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부터 소나기가 왔다. 장마철의 시작이었다.
그날 저녁 옆 방 아가씨의 업소에 찾아갔다.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양복 조끼 차림의 젊은 남자에게 옆 방 아가씨의 이름을 대고 불러 달라고 했다.
청바지 차림의 그녀가 바로 튀어나왔다.
“어, 진짜 왔네!”
그녀가 반가워했다.
그녀는 장마철 동안, 그리고 그 후 휴가철 동안 장사가 잘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점잖은 모습의 손님을 처음 본다고도 했다.
나는 약간 머쓱했다.
“원래 한 번 놀러오라고 하는 곳에 잘 가는 성격은 아닌데...”
우리는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방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가 반쯤 남은 양주와 마른안주를 가지고 왔다.
나는 담배와 성냥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양주는 사양했다. “양주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 대신 맥주를 다섯 병 주문했다.
우리는 서로 술을 권하지 않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저씨는 식사를 제대로 안 하나 봐요? 얼굴이 너무 핼쑥해요.”
“하루에 한 끼 정도?”
“그럼 어지럽지 않아요?”
“글쎄, 몸에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가끔가다 단 게 너무 먹고 싶어.”
그녀가 황도 복숭아 통조림을 가져와서 접시에 들이부었다.
“돈 안 받을 테니까 걱정 말고 드세요.”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복숭아 한 쪽을 베어 먹었다.
사탕과는 또 다른 단맛이 너무 맛있었다.
“아저씬 꿈이 뭐에요?”
“오, 꿈이라. 글쎄.”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대답을 했다.
“꿈을 꾸는 동안엔 행복한 사람들이 있지. 깨어났을 땐 어리둥절해 하지만. 매일매일 반복되는 거야, 그런 생활이.”
“아니, 잠잘 때 꾸는 꿈 말고...... 희망 말이에요.”
‘오, 희망.’
아내의 증상이 생각났다. 아내가 우울한 상태가 완화되어서 희망 같은 것도 느끼고 삶의 즐거움도 찾고 거기서 지나쳐 기분이 들떠서 조증마저 나타나게 되면, 그 다음엔 강박증이 심해졌다.
반대로 우울한 상태가 심해져서 희망 따위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일 때는 강박증이 누그러졌다. 희망을 느낄 때는 잃을 것이 있기 때문에 불안해했고 희망이 없을 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서 불안도 사라졌다.
우울한 상태와 조증과 강박신경증. 한 놈이 보일 때는 다른 두 놈은 보이지 않는다. 한 놈이 가버리면 다른 두 놈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온다. 교대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증상은 서로 맞물려있는 정교한 톱니바퀴들과도 같았다.
“빨리 이 생활 때려치우고 악세사리 가게를 해야 하는데......”
“악세사리 가게라......”
“그게 내 꿈이에요. 꿈이 너무 소박한가? 근데 아저씨는 목욕은 안 해요? 담배 냄새가 많이 나는데.”
그리고 그녀는 헤헤 웃었다.
밖으로 나오자 비는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준 우산을 썼지만 바람을 타고 사선으로 떨어지는 장대비엔 절반의 효력만 나타났다.
게다가 나오면서 안 것이지만 배변 주머니가 묵직했다. 몸이 젖으면서 배변 주머니(colostomy bag)가 인공항문에서 떨어질까봐 왼쪽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배변 주머니를 손으로 받쳤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시장에서 속옷과 복숭아 통조림을 샀다.
집에 와서 보니 속옷이 빗물과 땀, 소변에 절어 조미료 냄새가 났다. 출소한 지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속옷을 갈아입고, 입고 있던 것은 쓰레기통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