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표지부터 낭자한 피에 다소 하드코어한 미스터리 소설일까 싶어 지례 겁을 먹었다. 일본에서는 본격 미스터리 작가로 알려진 구라치 준이기에 더욱 걱정이 되었다. 난 아직 미스터리 초심자라 중간에 책을 덮어버릴 지도 몰랐다. 그런데 제목이 좀 독특하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누구나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될 만한 문장이다. 사람이 두부 모서리에 부딪혀서 죽을 수 있나?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는 일 만큼 어려운 일 아닌가? 아마 이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누구도 이 제목에 대한 물음표를 지울 수 없을 것이다.

 


p.116.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터무니 없을 정도로 거대한 광기와 맞서야 한다. 우리의 정신도 삼켜버릴 수 있는 엄청나게 크고 어두운 광기와. 나카모토 경부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에 또 다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 <파와 케이크의 살인현장 중>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총 6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어느날 학도병으로 차출된 주인공이 나가노현의 극비 연구시설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2-13호 실험실에서 이유도 모른채 자전거 페달을 밟는 이즈카는 교대하기 위해 들어간 실험실에서 같이 근무하던 가게우라 이등병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실험실은 완전한 밀실 구조고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나 흉기도 없다. 산산이 부서진 두부가 흩어져 있을 뿐전쟁 막바지, 가미가제로 젊은 병사들이 무수히 죽어나가도 제국주의라는 기치 아래 그 모든 죽음이 영웅시 되던 시기에 겨우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한 이등병의 시체는 말 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불러 일으킨다. ‘구라치 준식의 블랙코미디란 이런 것인가.


 

 p.157 앞으로 쓰러진 시체와 그 주변에 흩어진 두부. 게다가 시체의 후두부는 사작물체의 모서리로 구타한 상처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194412월 초순. 제국 육군특수과학연구소 2-13호 실험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중>

 

 

 

 

 

 

불안을 안고 첫 장을 열었으나 결국 내가 중간에 책을 덮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어두웠으나 이야기는 가벼웠고,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있으나 결론은 심플했다. 게다가, 살인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연쇄살인, SF, 인공지능, 태평양전쟁, 시골집 고양이까지 아우르는 작가의 이야기에 흠뻑 매료되었다. 같은 살인이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너무도 각양각색이라 이런 미스터리 소설도 있구나 하며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각 단편마다 전혀 다른 분위기를 유지 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놀라웠다. 그 중에서도 <밤을 보는 고양이>, <사내편애>가 가장 놀라움을 주는 단편이었고 마지막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은 이 작가의 네코마루 시리즈를 찾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흥미진진함과 재미가 있었다.

 


두부 모서리에 부딪혀 죽어라는 일본의 라쿠고에서 인용된 말로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지식하기가 이를데 없는 사람을 빈정거리는 말로 사용된다. ‘에라이, 두부 모서리에 머리 부딪혀 죽을 놈아정도로 사용되려나구라치 준이 선사하는 반전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해답 (바카미스:황당한 트릭이나 논리의 미스터리)을 핵심으로 하는데 이 책의 제목이야 말로 그 핵심을 찌르는 듯한 명징한 문장이 아닐까 싶다. 이쯤되면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그래. 잘 들어, 더 유연하게 생각해보자.(p.308)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고!’ 유머와 위트를 잃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반전 메세지가 흥미로운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서귤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마치 암호문 같은 이 제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읽어야 한다. 그 단 몇 줄로 이 난해한 제목이 이해됨과 동시에 가슴 언저리께부터 슬슬 핑크빛 온기가 돈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상처받지 않겠다는 그 천진하고도 귀여운 선언에 나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그리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눈 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한 모금 쭉 들이켰다. 이 책이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카카오프랜즈 라는 캐릭터가 가진 대중성, 딱 그 정도의 기대감만 있었다. 무심코 집어든 제품의 사은품이 마침 어피치의 탐스런 분홍색이였을 때의 기쁨 정도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다. 책 표지만으로도 이미 많은 여성들이 지갑을 열테다. 그런데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서귤이라는 이름도 요상한 작가의 책을 처음 만나보는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잘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를 아스라한 감정으로 이끈 것은 뜨겁게 붉은 것도 아닌, 차갑게 푸른 것도 아닌, 이제 막 발그레 해진 정도의 핑크빛 온기다. 어쩌면 위트 있는 문장에 온기까지 얹어 내놓는 저자의 글솜씨에 매료된 것일지도 모른다.  

