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카 할머니에게 맡겨 줘 시즈카 할머니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강영혜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하얗게 센 파마머리에 하얀피부, 깊게 주름진 손마디, 더할 수 없이 온화한 미소. 내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늘 그런 모습이다. 여름방학이면 우리 자매는 으례 외할머니댁으로 보내지곤 했는데, 하루종일 밖에서 놀다 들어오면 땀에 젖은 얼굴을 쓸어주던 투박한 손이 나는 가끔 너무나 그립다. 아무말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이름. 마도카에게도 시즈카 할머니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물론 <시즈카 할머니에게 맡겨 줘>에서 시즈카 할머니는 무엇이든 해결해 주는 만능해결사의 면모를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섯편의 단편이 연작의 형태로 실려있는 이 소설은 법대생 마도카와 가쓰라기 형사가 함께 일련의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두 사람에게는 동료 형사가 살인범으로 몰리기도 하고, 완벽한 알리바이의 속임수를 찾거나, 밀실 살인의 비밀을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맡겨진다. 모든 사건의 해결에는 시즈카 할머니의 통찰력이 작용하는데, 추리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이 모든 이야기 구조가 신기하기만 한다.

 


p.25  모두 자신이 한 행위가 나쁘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아. 그중에는 나쁜 짓 인걸 알면서 일부러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각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단순해. 성가신 점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과 범죄가 정의와 정의의 충돌이라는 것이지. 돈을 훔치거나 속여서 빼앗는 행위도 오늘 하루 일당을 벌지 못하면 먹고 살 수 없으니까, 라는 정의. 사람을 해치는 것도 그 사람을 살려두면 자신과 누군가에게 불이익이 되니까, 라는 정의. 오랜 인습이 남은 곳에서는 법률과 관습이 상반되기도 한단다.

 

저자가 시즈카 할머니의 입을 빌어 정의에 대해 이야기 하는 부분이 특히 인상 깊다. 시즈카 할머니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한다. ‘정의와 정의가 충돌하는 세계라는 말이 얼마나 절절히 와 닿던지. 선과 악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이 세계에서 누구에게든 정의는 있다. 여성 재판관으로서 시즈카 할머니가 손녀 마도카에게 정의관점의 균형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그 사려깊은 판단들이 정말로 이런 어른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시즈카 할머니에게 맡겨 줘>를 읽고 다시 한번 이 작가의 매력에 빠졌다. 다채로운 인물 설정부터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 시치리다운 반전까지…. 다소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 거슬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 잡은 책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 있는 소설이었다. 이 연작 소설의 주인공 시즈카 할머니는 작가의 전작 <테미스의 검>이라는 소설에 나왔던 인물이라고 한다. 많은 작품 속 인물들이 서로 얽혀 있는 작가의 작품 세계가 무척 흥미롭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미 시치리 월드에 입성해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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