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싶은 것은 과연 부검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문제점이나 모순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있다. 그것도 심각할 정도로. 이 결과만으로 사인이 트로포프라민 중독이라고 말할 수 없네.  

왜냐하면 사후 재분포 현상(postmortem redistribution) 때문이지.”

 

“사후...현상이요?”

“사후 재분포 현상.”

그가 이야기한 사후 재분포 현상이란 이러한 내용이었다.

 

사후 재분포 현상이란, 죽은 후 몸 안에서 약물의 혈중농도의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인이 트로포프라민 중독이라는 것은 즉, 죽을 당시에 트로포프라민의 혈중농도가 치사량 이상이었는가 아닌가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풀려면 사망한 후에 부검에서 채취한 혈액 샘플의 혈중농도로부터 알아내는 방법뿐이다. 그런데 사후 재분포 현상이 일어나는 약물에서, 사망 이후 부검에서 채취한 혈액의 혈중농도로 사망 당시의 약물의 혈중농도를 알아내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방금 말했듯이 죽은 후에 약물의 혈중농도가 변하기 때문이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혈액은 순환을 멈춘다. 이 상태에서 많은 약물들의 경우에 사후 재분포(postmortem redistribution)라 불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폐와 간, 심장근육 같이 약물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던 장기들로부터 약물성분이 주변 혈관 ( 즉, 폐동맥, 폐정맥, 심장내의 혈액 등 ) 으로 확산된다.  

또한 위장이나 소장에 아직 약물이 흡수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면, 이곳에서도 주변 혈관으로의 이동이 일어난다.  

 따라서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망 당시보다 중심부 혈관 내 약물의 혈중농도가 올라간다. 죽은 지 몇 시간 후부터 이런 현상은 이미 시작되며, 심한 경우, 약물의 종류에 따라, 또한 여러 가지 변수에 따라 십수 배의 증가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따라서 실제로는 죽기 전에 치료량 수준의 약물을 복용했지만 죽은 후에 치사량을 넘기는 일도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대표적인 약물들 중의 하나가 바로 트로포프라민이다.

게다가 사후 재분포는 시신의 부위마다 그 정도가 다 다르게 일어난다. 예를 들면, 심장과 대퇴부 정맥과 쇄골하정맥 세 군데에서 채취한 혈액들에서 약물의 혈중농도는 서로 제각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 부검에서는 심장에서 채취한 혈액만으로 혈중농도를 뽑아 놓고선 트로포프라민 중독이라고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다.

 

사후 재분포 현상이 일어나는 약물들의 경우에 심장혈로 어떤 종류의 약물 성분이 나오는지 검사하는 데엔 문제가 없겠지만 심장혈로만 약물의 혈중 농도를 측정해서는 안 된다. 양쪽 대퇴부 정맥과 쇄골하 정맥, 간 등 여러 군데에서 혈액 샘플을 채취하여 검토했어야 한다.

확실한 것은 지금 혈중농도로 나온 수치는 죽을 당시의 혈중농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트로포프라민은 치료량과 치사량 사이의 간격이 다른 약물보다 굉장히 좁다. 이 사건에서 치료량을 복용했는지 치사량을 넘어서는 양을 복용했는지 모른다는 의미이다.

 

내가 물었다. “그렇다면 사인을 알 수 있을까요?”

“사인불명이란 결론이 옳을 것이네.”

“불법시술에 따른 합병증의 가능성은 없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그는 공기색전증(air embolism)이 의심되나 이틀 전에 받은 시술로 인해 공기색전증이 발생할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낙태의 합병증으로 인한 공기색전증은 순식간에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틀이 아니라 죽기 직전에 시술을 받았다면?”

그렇다면 공기색전증이 강하게 의심된다고 그는 대답했다. 공기가 자궁을 통해 혈관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낙태시술시 진공청소기 돌아가는 소리가 날 수도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이 경우처럼 흡입 낙태(vacuum aspiration abortion)를 시도한다면, 그리고 전기를 동력으로 하는 흡입 낙태기구를 쓴다면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네.”

“흡입 낙태라뇨?”

