‘미국식 시스템’이 우리가 부르짖는 세계화임을 감안할 때, 이 시스템은 날이 갈수록 정교한 그물망으로 우리의 삶을 죄어올 것이 분명하다. 얼마 남지 않은 대선에서 블루냐 레드냐를 따지는 이분법이 이런 진단의 모든 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의 저자처럼, ‘블루’의 관점에서 2007년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한 건 아닐까.

1) 버거킹이나 맥도날드처럼 저임금 시간제 직장에 다니면서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독신여성을 뜻하는 말. 뉴욕타임즈 칼럼에서 처음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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