 


p.120

어째서 미처 무엇이 되지 못한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쉽게 저리게 만들까.

너와 내가 한 번도 누군가가 되지 못한 채 늘 과정 위에 선 사람이어서일까.

넌 브로콜리가 사실 열리기 직전의 꽃봉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니?

채 피우지도 못하고 밑동이 잘려버린, 뜨거운 물에 들어가버린, 초장에 찍혀버린,

커다란 꽃봉오리.

자신의 꽃 색깔을 영원히 알지 못한 채 영원히 푸르게 데쳐진 브로콜리 한송이가,

꼭 우리의 젊음에 대한 은유 같아서.

난 도저히 브로콜리를 못 먹겠어.

 

 

얼렁뚱당 써내려간 듯한 문장들에 묘하게 설득되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선풍기의 플라스틱 날개, 지하철역 어느 거울 앞, 브로콜리의 정체, 얼린 숟가락, 수제버거 먹는 법 같은 것들이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 평소엔 눈치 채지 못했던 작고 사소한 것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린다. 오글거리다 킥킥거리고, 뚱해졌다가 피식 웃어버리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다. 짧고 긴 문장들 속에서 젊음의 탄력과 생기가 넘쳤다. 만약 어피치가 정말 살아있는 생물에 글까지 쓸 수 있었다면 아마 이런 책을 쓰지 않았을까. 캐릭터와 문장의 매칭이 딱 맞아 떨어지는 덕에, 책을 읽는 내내 핑크색 엉덩이와 마주앉아 있는 기분이다.

 

카카오 프렌즈 캐릭터 에세이 시리즈에서 라이언에 이어 두번째로 책을 내게 된 어피치.  인기 캐릭터 디자인과 작가의 콜라보레이션을 생각해낸 출판사도, 캐릭터의 입을 빌어 책을 써낸 작가들도, 그 젊은 감각들이 눈부시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낸 한 명의 독자로서 박수를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 - 심리학, 어른의 안부를 묻다
김혜남.박종석 지음 / 포르체 / 201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은 몸이 아픈 사람보다 마음이 아픈 사람 찾기가 훨씬 쉽다. 당장 나부터도 몸이 아픈 시간보다 마음이 아픈 시간을 훨씬 더 많이 견뎌오지 않았나. ‘시간이 지나면…, 어른이 되면괜찮아 지겠지.’ 그 철썩같던 믿음들에 의문부호만 찍은 채, 불혹을 앞둔 지금까지도 어른의 시간은 아직 요원하다. 그렇게 나이만 먹은 성인들에게, 몸보다 마음이 아픈 그들에게 약이 되는 책이 나왔다.<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 처음엔 김혜남님의 저서라 무조건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읽고나니 기침에 잘듣는 용한 시럽처럼 마음 아픈 곳을 가만히 들여다 보게 해주는 알약을 하나 삼킨 기분이다.

 

정신건강 전문의 김혜남, 박종석 공동 저자에 의해 집필된 이 책은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각종 정신 질환에 대한 소개와 사례, 그에 대한 전문의적 견해 등이 실려 있다. 흔히들 겪는 우울증에서부터 각종 강박증, 공황장애, 무기력, 화병, 자해 등 뉴스 헤드라이트를 장식하는 각종 정신병까지 우리의 마음을 좀 먹는 병은 그 종류도 다양했다. 정신분석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도 어렵지 않게 풀어져 있고, 편집자의 능력인지 아니면 두 저자의 문장이 조화로워서 인지 마치 한 사람이 쓴 것 처럼 통일감 있는 흐름도 좋았다.

