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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제대로 접해보는 맑시즘 책이라 읽으면서 정신이 번쩍번쩍 뜨였다. 세계 반쪽의 존재를 이제야 안 기분이다. 너무 흥분해서 트로츠키 책까지 장바구니에 넣고 주문 직전까지 갔다가 정신차리고 뺐다ㅠ 아직은 아니야... 일단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만 주문해 봤다. 던전 문 두드리는 초심자의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공부해봐야겠다 (지금 내 흥분상태로 보아 마르크스 더 파고들면 패가망신할 거 같은데... 무섭고 떨리는 기분)

이론가의 임무는 노동자들에게 법칙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쟁취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p. 39)

진정한 혁명은 현대적 생산력과 부르주아적 생산 형태라는 두 요인이 서로 충돌하는 시기에만 가능하다. … 새로운 혁명은 새로운 경제 위기의 결과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 위기가 확실한 것만큼이나 새로운 혁명도 확실하다. (p. 54)

(마르크스) 부부는 살아남은 세 딸, 예니·라우라·엘레아노르를 훌륭한 부르주아 숙녀로 기르려고 힘껏 노력했다. 이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그 사회의 압력을 피할 수 있는 길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p. 57)

따라서 자본주의의 특징인 폭력과 착취는 공산주의의 발전에 꼭 필요한 조건이다. 그것은 불가피하다. (p. 145)

    마르크스와 헤겔은 다른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객관적 과정으로 봤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즉, 역사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의식이나 의지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둘 다 참된 사상가의 태도는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증오하지도 말고 다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스피노자의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또 마르크스는 그저 도덕적 비판만 하지 않았다는 것도 헤겔과 공통점이었다. 이와 다르게 순전히 도덕적 비판만 하는 태도를 보인 이들은 헤겔 좌파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대표적이었는데, 그들은 기존의 상태와 뭔가 더 나은 이상적 상태 사이, 즉 사회가 어떻다는 것(존재)과 ‘어떠해야 한다‘는 것(당위) 사이의 모순을 단지 대조하기만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 모순은 정신과 현실 사이의 모순이었다. 그것은 현실 자체의 모순이 아니고 따라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기존의 상태 안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고, 현재의 상황 안에서 그것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경향들을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행동은 객관적으로 가능한 것에 바탕을 둬야지, 사상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환상과 선한 의도에 바탕을 둬서는 안 된다. (p.146)

따라서 경제 위기의 근원은 결국 자본주의 생산의 무계획성이다. (p. 233)

마찬가지로 실업자들은 항상 파시스트 운동의 비옥한 토양 구실을 한다. 실업자들은 노동자들이 사용자에 맞서 함께 뭉치도록 만드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압력에 종속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p. 255-256)

제국주의 나라에서 민족주의는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오히려 노동자들과 착취자들을 묶어 주는 수단이다. 저들은 "어쨌든 우리는 모두 영국인이다" 하고 떠들어 댄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일반화해서, 제국주의 나라의 노동자들은 자신들과 지배계급을 묶어 놓은 사슬을 깨뜨리는 수단으로서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민족운동이 혁명(오늘날에는 노동자 혁명일 수밖에 없다)의 일반적 이익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가 문제라는 것 그리고 민족운동을 판단하는 기준은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강화하는지 아니면 약화하는지라는 것임을 알게 된다. (p. 301)

이 원칙, 즉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돌려받는다"는 원칙은 마르크스가 강조했듯이 "부르주아적 권리"의 사례다. 그것은 개인들 간의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p. 305)

    더욱이,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바뀌는 전형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의 설명을 수정한 결과를 보면, 3부문의 이윤율은 일반적 이윤율의 형성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기를 생산하는 부문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다른 부문보다 더 높더라도 이 때문에 일반적 이윤율이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3부문은 다른 두 부문의 생산물을 위한 시장을 제공하면서도 자본 전체의 수익성을 악화시키지 않을 수 있다.
    무기 생산의 이런 안정화 효과는 이미 1930년대에 분명히 드러났다. 당시 가장 먼저 재무장한 두 나라, 즉 독일과 일본은 가장 먼저 불황에서 회복돼 완전고용을 달성한 나라들이기도 했다.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들은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하고 전시경제로 전환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독일과 일본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낭비적 생산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동방과 서방의 군사적 경쟁에서 비롯한 이른바 ‘상시 무기 경제‘가 출현하면서부터였다. 소련과 미국 모두 국민총생산의 많은 부분, 즉 이전의 평화 시 기준으로 보면 엄청나게 많은 부분을 무기 생산과 사이에 쏟아부었다.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화하는 효과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저하와 이윤율의 안정 또는 상승으로 나타났다. 세계자본주의는 전례 없는 대규모 장기 호황을 누렸다. (p.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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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5 18: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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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혼자 순대국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는 나이 든 여자를 향해 쏟아지는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다.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들은 주로 순댓국집 단골인 늙은 남자들의 것이다. 때로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괘씸함에서 그들은 나를 흘끔거린다. 자기들은 해도 되지만 여자들이 하면 뭔가 수상쩍다는 그 불평등의 시선은 어쩌면 ‘여자들이 이 맛과 이 재미를 알면 큰일인데‘ 하는 귀여운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요절도 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반세기 가깝게 입맛을 키우고 넓혀온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니까. (p. 26)

