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방 아가씨가 웬일인지 저녁인데도 집에 있었다. 그녀는 노루를 쓰다듬고 입맞춤까지 하는 중이었다.
장마철이라 손님이 없어서 잠시 놀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예숙’이라고 했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갔고 노루와 나 둘이 있었다. 노루의 목덜미 털 깊숙이 손가락들을 넣었다. 그리고 이마에 뺨을 부비며 생각했다.
‘내 형기가 20년이었어도 그녀가 불법시술을 받을 생각을 했을까? 그녀가 고민했을까?’

방 안에 들어가 누웠다.

집주인의 말이 이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허위강간신고가 사실로 인정되는 순간, 아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바로 ‘합법적인’ 의료시설에서의 안전한 낙태였다.

31일 밤에 류씨가 들었던 청소기 돌리는 소리는 시술 중에 일어나는 소음이 아니었을까? 아내의 유품이나 방안에 남겨진 가구 중에 진공청소기는 없었다. 
 

소음이 시술 받는 소리가 분명하다면 아내는 낙태시술을 받은 후에 죽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건의 본질, 즉 사인이 달라졌는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알아내야 할 점이다.

부케에서 사탕 몇 개를 더 뽑아 입 안에 넣고 생각했다.

애아버지는 누구인가? 어떤 놈인가? 애아버지가 누군지 알면 지금 이 상황에서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낙태시술을 받았을 가능성을 확인한 이상, 부검기록을 반드시 봐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낙태를 최근에 받았다면 불법낙태의 합병증으로 인한 죽음의 가능성을 당연히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꽁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내 아내가 불법낙태시술을 받았는가?"라고 첫 마디를 꺼냈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왜 처음부터 그 사실을 내게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그는 그걸 어떻게 알아냈느냐며 덧붙였다.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던 겁니다. 선배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차피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실인데.”

“아, 아무런 관련이 없다니. 불법 낙태시술 여부는 중요하다, 그것도 많이. 사건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겠나?”

그는 낙태를 받았어도 본질은 역시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낙태는 사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난 부검기록 사본을 줄 것을 부탁했다.

꽁치는 잠시 생각한 뒤에 자신을 찾아오면 주겠다고 했다. 
 

이틀 뒤 경찰서로 갔다.

앉아있는 꽁치의 등이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두툼한 편지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제발 그만 하고 선배님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일에 신경을 쓰길 바랍니다. 너무 무모한 행동이지 않아요?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제발 판단력을 회복하세요. 낙태를 받고 안 받고 하는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이런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하기가 두려우십니까?  

수사하는 일을 빼면 자신이 아무 존재도 아닌 것 같아요?

 

“난 판단력을 잃어 본 적이 없다. 잃어 본 적이 없는 걸 어떻게 회복하겠는가? 그래......아무튼 생각해줘서 고맙다. 사본도.”

“내가 사본을 주는 이유는 이 내용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것을 보고 현실로 다시 돌아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부검기록의 내용에 대해, 확실한 근거에 의한 반대 입장이 아니라면 한 번 반문해보세요.  

혹시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이러는 것은 아닌지.”

 

끝으로 그는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말을 덧붙였다.
“내가 그 방에서 살았어도 우울증에 걸릴 것 같던데요, 뭐.”

내가 참을 수 없어서 한마디 했다.
“우린 그러고 잘 살았어. 남들한테 이상하게 보일런지 몰라도 우리한텐 일상생활이었어. 그만 해라.”

 

수사결과에 대해 납득을 못하는 것은 후배에 대한 공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본을 내어주는 것을 보니 그는 그것을 봄으로써 내가 정상적인 판단력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설득되기를(그의 입장에서는 ‘현실을 직시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으며 아내가 자살했다는 결론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실 도피라니! 정말로 내가 은퇴한 상관처럼,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그만의 알루미늄 예술세계에 빠져 있는 상관처럼,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가? 내가 상관을 바라보듯 그도 나를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나도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아내의 숨겨진 사인에 매달리는 것이 아닐까? 숨겨진 사인 따윈 없는데도?

아니, 내가 옳다. 임신, 돌팔이, 낙태시술, 사망. 어디까지나 이것이 사건의 본질이다. 

 

 부검기록 앞에 딸린 한 장짜리 경찰 보고서엔 죽기 이틀 전, 그러니까 28일에 낙태를 받았다고 되어 있었다.  

낙태로 인한 합병증은 없었으며 이틀 후 새벽에 자살했고 자살의 동기는 낙태에 따른 죄책감으로 인한, 우울증의 악화로 보인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하지만 무슨 근거로 불법낙태의 시점이 사망 이틀 전이라고 말할까? 내가 생각하기론 사망하던 날 밤일 가능성이 높은데.  

나는 낙태시점이 사망하기 전 몇 시간 이내라는 근거(소음)를 가지고 있지만 경찰도 이에 반해 낙태시점이 이틀 전이라는 근거를 가지고 있을까?

