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서귤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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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마치 암호문 같은 이 제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읽어야 한다. 그 단 몇 줄로 이 난해한 제목이 이해됨과 동시에 가슴 언저리께부터 슬슬 핑크빛 온기가 돈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상처받지 않겠다는 그 천진하고도 귀여운 선언에 나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그리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눈 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한 모금 쭉 들이켰다. 이 책이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카카오프랜즈 라는 캐릭터가 가진 대중성, 딱 그 정도의 기대감만 있었다. 무심코 집어든 제품의 사은품이 마침 어피치의 탐스런 분홍색이였을 때의 기쁨 정도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다. 책 표지만으로도 이미 많은 여성들이 지갑을 열테다. 그런데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서귤이라는 이름도 요상한 작가의 책을 처음 만나보는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잘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를 아스라한 감정으로 이끈 것은 뜨겁게 붉은 것도 아닌, 차갑게 푸른 것도 아닌, 이제 막 발그레 해진 정도의 핑크빛 온기다. 어쩌면 위트 있는 문장에 온기까지 얹어 내놓는 저자의 글솜씨에 매료된 것일지도 모른다.  

 


p.120

어째서 미처 무엇이 되지 못한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쉽게 저리게 만들까.

너와 내가 한 번도 누군가가 되지 못한 채 늘 과정 위에 선 사람이어서일까.

넌 브로콜리가 사실 열리기 직전의 꽃봉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니?

채 피우지도 못하고 밑동이 잘려버린, 뜨거운 물에 들어가버린, 초장에 찍혀버린,

커다란 꽃봉오리.

자신의 꽃 색깔을 영원히 알지 못한 채 영원히 푸르게 데쳐진 브로콜리 한송이가,

꼭 우리의 젊음에 대한 은유 같아서.

난 도저히 브로콜리를 못 먹겠어.

 

 

얼렁뚱당 써내려간 듯한 문장들에 묘하게 설득되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선풍기의 플라스틱 날개, 지하철역 어느 거울 앞, 브로콜리의 정체, 얼린 숟가락, 수제버거 먹는 법 같은 것들이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 평소엔 눈치 채지 못했던 작고 사소한 것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린다. 오글거리다 킥킥거리고, 뚱해졌다가 피식 웃어버리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다. 짧고 긴 문장들 속에서 젊음의 탄력과 생기가 넘쳤다. 만약 어피치가 정말 살아있는 생물에 글까지 쓸 수 있었다면 아마 이런 책을 쓰지 않았을까. 캐릭터와 문장의 매칭이 딱 맞아 떨어지는 덕에, 책을 읽는 내내 핑크색 엉덩이와 마주앉아 있는 기분이다.

 

카카오 프렌즈 캐릭터 에세이 시리즈에서 라이언에 이어 두번째로 책을 내게 된 어피치.  인기 캐릭터 디자인과 작가의 콜라보레이션을 생각해낸 출판사도, 캐릭터의 입을 빌어 책을 써낸 작가들도, 그 젊은 감각들이 눈부시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낸 한 명의 독자로서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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