“흡입 낙태란, 전기펌프나 수동식 펌프로 흡인력을 발생시켜 자궁 안의 내용물을 빨아들이는, 임신 초기에 사용되는 낙태법이지. 전기식의 경우, 전기펌프의 흡입구에 튜브가 연결되어 있으며 이 튜브의 끝은 자궁 안으로 들어가 있게 되며 이어서 내용물이 흡입된다네.  

전신마취가 필요 없으며 15분 이내에 낙태시술 자체는 완료되지.”

 

나는 공기색전증에 대해 더 물었다. 그가 설명했다.

“임신한 자궁에는 혈액이 흐르는 작고 불규칙적인 통로들이 많이 생기는데 이곳을 통해 공기가 들어갈 수 있지.

히긴슨식 주사기(Higginson's syringe)라는 물건이 있는데 이것은 원래 관장을 하는 기구이네. 사실 주사기라기보다는 손으로 쥐어짜서 공기를 불어넣는 단순한 고무 펌프이지. 아주 먼 옛날에 몇몇 국가에서 이것이 불법낙태를 위해 사용되던 때가 있었네.

임신을 하게 되면 자궁 안에는 태아와 태아를 감싸는 여러 조직들이 생겨나게 된다네. 그리고 말했듯이 자궁내막에는 혈액이 흐르는 작은 통로(uterine sinus, 자궁굴)들이 많이 생기게 되지.  

그 옛날의 히긴슨식 주사기를 사용했던 불법낙태는, 낙태를 일으키기 위해 태아막과 자궁벽 사이를 떼어 놓을 목적으로, 자궁 안으로 비눗물을 불어넣는 것이었다네. 비눗물은 높은 압력으로 들어가게 되지.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비눗물엔 종종 실수로 인해 공기가 거품의 형태로 섞여 들어가게 된다네. 공기가 섞인 비눗물을 불어넣게 되면 태반(placenta)이 떨어져 나가거나 손상되거나, 태아막이 자궁벽으로부터 분리되게 되며 이 과정에서 혈액이 흐르는 작은 통로들이 그대로 노출되고 이곳으로 공기가 들어간 후, 환자의 정맥 혈관을 타고 들어간다네.  

이 공기들은 심장 우측에 모이며 폐로 들어가는 혈액의 흐름을 막아버리지. 그리하여 산소 공급은 중단되고 심장은 정지하게 된다네. 물론 공기가 아니더라도 비누 성분만으로도 혈관으로 들어가면 치명적이지만.

낙태 목적이든 아니든, 또한 히긴슨식 주사기 사용이 원인이든, 다른 것이 원인이든, 이런 경로로 공기색전증이 일어나면 보통 몇 초에서 몇 분밖에 버티지 못한다네. 그러니 만약 우심에 공기 거품이 모여 있다면 당연히 공기색전증의 가능성을 의심해봐야겠지. “

검시보고서의 나머지 내용은 대략 ‘폐에서 패혈성 색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심장 안에 차 있는 공기포말(거품)은 부패에 따른, 박테리아가 생성한 가스가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문제의 문구를 짚어냈다.

“심장 안에 차 있는 가스의 원인은 둘 중 하나다. 만약 시신이 부패함에 따라 박테리아가 가스를 형성한 것이 아니라면 공기색전증일 것이네. 하지만 이 기록에선 박테리아의 활동으로 형성된 가스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나와 있지 않아.”  

 

그는 덧붙여 말했다.

“물론 부패의 과정에서 박테리아가 가스를 생성해서 그것이 공기색전증과 혼동될 수는 있지만 최근 임신의 흔적, 그리고 낙태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불법 낙태의 후유증으로 공기색전증이 발생했고 이것이 사인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반드시 검토했어야 하는데, 공기색전증의 가능성을 아무 설명 없이 그냥 배제해 버린 것은 잘못이네.

일단, 심장 안에서 피거품의 존재를 확인했으면 거품 안에 있는 기체가 박테리아가 생성한 가스인지 아니면 자궁으로부터 들어간 실내 공기와 같은 성분인지 구별하는 특별한 실험을 했어야만 하네. 

아니, 이런 검사 이전에 단순하게 심장의 우심방, 우심실에만 거품이 보이는지, 아니면 좌심에도 같은 거품이 보이는지 관찰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는 문제이지. 공기색전이라면 우심에만 거품이 차 있을 것이고, 박테리아가 생성한 가스라면 심장 전체에 걸쳐 거품이 차 있을 것이네. 왜냐하면 박테리아가 우측 심장에서만 가스를 만들어낼 리가 없기 때문이지. 박테리아가 우심과 좌심을 차별하진 않으니까 말이야.