 

부검기록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언뜻 눈에 들어오는 단어들...... 사망 7 - 9시간 후 발견된 것으로 추정. 발견된 지 15시간 후에 부검. 임신 9주.

부검기록엔 육안으로(grossly) 각 장기들을 해부, 관찰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고, 사인이 될 만한 별다른 소견이 없었다고 쓰여 있었다. 대충 눈에 들어오는 단어들로 내용을 조합해 보면 이러했다.

‘혈액은 전신에 걸쳐 유동혈이다. 낙태시술의 흔적은 있으나 어떠한 낙태시술의 합병증의 흔적도 없다.  

내부 장기는 사인이 될 만한 어떠한 형태적인 기형이나 병변도 없다. 심장에서 혈액을 채취하여 샘플을 분석 의뢰하였다.’

 

뒤이어 혈액 샘플을 가지고 실시된, 17가지 약물에 대한 검사의 결과가 붙어 있었다. 17가지 종류의 약물들에 대한 검사 중 4개 종류의 약물이 검출되었으며 이중 한 가지는 치사량을 초과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낙태시점이 사망하기 이틀 전이라는 추정의 근거는 기록 어디에도 없었다.

허위강간신고를 하고 총알낙태라는 황당한 요법에 의지할 만큼 필사적으로 낙태를 원했던 아내가 낙태를 성공적으로 받았다면 자살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낙태에 따른 죄책감으로 인한 우울증의 악화’라는 말은 기가 막히게 이 사건을 위해서 만들어진 말 같았다. 역시 자살했을 리 없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자살이 아니라면 불법낙태의 합병증이 유력하고도 유일한 사인이다.

 

하지만 부검보고서엔 합병증의 흔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부검기록의 약물 성분의 검사 결과를 부인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약물의 혈중 농도가 치사량 이상으로 나왔다는 결과 말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내 지식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이다.

하지만 정말로 불법낙태의 합병증의 가능성이 없는지 확실히 해두고 싶었고, 아내가 검사 결과대로 그 많은 양의 약물들을 입안에 털어 넣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부검기록의 말들은 전문 용어로 쓰여 있기에 이것을 읽어 줄 사람, 즉 전문가가 필요했다. 전문가라곤 내가 경찰로 있었을 때 알던 부검의 밖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경찰서로 가야만 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내가 전쟁터에 나간 직후, 그도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고 또 누군가가 거들었다.

건물 뒤 뜰아래 벤치에서 우연히 담배를 피우고 있던 동기 한 명을 만났다.  

그에게서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의 비교적 최근 소식을 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와서 병원을 차렸다고 했다.  

 “박사가 개업할 때 병원에 전신거울도 보내주고 했지. 근데 요즘 어떻게 지내? 돼지한테 듣긴 들었다. 네 걱정 많이 하더라. 꿈만 꾸고 산다고.” 
 

무슨 동 무슨 병원이라는 말만 듣고 그 병원을 찾아 나섰다.

 

그 곳은 지붕 위엔 비둘기 두세 마리가 앉아 있고 계단에선 소독제 냄새가 진동을 하는, 작은 3층짜리 빌딩의 2층 전체에 자리 잡은 내과였다.  

예상과 달리 원장이자 유일한 의사는 30대의 젊은 여자였는데, 내가 찾는 분이 자기 아버지이며 이제는 일을 그만두고 쉬고 계신다고 했다.

나는 원장에게 부탁했다. 과거에 아버님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고, 꼭 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부탁할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냥 어려운 의학용어로 된 글을 좀 해석해주시면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는 이제 어떠한 서류에도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공식적으로 의견을 인용하는 일도, 서명을 부탁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단지 글만 해석해주시길 원한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녀는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라고 말했다.

다음날 병원에 다시 갔다. 원장은 자기 아버지가 누구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너무나 속상했다. 무슨 말이든지 필사적으로 하려고 했는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단지, 너무나 간단히 모든 것이 끝나 버린 느낌이었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될 수 있는 한 눈을 크게 벌렸지만 소용없었다.  

원장이 잠시 나를 쳐다보다 휴지를 몇 장 꺼내서 건넸다. 그리고 내일 다시 한 번 와 보라고 했다.  

 

다음날 박사를 병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가 날 보고 놀랐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는가? 세상에! 전혀 딴 사람이 되었네그려.”

그가 말하기를, 원래 병원에 나와서도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생각이었단다.

단지 거부를 해도 얼굴이나 보고 거부하라는 딸의 말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했다.  

딸은 웬 미라가 병원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와서 만나 보라고 말했단다. 그런데 병원에서 나를 보고 진짜로 산송장이 걸어오는 줄 알았단다. 그리고 두 눈은 대낮에 꿈을 꾸고 있는 사람 같아서 그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부탁을 안 들어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부검기록을 받아들고, 볼 시간이 필요하니 오늘은 결론이 안 나겠다고 했다.

그를 이틀 뒤 맥줏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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