 


p.50  요즘 젊은 사람들이 나는 혼자여서 좋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함께이고 싶다는 마음의 역설적인 표현 같아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거절당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고통, 실망감, 상실감을 경험하기 싫어서 일부러 혼자가 좋다라고자기 최면을 거는 사람도 분명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확실히 요즘은 혼자를 독려하는 분위기다. 나를 애쓰게 하는 모든 관계로부터 벗어나라고 조언하는 책들도 많다. 나 또한 귀찮음을 이유로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관계에 소극적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함께이고 싶은 마음의 역설이라는 말도 수긍이 간다. ‘혼자는 관계로부터 상처 받지 않기 위한 차선책일지도 모른다. 외로움만 감수하면 되는 혼자보다는 상처를 각오해야하는 후자가 훨씬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건강한 어른이 되려면 혼자라는 단어 뒤로 숨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관계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p.163  “우리 인생의 여정 가운데서 나는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네 제대로 난 길을 몰랐기 때문이라네.”라는 단테의 시 구절처럼 우울은 길을 잃은 상태와 비슷하다. 이런 무기력한 상태에서 길을 잃고 두려움과 고통에 짓눌려 헤매고 있을  , 우선은 그 어두운 안개 속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 그들에겐 필요하다.

 


무기력, 권태, 우울 이라는 감정이 한 줄 기차를 타고 나를 찾아오던 시기가 있었다. 마치 세트 같은 이 감정들은 불안이라는 뿌리를 두고 동시에 뻗어나오는 특징이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나의 상황에서는 산후 우울증이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가 없겠다. 그 긴 터널을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아이들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사실이 강력한 의지가 되었던 것 같다. ‘학습된 무기력에 대해 읽어내릴 때 가슴이 철렁 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나의 감정이 아이들에게 배출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 또한 쉽지는 않으니 어른이 되는 일은 참으로 갈 길이 멀구나 싶다. 그래도 이 책의 저자들처럼 좋은 어른이고픈 사람들에게 손 내밀어 주는 진짜 어른이 있다는 건 마음 든든한 일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자와 나오키 1 - 당한 만큼 갚아준다 한자와 나오키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의 다른 이름은 사이다. 가슴 속까지 뻥 뚫리는 청량함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토록 거침없고 철두철미한 주인공은 처음이다. “한자와 나오키설사 상당히 비현실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직시하더라도 그의 행보에서 느껴지는 통쾌함 만은 감출 길이 없다. 이 소설은 그래도 가끔은 승리하는 정의에 대한 이야기다. 불의의 대척점에 있던 주인공이 철저하게 주인공의 방법으로 복수하는 이야기다. 절대 이 절대 을 무릎 꿇리는 이야기다. 일개 과장이라는 작은 돌멩이가 금융조직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산을 무너트리는 이야기다.

 


1980년대 일본은 돈이 폭주하는 시대였다. 금리 인하와 대폭적인 대출 규제 해제를 등에 업고 부동산과 주식이 폭등했다. 그야말로 거품이었다. 90년대에 들면서 거품은 급격히 꺼졌고 은행과 기업들은 줄줄이 도산했다. 그 한복판에 은행원 한자와 나오키가 있었다. 도쿄중앙은행 오사카 서부지점 융자과장인 그는 서부오사카철강에 자금을 빌려주었지만 그 회사는 6개월 후, 5억엔의 대출금을 남기고 도산한다. 무리하게 대출을 통과시키라고 명령했던 지점장 아사노는 이 모든 책임을 한자와 과장에게 뒤집어 씌운다. 하지만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을 주인공이 아니다. 끈질긴 추리와 추적, 거침없는 행동력, 두둑한 배짱을 앞세워 한자와는 끝내 손실액 5억엔의 회수에 성공하고야 만다.

 


p.218

날씨가 좋으면 우산을 내밀고 비가 쏟아지면 우산을 빼앗는다.-이것이 은행의 본모습이다.

대출의 핵심은 회수에 있다. –이것도 역시 은행의 본모습이다.

돈은 부유한 자에게 빌려주고 가난한 자에게는 빌려주지 않는게 철칙이다.

세상이란 원래 그런 법이다.