부검기록을 보면 우심실과 우심방은 팽창되어 있으며 미세한 선홍색 거품으로 차 있다고 묘사되어 있는 반면, 좌심에 대해선 어떤 언급도 없었네. 즉, 좌심에 거품이 차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지.

아마도 경찰에게서 들은 주변정황(우울증 환자라는)에 자신도 모르게 선입견이 생겨 버린 것 같다. 그래도 거품 속 가스에 대한 테스트는 했어야 했어.

내가 볼 때 노출된 혈액의 통로들(uterine sinuses)을 통해 정맥을 타고 공기가 혈액에 섞여 들어가서 공기색전을 일으킨 것이 분명하네.

문제는 흡입 낙태(suction aspiration)는 공기를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자궁 안의 내용물을 빨아내는 것이라는 게 문제인데...... 아까 말했듯이 전기식 흡입 낙태기구엔 구멍이 두 개 있지.  

하나는 빨아들이는 입구이고 다른 하나는 빨아들인 내용물을 배출하는 출구가 되겠지.  

빨아들이는 입구에 튜브가 연결되어 있고 그 튜브는 임산부의 자궁 안으로 들어가 내용물을 빨아들이게 되며, 흡입된 내용물은 출구를 통해 배출되어 용기 안에 들어가게 되어 있네.  

입구와 출구가 서로 모양이 같고 혼동할 가능성이 있을 때, 만약에 불법시술자가 혼동을 일으켜 튜브가 입구 대신 공기를 배출하는 출구에 연결될 경우, 순식간에 실내공기를 빨아들여 자궁 안으로 불어넣는 결과가 나오게 되겠지.  

그리고 압력으로 튜브가 밀려나오면, 그제서야 정신이 든 시술업자는 아마도 부랴부랴 낙태기구를 끈 다음 다시 정상적으로 튜브를 입구에 연결하고선 흡입시술을 완료하겠지. 희생자는 순식간에 죽을 수도 있고, 낙태가 완료될 만한 시점에 죽을 수도 있겠지.  

늦어도 거의 10분 안에는 죽지.  

순식간에 죽는 경우에, 시술업자가 여자가 죽어버린 걸 모르고 이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아주 똑똑해서 죽은 것을 알고서도 계속 흡입시술을 진행하거나, 내 생각엔, 이런 식으로 낙태시술과 공기색전증이 같은 장소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날 수 있을 거야.  

 

자네가 이제 해야 할 일은 과거에 흡입낙태시에 공기색전증이 일어난 사례가 있는지, 있다면 어떠한 이유로 공기색전증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는 거야. 사례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수집할수록 자네 요구대로 재수사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높아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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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일은 유감이네.”
그가 먼저 고인에 대한 유감을 표시했다.

미지근한 병맥주와 냉동실에 보관했다 구워서 축축해져버린 노가리를 안주삼아 그의 의견을 들을 준비를 했다.

“술값은 걱정 말게. 내가 내면 되지. 근데 이젠 이런 일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시장에서 닭 잡는 것만 봐도 몇 시간씩 속이 울렁거려서 쳐다보지도 못한다. 휴우, 사람의 조직이 생각보다 훨씬 더 생닭과 비슷하더군.”

이야기를 들으며 노가리를 뜯었다. 내장이 있던 시커먼 자리에선 비린내가 났다. 이내 손가락에 검은 것이 묻어났다.

소장. 부검실에서 소장을 절개해서 안의 내용물을 확인할 때는 냄새가 지독하다. 처음 냄새를 맡고선 질식사하는 줄 알았다.  

그 후론 소장을 절개하기 전에 그냥 나와 버리곤 했다. 어차피 소장을 절개할 때쯤이면 부검이 끝날 무렵이기 때문이다.

 

그는 약속장소를 맥줏집으로 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제는 이런 것들을 맨 정신으로 볼 수가 없다. 군의관으로 참전한 후로는.  