원고 마감이 코앞에 닥쳐 꼼짝없이 글을 써야 하는 날이면 나는 엄숙한 마음으로 목욕재계를 하는 대신 김밥을 만다. 이때 조금 신경 써서 속재료가 각기 다르게 세 종류의 김밥을 만다. 이렇게 해두면 끼니 걱정 없이 삼시 세 때 각기 다른 김밥을 먹으며 글에만 집중할 수 있다. 컴퓨터 옆에 놓고 먹기도 하고 오면가면 집어 먹기도 한다. (p. 49)

이제 밥만 있으면 된다. 따끈한 호박잎 위에 뜨끈한 강장과 밥을 얹어 쌈을 싸 먹으면 입에 불이 난다. 불이 나긴 나는데, 요즘 매운 음식처럼 불만 나고 마는 게 아니라 가슴속 깊숙이 구수하고 복잡하고 그리운 불이 난다. 다 식은 호박잎쌈과 깡장은 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둔다. 일주일 내내 시원한 보리차를 끓여놓고, 매일 한 끼는 찬 호박잎쌈과 깡장을 꺼내 밥 싸 먹고 보리차를 마신다. (p. 107)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두 달을 해괴한 김치에 검푸른 나물과 씁쓸한 된장국만 먹고 살다보니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둘씩 부엌으로 숨어들어 몰래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부담도 덜어주고 각자 입맛도 충족시키니 일거양득이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어머니는 우리의 셀프 요리 행태를 적발하고 노기등등하여 이 집에서는 당신이 만든 음식만 먹어야 하며 당신의 부엌에서 임의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행위는 일절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귀신에게조차 그토록 자비로운 종교를 믿는 어머니가 왜 우리에게는 이토록 억압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땐 몰랐지만 어쩌면 어머니는 우리가 음식을 하면서 풍기는 그리운 고기와 양념 냄새를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p. 209)

입가에 미소가 돌고 명절이 이래서 좋은 거구나 싶다. 태곳적 조상들이 명절을 기리고 기다렸던 이유도 이렇게 휴식과 충전, 감사와 즐김의 시간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런 참뜻을 잊은 지 오래인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의 참뜻은 소수 콩가루들의 삶 속에서만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설은 지나갔고 추석은 언제 오나, 콩가루는 간절히 그때만 기다린다.(p.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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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한 아동 주거를 지원하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지만 도시 빈민에게 들어가는 세금은 다들 아까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 반대를 최소화하기 위해 아동을 앞세웠다"는 공무원의 말에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빈자는 국가로부터 먼저 존재가 지워진다. (p. 116)

"… 그 가격이면 깨끗한 거 포기해야 넓은 집 갈 수 있는데, 막말로 요즘 대학생들 공부한다고 바빠서 집에 잘 있지도 않은데, 넓은 건 그렇게 대수가 아니에요."
아마 중개사의 입에서 무심코 나온 진심이 대부분 대학가 원룸 임대사업자의 생각일 것이다. 어차피 표준임대계약 2년도 다 못 채우고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대학생들이다. 집을 보는 눈썰미가 뛰어나지 못하다보니, 싸구려 새 가구를 집어넣으면 신축인 줄 알고 비싼 월세도 감당하는 뜨내기 손님일 뿐이다. 만족스럽지 못한 집에 살면서 세입자로서 임대인에게 개선을 요구하기보다는 카페, PC방, 도서관, 술집 등 바깥으로 나돌며 자발적의로 집의 외부화를 실천하는 온순한 세입자들. (p. 161)

고통받는 청년의 귀에 맴도는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경구, 그리하여 버티고 정신승리하는 것은 청년 개인의 몫이다. 이 모든 연쇄 작용이 병든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세상이 얼마나 가혹하게 청년들을 각자도생과 자력구제로 내모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착취해 피라미드 한 층을 올라가는 누군가에 대해 얼마나 윤리적으로 무딘지를. (p.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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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와의 갈등부터 실망의 연속... 해원은 무엇에 화가 났으며 무엇에 실망했고 무엇을 용서하는가? 알 수가 없음. 해원을 이만큼 분노하게 하려면 해원과 아빠의 미묘한 애증관계를 좀 더 보여줬어야 한다고 봄. 혹은 이렇게 아빠를 타자화시킬 거였으면 아예 그 진실을 듣자마자 (충격은 받았겠지만) 수긍하고 이모를 이해하든지. 이 작품에서 말하길 해원은 엄마든 이모든 자신을 속여왔기 때문에, 자신만 진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분노했다는데 무슨 애도 아니고, 그 전까지의 해원 캐릭터로서는 이물감이 있는 전개다. 그냥 투정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중요한 감정선이라 아쉬움.
별개로 북스테이에 대한 로망이 생겼다. 나중에 독립서점 북스테이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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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성의 동료라든가 남성과 대등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고귀한 감정을 찾을 수 없고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세상에 영향을 끼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간단하게 그리고 평범하게 중얼거릴 뿐입니다. (p.161)

그녀의 감수성은 몇 세기 동안 공동 거실의 영향을 받아 훈련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이 그녀에게 인상을 남겼고, 개인들의 관계가 항상 그녀의 눈앞에 있었지요. 그러므로 중산층 여성이 글을 쓰게되었을 때, 그녀는 당연히 소설을 썼습니다. (p.103)

그리하여 아주 기묘하고 복합적인 존재가 생겨납니다. 상상에 있어서 여성은 더없이 중요한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하찮은 존재입니다. 시에서는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성의 존재가 고루 퍼져 있지만, 역사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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