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자리에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다음번에 현장을 덮친다는 말은 믿을 만한 이야기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돼지는 그가 잡히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돈을 받으면 그걸로 더 이상 사건의 해결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없게 된다. 돼지는 일단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깡통 더미에 둘러싸인 상관이 생각났다. 남은 인생을 그렇게 살 텐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산 사람은 살아야 하나?
내가 재수사 대신복수를 원한다고 돼지한테 말하면 그가 시술업자가 누구였는지 가르쳐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복수를 하고 나면? 복수를 하고 나서도 삶은 계속되지 않는가?
며칠의 시간 동안 한 가지 생각만 가득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다.
돼지와 아내와의 일은 잊기로 했다. 그리고 돼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재수사를 하든 복수를 하든 그 이후에도 삶은 계속 되기 때문이다. 계속 이대로 생활할 수는 없단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아내의 ‘고상한 우울함보다 비천한 생동감이 좋다.’ 라는 말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간신히 기력을 회복하여 일상생활로 돌아온 예숙이에게 불을 지펴 놓았다.
“나한테 계획이 있는데 잘만 되면 악세사리 가게가 문제가 아니다. 실은 내 아내는 불법낙태를 받다가 죽었어. 내 아내의 죽음에 대해 보상비를 받아 줄, 힘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도와주겠다고 하거든, 지금.”
그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고백을 했다.
하나 털어놓을 게 있는데, 이전에 성욕이 다시 회복되어도 달라지는 점이 없을 거라는 이야기는 틀린 얘기다. 사실은 많은 것이 달라진다고 본다. 맞다. 이런 생활과 정상적인 생활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차이가 크다. 꿈속에서는 정상적인 성욕을 느낀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기가 싫다. 이러다 미쳐 버릴 것 같다. 내 아내가 살았던 방식으로 나도 꿈을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삼으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으려면, 궁극적으로 난 수술을 해야 한다.
전에는 내가 얘기했듯이, 내가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내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단 한번 만이라도 남편 구실을 해보고 싶어서 돌팔이를 찾아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기가 다르다.
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얻고 싶다. 먹고 배설하는 일 이외에서. 다시 정상적인 성생활도 하고 싶다. 그것이 말 그대로 ‘비천한 생동감’일지라도 좋다. 이대로 늙기는 싫다.
대충 이런 얘기였다.
나는 전쟁 전 여성지에 실렸던 병원 광고를 보여주며 또 말했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마련해 이 광고처럼 인공 보형물 삽입시술을 받고 싶다. 일단 돈이 생기면 악세사리 점을 열려무나. 장사가 잘 되어 내가 준 돈을 갚으면 나는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생필품을 팔고 싶다. 돈을 더 모아야지.
아니면 우리가 함께 운영하는 가게를 열 수도 있겠지. 그리고 내 계획대로만 되면 너는 네 소망을, 나는 내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거야. 그러니 내 계획이 어떠냐?”
“언제요?” 그녀가 물었다.
“곧. 내 친구와 오늘이나 내일 이야기를 해보고 나서야 언제가 될지 알 수 있지. 일단 근처의 유원지가 있으니 함께 가서 동물원이랑 놀이기구도 타고 그 다음엔 돈을 받는 것이 순서이니 그 도시로 같이 가서 돈만 받아오면 그걸로 끝이고 즐거운 여행이 되는 것이지.”
아내와 결혼하던 날 갔던 단골 맥줏집에 다시 가서 앉았다. 몇 년 만인가. 몇 년 안 되었지만 마치 십수 년이 흐른 것 같았다. 살아서 아마 마지막이리라. 이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50대 후반이 되었을 주인아저씨가 날 알아보고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동안 잘 지냈나? 아이는 낳았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예, 둘 있습니다.”
“사내? 여자아이?”
“사내 한 명하고 여자아이 한 명......”
“왜 부인이랑 같이 안 오고?”
“그 사람이 일이 있어서 혼자 왔어요. 다음에는 둘이 같이 올게요.”
여전히 벽엔 독일의 잔치 풍경이 붙어 있었다. 이젠 빛이 바랜 그 풍경을 예전에 그러했듯이 바라봤다. 아주 멀리 있는 어느 나라의 풍경처럼 느껴졌고, 그런 느낌은 당연한 것이었다.
마을 언덕에 한 밤중에 삽을 들고 가서 땅을 팠다. 0.5미터쯤 나무 아래를 파내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직후에 감추어 뒀던, 비닐 안에 들어 있는 자그마한 중국제 마카로프 권총과 탄환 13발을 꺼냈다. 권총의 원래 주인은 내가 설치한 부비트랩에 걸려 벌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