예전에 법의학자로서 부검을 할 때는 기계적이고 사무적이었지만 전쟁 후로는 시체를 맨 정신으로 보는 것이 불가능해졌지. 그때서야 시체가 원래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느껴진 거지.  

시체가 비명을 질러대는 것 같았다. 아마 당신은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하고 의미를 모를 테지만 이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네.”

 

그가 검시보고서의 핵심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자궁경부는 기구(dilator)를 사용한 확장의 흔적이 있으며, 볼펜 하나 정도의 굵기로 확장되어 있는 상태이다. 집게(tenaculum)의 자국이 있다.

 

자궁의 크기는 임신 9주의 크기와 일치한다. 매우 최근에 불법적인 낙태시술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자궁 내 남아있는 임신산물 ( retained product of conception. 낙태시 부주의로 완전히 비워지지 않고 자궁 내에 남아 있어 합병증을 일으키게 하는, 임신과 함께 생기는 것들. 예를 들면 태아의 신체의 일부 )은 없으며 자궁 안은 깨끗이 비워져 있다. 자궁의 겉 표면은 육안으로 봤을 때 윤기가 흐르며 매끄러웠다. 감염이나 합병증의 흔적은 없다.

자궁과 나팔관, 난소의 어떤 부분에서도 고름이나 감염, 염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악취도 나지 않았다.

복막염의 흔적은 없다.

광범위한 출혈의 흔적은 없다. 자궁경부에 미세한 상처들.  

자궁이나 인접한 내장의 관통된 상처는 없었으며 자궁 내부에 비누 성분이나 다른 독성 성분은 없음. 자궁 안에 투명하고 딱딱한 플라스틱 조각이 돌아다님. 크기는 직경이 0.5cm정도 되었으며 흡입 낙태(vacuum aspiration)에 쓰이는 튜브(cannula)조각으로 확인되었다.“

 

이어서 그는 독극물 검사에 대해 결과를 요약했다.

심장혈(심장에서 채취한 혈액)의 혈액 샘플에서 검출된 약물들은 4종류이다. 1종류의 항불안제, 2종류의 항우울제, 1종류의 기분안정제 중 1종류의 항우울제, 즉 트로포프라민(가공의 항우울제)은 치사량을 훌쩍 초과, 치료농도의 무려 9배가량이 나왔다.  

사인은 이 트로포프라민의 과다 복용으로 인한 중독사로 되어 있다. 나머지 한 종류의 항우울제는 치료 농도보다 몇 배나 많은 량이 검출되기는 했으나 치사량과는 거리가 있다. 나머지 약물들은 적정한 치료에 필요한 치료량 이내이다.

 

위 내용물에 얼마만큼의 약물이 남아 있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그가 물었다.

“예전에도 과다 복용한 적이 있었는가? “

“내가 알기론 없었습니다. 자살 시도도 없었습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과연 부검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문제점이나 모순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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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보니 예숙이가 여전히 쉬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사먹자고 했다.

 

“그럼 구멍가게까지 나도 가야 하는가?”

내가 물었다.

그녀가 웃으며 당연히 가야 한다고 했다.

그녀와 함께 나오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역시 동네사람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들이 우리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을 보면 또 뭐라고 생각할까?’

예숙이는 그녀의 직업 때문에, 나는 아내가 자살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동네에서 거동이 썩 자유롭진 못했다. 게다가 우리가 함께 가면 시너지 효과마저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구멍가게 주인의 따가운 시선을 못 느끼는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몰랐지만 그녀는 태연히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왔다. 
 

그녀가 내게 아이스크림을 건네며 불쑥 말을 꺼냈다.
“군에서 꽤 높은 자리에 있었나 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군인이 찾아왔었는데 깍듯이 경례를 하더라고 들었거든요.”

“아니, 높은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받은 훈장 때문이었어.”

“군인이었어요?”

“몇 년 동안. 경찰이었다가 군인으로, 다시 군인이었다가 경찰로 신분이 바뀌었지. 그 다음은 교도소에서 3년 있었고. 훈장은 교도소 갈 때 박탈되었어.”

“그래도 훈장을 받은 적이 있다면 훌륭한 일을 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어느 대도시에서의 전투 중에 행한 행동 때문이었지.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으니까 네 말대로 좋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 도시에서의 일들은 깨끗이  잊고 싶다.”