 

소설 속의 배경이 되는 은행은 폐쇄적인 일본의 관료주의와 수직적인 조직관계, 이 모든 것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오랜시간 경제 불황에 허덕여 온 일본의 숨막히는 현실이 눈에 보이듯 그려진다. 마지막장으로 갈수록 과거, 기름칠을 하고 나사를 조이며 오로지 기술력으로 돈을 벌던 시대에 대한 향수가 어렴풋이 풍겨온다. 한자와 나오키가 실행하는 복수는 통쾌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환상 속의 이야기임을 자각하는 순간, 당한만큼 갚아준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하는 역설을 느낀다. 당한만큼은 커녕 그 10분의1도 되돌려주지 못하는 현실이 아득해서 그 시대를 지탱하던 아버지들의 무릎이 푹푹 꺾이였을 것이다. 그 후로 몇 년 뒤 우리나라에선 IMF가 터졌다. 실업자의 명패를 달고 길거리, 오락실로 한 가정의 아버지들이 숨어들었다. 과연 우리라고 얼마나 달랐을까?

 

이 소설은 일본에서 2004년 초판, 2008년 후속편이 나온 이후로,  2013년 드라마화 되면서 시청률 50.2%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우리나라에는 그동안 판권 문제로 바로 출판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뒷면을 보니 2012년에 출판신고 후 7년만에야 우리 앞에 나타난 작품이다. 나는 드라마를 먼저 봤지만 책을 읽는 동안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일단 드라마와 소설의 차이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드라마의 극적인 구성을 위해 다소 과하게 각색된 부분들이 알아서 걸러지니 소설만의 매력이 확실히 드러난다. 앞으로 나올 4권까지의 여정이 무척 기다려지는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즈카 할머니에게 맡겨 줘 시즈카 할머니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강영혜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하얗게 센 파마머리에 하얀피부, 깊게 주름진 손마디, 더할 수 없이 온화한 미소. 내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늘 그런 모습이다. 여름방학이면 우리 자매는 으례 외할머니댁으로 보내지곤 했는데, 하루종일 밖에서 놀다 들어오면 땀에 젖은 얼굴을 쓸어주던 투박한 손이 나는 가끔 너무나 그립다. 아무말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이름. 마도카에게도 시즈카 할머니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물론 <시즈카 할머니에게 맡겨 줘>에서 시즈카 할머니는 무엇이든 해결해 주는 만능해결사의 면모를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섯편의 단편이 연작의 형태로 실려있는 이 소설은 법대생 마도카와 가쓰라기 형사가 함께 일련의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두 사람에게는 동료 형사가 살인범으로 몰리기도 하고, 완벽한 알리바이의 속임수를 찾거나, 밀실 살인의 비밀을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맡겨진다. 모든 사건의 해결에는 시즈카 할머니의 통찰력이 작용하는데, 추리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이 모든 이야기 구조가 신기하기만 한다.

 


p.25  모두 자신이 한 행위가 나쁘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아. 그중에는 나쁜 짓 인걸 알면서 일부러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각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단순해. 성가신 점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과 범죄가 정의와 정의의 충돌이라는 것이지. 돈을 훔치거나 속여서 빼앗는 행위도 오늘 하루 일당을 벌지 못하면 먹고 살 수 없으니까, 라는 정의. 사람을 해치는 것도 그 사람을 살려두면 자신과 누군가에게 불이익이 되니까, 라는 정의. 오랜 인습이 남은 곳에서는 법률과 관습이 상반되기도 한단다.

 

저자가 시즈카 할머니의 입을 빌어 정의에 대해 이야기 하는 부분이 특히 인상 깊다. 시즈카 할머니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한다. ‘정의와 정의가 충돌하는 세계라는 말이 얼마나 절절히 와 닿던지. 선과 악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이 세계에서 누구에게든 정의는 있다. 여성 재판관으로서 시즈카 할머니가 손녀 마도카에게 정의관점의 균형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그 사려깊은 판단들이 정말로 이런 어른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시즈카 할머니에게 맡겨 줘>를 읽고 다시 한번 이 작가의 매력에 빠졌다. 다채로운 인물 설정부터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 시치리다운 반전까지…. 다소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 거슬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 잡은 책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 있는 소설이었다. 이 연작 소설의 주인공 시즈카 할머니는 작가의 전작 <테미스의 검>이라는 소설에 나왔던 인물이라고 한다. 많은 작품 속 인물들이 서로 얽혀 있는 작가의 작품 세계가 무척 흥미롭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미 시치리 월드에 입성해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