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았으며
주관적인 견해를 담아 작성하였습니다."

잠깐의 방황으로 끝이 나고 말았지만 한때 '번역이나 해볼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나'라는 조사에 가득 담긴 오만방자함이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말이다. 그즈음 황석희 번역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직도 <데드풀> 이라는 작품을 온전히 보진 못했지만 이른바 초월번역의 단면들을 찾아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의역이냐 직역이냐?'의 해묵은 문제 앞에서 난 직역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중에 한 사람이었다. 물론 극단은 피해야겠지만 원문의 내용이 번역가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 더 동의했다. 하지만 황석희 번역가의 번역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언어와 언어, 세계와 세계를 잇는다는 그 막중한 책임감에서 조금 벗어나 사람과 사람의 소통을 돕는 것이 사실은 번역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지 생각했다. (물론 장르가 문학 작품이냐, 상업 영화냐에 따라서 입장은 꽤 달라질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언어 안에서도 번역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번역가의 말은 무척 설득력이 있다.
황석희 번역가의 두 번째 에세이 <오역하는 말들>을 손에 들었다. 번역가는 말을 자르고, 부수고, 다시 조립하고 꿰매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나 시제, 문장 구조에 특별한 예민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세상을 번역하다'와 '세상을 번역할 것이다'의 차이를 기민하게 느끼는 독자라면 충분히 이 책에 실린 작가의 예민하면서도 따듯한 시선을 금방 알아차리지 않을까.
이 책은 크게 네 개의 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S#1은 번역가 황석희, S#2는 사람 황석희, S#3은 아빠이자 아들인 황석희, S#4는 사회속 황석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술술 책장이 잘 넘어간다. 잘 써진 글은 늘 날 꼼짝 못하게 붙들어 둔다. 그중에서도 가장 재밌었던 건 첫 번째 씬에서 보여준 번역가 황석희다. 영상 자막의 바이트 숫자까지 맞추는 고집스런 집착으로 이루어낸 소소한 복수, <데드풀> 번역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그로 인해 생긴 편견 때문에 곤란했던 에피소드, 좋은 번역에 대한 고민, 연극 대본 번역이 영화 번역과 다른 점 등등 20여 년 동안 저자가 경험한 번역의 세계를 엿보는 일은 내내 두근거렸고 흥미로웠다.

그다음부터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 이야기에 안도하고 공감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평소에 친절한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던 나를 보는 듯한 문장에 눈이 멈춘다. 저자가 이름 모를 유튜브 사이버 렉카에게 삶을 난도질 당하는 순간에도 주변의 소소한 다정함을 알아챌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인류애를 잃어버리지 않고 삶을 지속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지만 반대로 타인의 예기치 못한 다정함에 구원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다정한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다정한 사람이고 싶어진다.
책을 덮으며 표지를 보니 새삼 멋지다. 수정테이프 같은 불규칙한 선들, 파란색들, 그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숨겨진 글자들. 끊임없는 새로고침으로 고르고 골라 번역한 말들이 상대에게 가 닿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느껴진달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역은 없을 테니까요. 이 책이 독자들과 통하고 싶었던 어떤 지점이 저에겐 분명히 전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