거대한 콘크리트 언덕이 고지였고 부서진 콘크리트와 시신들의 뒤범벅 속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길거리 하수구로 흘러들어가는 광경도 보았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당한 부상으로 인생이 바뀌었다.

“지금 드는 생각은 그 도시가 그렇게 많은 인육을 제물로 바칠 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하는 것뿐이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며 어느새 동네에서 가장 높은(높다고 해도 사실 언덕 수준이지만) 곳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언덕에 올라가서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동네를 훑고 언덕까지 올라왔다.

“우린 골목골목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어느 전봇대 옆에서 누가 누구와 입을 맞추었는지 알고 있다.”

바람이 내 귓가를 스치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불쑥 말하기를 자기에게 반해서 찾아오는 손님이 두세 명 있다고 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찾아오는 손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예전에는 한때 바에서 일했었다고도 했다. 나는 그녀가 왜 그런 말을 갑자기 하는지 이유를 몰랐지만, 그러냐며 놀라는 척 했다.

집으로 돌아와 부케에서 사탕 몇 개를 더 뽑았다. 꼭 살아있는 닭의 깃털을 뽑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더 이상 부케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오늘 저녁은 아이스크림과 사탕 몇 알로 때울 작정이다.

 ‘죽은 후라도 남편 노릇을 하고 싶다.’ 내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무슨 권세로 죽은 아내에게 남편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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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방 아가씨가 웬일인지 저녁인데도 집에 있었다. 그녀는 노루를 쓰다듬고 입맞춤까지 하는 중이었다.
장마철이라 손님이 없어서 잠시 놀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예숙’이라고 했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갔고 노루와 나 둘이 있었다. 노루의 목덜미 털 깊숙이 손가락들을 넣었다. 그리고 이마에 뺨을 부비며 생각했다.
‘내 형기가 20년이었어도 그녀가 불법시술을 받을 생각을 했을까? 그녀가 고민했을까?’

방 안에 들어가 누웠다.

집주인의 말이 이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허위강간신고가 사실로 인정되는 순간, 아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바로 ‘합법적인’ 의료시설에서의 안전한 낙태였다.

31일 밤에 류씨가 들었던 청소기 돌리는 소리는 시술 중에 일어나는 소음이 아니었을까? 아내의 유품이나 방안에 남겨진 가구 중에 진공청소기는 없었다. 
 

소음이 시술 받는 소리가 분명하다면 아내는 낙태시술을 받은 후에 죽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건의 본질, 즉 사인이 달라졌는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알아내야 할 점이다.

부케에서 사탕 몇 개를 더 뽑아 입 안에 넣고 생각했다.

애아버지는 누구인가? 어떤 놈인가? 애아버지가 누군지 알면 지금 이 상황에서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낙태시술을 받았을 가능성을 확인한 이상, 부검기록을 반드시 봐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낙태를 최근에 받았다면 불법낙태의 합병증으로 인한 죽음의 가능성을 당연히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꽁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내 아내가 불법낙태시술을 받았는가?"라고 첫 마디를 꺼냈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왜 처음부터 그 사실을 내게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그는 그걸 어떻게 알아냈느냐며 덧붙였다.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던 겁니다. 선배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차피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실인데.”

“아, 아무런 관련이 없다니. 불법 낙태시술 여부는 중요하다, 그것도 많이. 사건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겠나?”

그는 낙태를 받았어도 본질은 역시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낙태는 사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난 부검기록 사본을 줄 것을 부탁했다.

꽁치는 잠시 생각한 뒤에 자신을 찾아오면 주겠다고 했다. 
 

이틀 뒤 경찰서로 갔다.

앉아있는 꽁치의 등이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두툼한 편지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제발 그만 하고 선배님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일에 신경을 쓰길 바랍니다. 너무 무모한 행동이지 않아요?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제발 판단력을 회복하세요. 낙태를 받고 안 받고 하는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이런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하기가 두려우십니까?  

수사하는 일을 빼면 자신이 아무 존재도 아닌 것 같아요?

 

“난 판단력을 잃어 본 적이 없다. 잃어 본 적이 없는 걸 어떻게 회복하겠는가? 그래......아무튼 생각해줘서 고맙다. 사본도.”

