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대의 삶으로 걸어 들어가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우리 근대문화유산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읽고
중구로 회사가 이전한지도 6개월이 지났다. 처음에 이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5분 거리에 백화점과 영화관, 대형 서점, 각종 음식점과 술집, 금융기관, 병원이 밀집한 편리하기 그지없는 구월동을 떠나서 어떻게 지내나 막막하기만 했는데, 시간은 세월이 멈춘 것 같은 중구에서도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던 거다.
가장 큰 변화는 생활의 속도가 조금은 느려졌다는 것, 많이 걷게 되었다는 것, 끊임없이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것, 군것질이나 충동구매가 줄었다는 것이다. 중․고등학생을 대상하는 상권으로 쇠락해버린 동인천 거리를 걸을 때마다, 아무리 걸어다녀도 쇼핑 욕구가 샘솟지 않는 신기한 패션 거리를 걸을 때에도, 엄마 손 붙잡고 시장에 따라온 꼬맹이처럼 와도와도 재미있는 신포 시장을 구경할 때에도 중구는 끊임없이 공간성을 각인시키는 동네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지 오래되어보이는 골목길, 먼지가 켜켜이 쌓인 간판들, 눈 돌리면 볼 수 있는 근대 건축물들, 화교 학교와 부설 유치원, 패루, 차이나타운, 차선 하나를 점령하고 있는 관광버스들, 패용증을 매달고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는 문화관광해설사들, 빨간 벽돌로 쌓아올린 창고와 건물들, 오래된 나무들, 그물과 각종 어구들을 파는 상점들, 멀리 보이는 인천항의 크레인들까지…오래된 가게, 오래된 사람들, 오래된 거리…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모든 것들에 시간의 더께가 쌓이고, 오래된 것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로 중구는 그렇게 인천을 버티고 있다.
중구는 내가 있는 곳이 인천임을, 100년 전 신식 문물과 외세를 제일 먼저 받아들였던 항구로서의 인천을 계속해서 일깨워준다. 인천에서 유행과 돈의 흐름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곳이 구월동이었다면, 중구는 먼 과거의 인천을 계속해서 생각나게 한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니? 100년 전 강제개항했던 인천과 지금의 인천은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같을지? 아무리 깔끔하고 살기 편리해도 역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신도시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정착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썼던 한 작가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오래된 동네에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이 책은 건축을 공부하고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젊은 부부가 1년 동안 전국의 100여개 가까운 근대건축물을 직접 찾아다니고 상상하고 기억하고 되새기며 보낸 시간의 기록이다. 글쓴이들도 말했듯이 백여 년 전의 풍경은 박제된 기억이 아니며, 옛 집은 여전히 사용되고 건물 역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신축 건물과는 비교하기 힘든 시간의 힘과 이야기, 사람들의 역사가 그 건축물 안에는 숨어 있다. 낡아서, 먼지가 쌓여서, 구겨져서, 빛바래서 오히려 멋지고 그 자체로 컨텐츠가 되고 이야기가 되는 것들.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강하다는 얘기는 건축에서만큼은 잘 통한다. 건축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 살아남기보다, 오히려 살아남았기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게다가 제대로 살아남은 것이 거의 없는 한국이라면 그 가치와 중요성은 더욱 높아진다. 만국공원의 기억전에서 봤던 엽서 속의 존스톤 별장보다 건축물로서의 가치는 떨어질지 몰라도 현재 아트플랫폼으로 변신한 붉은 벽돌의 창고가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