“내가 사본을 주는 이유는 이 내용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것을 보고 현실로 다시 돌아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부검기록의 내용에 대해, 확실한 근거에 의한 반대 입장이 아니라면 한 번 반문해보세요.  

혹시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이러는 것은 아닌지.”

 

끝으로 그는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말을 덧붙였다.
“내가 그 방에서 살았어도 우울증에 걸릴 것 같던데요, 뭐.”

내가 참을 수 없어서 한마디 했다.
“우린 그러고 잘 살았어. 남들한테 이상하게 보일런지 몰라도 우리한텐 일상생활이었어. 그만 해라.”

 

수사결과에 대해 납득을 못하는 것은 후배에 대한 공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본을 내어주는 것을 보니 그는 그것을 봄으로써 내가 정상적인 판단력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설득되기를(그의 입장에서는 ‘현실을 직시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으며 아내가 자살했다는 결론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실 도피라니! 정말로 내가 은퇴한 상관처럼,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그만의 알루미늄 예술세계에 빠져 있는 상관처럼,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가? 내가 상관을 바라보듯 그도 나를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나도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아내의 숨겨진 사인에 매달리는 것이 아닐까? 숨겨진 사인 따윈 없는데도?

아니, 내가 옳다. 임신, 돌팔이, 낙태시술, 사망. 어디까지나 이것이 사건의 본질이다. 

 

 부검기록 앞에 딸린 한 장짜리 경찰 보고서엔 죽기 이틀 전, 그러니까 28일에 낙태를 받았다고 되어 있었다.  

낙태로 인한 합병증은 없었으며 이틀 후 새벽에 자살했고 자살의 동기는 낙태에 따른 죄책감으로 인한, 우울증의 악화로 보인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하지만 무슨 근거로 불법낙태의 시점이 사망 이틀 전이라고 말할까? 내가 생각하기론 사망하던 날 밤일 가능성이 높은데.  

나는 낙태시점이 사망하기 전 몇 시간 이내라는 근거(소음)를 가지고 있지만 경찰도 이에 반해 낙태시점이 이틀 전이라는 근거를 가지고 있을까?

 

부검기록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언뜻 눈에 들어오는 단어들...... 사망 7 - 9시간 후 발견된 것으로 추정. 발견된 지 15시간 후에 부검. 임신 9주.

부검기록엔 육안으로(grossly) 각 장기들을 해부, 관찰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고, 사인이 될 만한 별다른 소견이 없었다고 쓰여 있었다. 대충 눈에 들어오는 단어들로 내용을 조합해 보면 이러했다.

‘혈액은 전신에 걸쳐 유동혈이다. 낙태시술의 흔적은 있으나 어떠한 낙태시술의 합병증의 흔적도 없다.  

내부 장기는 사인이 될 만한 어떠한 형태적인 기형이나 병변도 없다. 심장에서 혈액을 채취하여 샘플을 분석 의뢰하였다.’

 

뒤이어 혈액 샘플을 가지고 실시된, 17가지 약물에 대한 검사의 결과가 붙어 있었다. 17가지 종류의 약물들에 대한 검사 중 4개 종류의 약물이 검출되었으며 이중 한 가지는 치사량을 초과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낙태시점이 사망하기 이틀 전이라는 추정의 근거는 기록 어디에도 없었다.

허위강간신고를 하고 총알낙태라는 황당한 요법에 의지할 만큼 필사적으로 낙태를 원했던 아내가 낙태를 성공적으로 받았다면 자살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낙태에 따른 죄책감으로 인한 우울증의 악화’라는 말은 기가 막히게 이 사건을 위해서 만들어진 말 같았다. 역시 자살했을 리 없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자살이 아니라면 불법낙태의 합병증이 유력하고도 유일한 사인이다.

 

하지만 부검보고서엔 합병증의 흔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부검기록의 약물 성분의 검사 결과를 부인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약물의 혈중 농도가 치사량 이상으로 나왔다는 결과 말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내 지식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이다.

하지만 정말로 불법낙태의 합병증의 가능성이 없는지 확실히 해두고 싶었고, 아내가 검사 결과대로 그 많은 양의 약물들을 입안에 털어 넣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부검기록의 말들은 전문 용어로 쓰여 있기에 이것을 읽어 줄 사람, 즉 전문가가 필요했다. 전문가라곤 내가 경찰로 있었을 때 알던 부검의 밖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경찰서로 가야만 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내가 전쟁터에 나간 직후, 그도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고 또 누군가가 거들었다.

건물 뒤 뜰아래 벤치에서 우연히 담배를 피우고 있던 동기 한 명을 만났다.  

그에게서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의 비교적 최근 소식을 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와서 병원을 차렸다고 했다.  

 “박사가 개업할 때 병원에 전신거울도 보내주고 했지. 근데 요즘 어떻게 지내? 돼지한테 듣긴 들었다. 네 걱정 많이 하더라. 꿈만 꾸고 산다고.” 
 

무슨 동 무슨 병원이라는 말만 듣고 그 병원을 찾아 나섰다.

 

그 곳은 지붕 위엔 비둘기 두세 마리가 앉아 있고 계단에선 소독제 냄새가 진동을 하는, 작은 3층짜리 빌딩의 2층 전체에 자리 잡은 내과였다.  

예상과 달리 원장이자 유일한 의사는 30대의 젊은 여자였는데, 내가 찾는 분이 자기 아버지이며 이제는 일을 그만두고 쉬고 계신다고 했다.

나는 원장에게 부탁했다. 과거에 아버님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고, 꼭 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부탁할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냥 어려운 의학용어로 된 글을 좀 해석해주시면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는 이제 어떠한 서류에도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공식적으로 의견을 인용하는 일도, 서명을 부탁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단지 글만 해석해주시길 원한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녀는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라고 말했다.

다음날 병원에 다시 갔다. 원장은 자기 아버지가 누구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너무나 속상했다. 무슨 말이든지 필사적으로 하려고 했는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단지, 너무나 간단히 모든 것이 끝나 버린 느낌이었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될 수 있는 한 눈을 크게 벌렸지만 소용없었다.  

원장이 잠시 나를 쳐다보다 휴지를 몇 장 꺼내서 건넸다. 그리고 내일 다시 한 번 와 보라고 했다.  

 

다음날 박사를 병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가 날 보고 놀랐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는가? 세상에! 전혀 딴 사람이 되었네그려.”

그가 말하기를, 원래 병원에 나와서도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생각이었단다.

단지 거부를 해도 얼굴이나 보고 거부하라는 딸의 말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했다.  

딸은 웬 미라가 병원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와서 만나 보라고 말했단다. 그런데 병원에서 나를 보고 진짜로 산송장이 걸어오는 줄 알았단다. 그리고 두 눈은 대낮에 꿈을 꾸고 있는 사람 같아서 그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부탁을 안 들어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부검기록을 받아들고, 볼 시간이 필요하니 오늘은 결론이 안 나겠다고 했다.

그를 이틀 뒤 맥줏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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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위계급을 단 50은 되어 보이는 군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앞을 지나쳐 가려는데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맞는지 확인했다.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군인이 나를 만날 일이 없었기에 당황했다. 그는 내게 경례를 했다. “무공훈장을 타셨지요? 세 명의 목숨을 구한 일로...... 존경합니다.  

우선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인의 일로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그의 말은 미리 몇 번 준비해온 것 같았다.

“제가 온 이유는 고인께서 가지고 계시던 탄환 다섯 발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경찰에게도 말했지만 그건 내 소지품도 아니었고 나에게서 나온 물건도 아닙니다. 오히려 저도 궁금합니다.  

탄환의 출처보다도 왜 아내가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그럼 암시장에서 구입했을 수 있겠네요.”

“암시장에서 왜 그런 물건을 구입했는지 모르겠군요.”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잘못된 믿음이라니요?”

그는 내 얼굴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아시다시피 낙태는 불법이기 때문에 종종 낙태제로 총알의 화약을 더운 물에 타서 마시는 형태로 쓰입니다. 이것을 총알낙태라고들 부릅니다만...잘못된 믿음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민간요법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겁니다.”

 

“낙태 말고 다른 질환이나 부상의 치료제로 잘못 사용되는 경우는 없습니까?”

“내가 알기론 낙태제로 쓰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가 내게 이야기를 하기 전 잠시 망설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그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사실을 아는 이상 내 부인이 낙태를 시도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기가 거북했을 것이다.

낙태같이 불법행위가 아니라도 전쟁이 끝나자 병원과 약품이 부족하여 민간요법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낙태 효과는 전혀 없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다시 물어보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글쎄, 머리는 엄청 아플 겁니다. 군용 자동소총탄에는 니트로글리세린이 소량 들어 있습니다. 이 성분이 머리의 혈관을 팽창시켜서 엄청난 두통과 혈압하강 등의 중독증상이 생기겠지만 효과는 전혀 없지요.”

“니트로글리세린에도 치사량이 있습니까?”

“있지만 치사량에 요구되는 니트로글리세린의 양이 워낙 많습니다. 탄환 다섯 발 정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죠.”

 

‘아내의 친구들 중에 ‘총알낙태’의 효력을 믿는 여자가 있어서 친구의 부탁으로 구해다 주려고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집주인의 이야기 때문에 발상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친구’가 아닌 ‘아내 자신’으로 말이다. 

과연 아내가 임신한 상태였는가? 그리하여 28일에 불법낙태시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가? 의문이었다.

아내가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누구였는지 류氏 부인에게 물어볼 작정으로 저녁때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이미 집에 돌아와 방안에 아이들과 같이 있었고, 아이들을 야단치고 나서 신세한탄을 하던 중이었다.
문을 두드린 후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러냈다.
그녀에게 묻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미장원 박 양.

미장원 위치를 물어본 후에 그 곳 앞에서 안을 관찰하며 서성거렸다. 의자가 세 개 놓여 있었고 바닥엔 장판이 깔려 있는, 전형적인 마을 미장원이었다.

일단 미장원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으러 왔다고 말했다. 박 양에게 머리를 맡기고 싶다고 했다. 아주머니가 내 말을 되풀이했다.

“박 양? 여긴 나 말고 딴 사람은 없는데. 그런데 박 양이라고 누가 그랬어요? 혹시 박씨라고 듣지 않았구요?”

난 그랬던 것도 같다고 말했다.

“내가 박씨인데, 여기 처음 오신 분 같은데.”

머리를 감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깎기 전에 머리를 한 번 감아야만 했다. 대걸레 빨 때 나오는 시커먼 물이 한참 동안 나왔다.

박씨에게 말했다.
“죽은 아내의 남편입니다.”

아주머니가 잠시 가위질을 멈추었다.

“죽기 전에 아내가 했던 모든 행동들과 모든 생각들을 알길 원해서 왔습니다.”

아주머니가 다시 가위질을 하며 말했다.
“난 말하기 곤란해요. 내가 잘 알지도 못하지만.”

 

“아내가 임신한 상태였습니까?”
그녀의 가위가 내 귀를 쪼았다.

“나도 잘 몰라요. 알아서 뭘 하게요? 이미 끝난 일인데 안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게 있나요? 속만 상하지.”

“남편 노릇을 제대로 하고 싶어서요. 내 비록 살아있을 때 남편 노릇을 못했지만 죽은 후라도 남편 노릇을 하고 싶어서요.”

그녀가 거울 속의 내 얼굴을 5초 쯤 쳐다보았다.

“아저씨 상태를 보니 남편 노릇 하기 전에 뭐 좀 먹어야 하겠네.  

곧 쓰러질 사람으로 보이는데.”

 

“아내가 낙태시술을 받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내겐 알 권리가 있어요.”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끈질기시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받으려고 했어요.”

 

“병원에서?”

“합법적인 낙태시술은 받을 자격이 안 돼서 불법낙태시술을 추진했죠.”

“그래서 결국 받았습니까?”

“29일에 받을 예정이었지만 31일로 연기되었어요. 막상 받았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31일 오후에 표정이 밝았던 것으로 봐서 이변이 없는 한 그날 밤에 받았을 거예요. 29일에 연기됐을 때는 얼마나 실망스런 표정이던지...”

“몇 월 달 말인가요?”

“4월요.”

“임신 중이었던 건 확실하네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누군지 압니까?”

“그건 몰라요. 당신 아내는 처음에 당신처럼 이 자리에 앉아서 고민거리를 이야기했었죠.”

“멋지네. 멋져.”

난 그냥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게 된 내가 자기 가게에서 난동이라도 부릴까 봐 걱정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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