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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와 유대인 선교
폴 모리스 지음, 김광남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살아있는 이스라엘, 살아가는 이스라엘”


“우리와 그들 사이 & 그들과 우리 사이”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과연 이스라엘은 어떠한 나라인가?

혹시 한국의 속담에서 생각하는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의 의미”로 유대인을 취급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아니하였는가?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설교가 쏟아져 나오는 이 시대에 유대인은 단순히 구원 받은 이들을 돋보이게 하는 가쉽거리에 불과하지 않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과연 유대인과 이방인의 위치는 그렇게, 혹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만약 그러한 고찰사이에서 부딪혀야 할 관문들이 존재한다면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서 우리와 그들 사이, 그들과 우리 사이에서 고민해야 할 성경적 기준을 정리 정돈 해야 하는 것이 순서 일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대체되어야 하는거지?”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이라는 용어는 오늘날의 유대인은 더 이상 약속이나 언약의 백성이 아니라는 견해에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 견해는 이스라엘을 기독교 교회로 대체해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어떤 의미도 갖고 있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문제는 성경에 수많은 구절들이 이스라엘의 백성의 고유한 역사적 위치에 대해 지목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그 구절은 대체라는 이름으로 대체 할수 없는 신학이며 성경이 암시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의미를 퇴색시킬 우려가 보인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먼저 맡게 할수 있는 특정한 권한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고, 그것은 신약을 연결하는 중요한 내러티브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체신학이란 용어를 효과적인 두가지의 대안을 제시한다. “배제(exclusion)신학” 그리고 “자랑(boastion)신학” 이다. 배제는 유대 백성의 지속적인 언약 신분을 견지하는 모든 이가 그것을 사용하면서도 서로를 비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며 자랑은 바울이 사용했던 용어를 취해 이런 잘못된 생각에 대해 반대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 다루기 때문이다(p32).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체”라는 용어가 발산하고 있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지금도 살아있으며 살아가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을 성경적, 사회적(환경적), 상황적, 선교적인 입장에서의 분석들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재 메시아닉 유대교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서 한 지체로써 한 소망으로써 부름 받은 교회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눈가에 흘린 두가지의 눈물”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은 긍휼의 눈물이자 평화의 눈물이였다. 이스라엘에게 예고된 구원의 메시아가 그들 앞에 있더라도 그들의 눈은 예수님을 응시하고 있지 않는것만 같았다. 칼빈(기독교 강요 2.7)이 말하듯 분명히 율법은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으며 그 율법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기까지 구원의 희망을 주려고 한 그 목적이 훼손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예수님의 눈물은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율법을 안다고 하는 사두개인, 열심당, 심지어 바리새인들조차도 그 영적인 의미를 분별하지 못했다. 그들 보시고 예수님께서 드러내셨던 표현은 “~했더라면”(if)과 “너조차도”라는 표현이다. 우린 상황윤리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윤리적 당위성을 유지하고 싶은 탐심이 존재한다. 그것은 상실의 문제로써 되풀이 할수 없는 문제에 대한 고립된 정체성을 유대인에게 부여한다. 되풀이 할수 없을뿐더러 그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 그들에게 예고 되어 있으므로 예수님은 안타까운 긍휼의 눈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것은 한결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히브리서 13:8). 


“그러므로 우리와(유대인) 우리는(이방인)”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들이 먼저 하나님과 화해할 때에만 서로 화목하게 된다(p255). 유대인과 이방인이 옛 언약의 생활 방식과 연합함으로써 그둘로부터 한 옛 사람(엡 2:15)이 만들어졌을 것이다(p260).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한 영”으로 인하여) 양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각자의 삶의 패턴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화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유대교 식으로 성장한 이가 선교사가 되어 순회 선교를 할 때 돼지고기가 나왔다면 그것을 쉽사리 먹을수가 없다. 문화적 배경 사이에서 바울의 원칙을 고려하는 것은 유대인 선교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인이다. 

또한 개종한 유대인이라고 해서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전통의 예배 방식들을 함께 고수해야 하는 것이 과연 옳은것인지 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골로새서 2:16-3:3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어떤 종교적 의식이나 신비로운 통찰에 우월한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자들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은 그들이 추구하는 유대교적 의식에 대해서 존경의 표시를 하는 것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닮는”일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성경(고후 3:15-16)은 모세의 글(율법)을 수건이라 표현하고 주께로 간다면 그 수건이 벗겨진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수건은 진리를 밝히 들어내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써 존재할뿐이지 그 행위를 하는것에 진리가 담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 사이에 서 표명해야 한다. 사실 우리와(유대인) 우리는(이방인) 메시아닉 유대교와 개신교 사이에서 따로 분류 되어야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한 성령과 한 세례를 받은 그리고 한몸으로 연합된 공동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함으로 반드시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 그것이 궁극적인 유대인들에 대한 선교의 방향성이다. 사랑가운데 서로를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야 한다(엡 4:2-3).


앞으로 우리(이방인)와 우리(유대인)는?

최초에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으로 부름 받은 유대인에 대한 오해를 이방인은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유대인과의 관계를 끊고 이방인에게 집중하고 계시다는 편협한 생각을 바울은 지적했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이제는 자신들이 진정한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있다는 어떤 우월성에 사로잡혀서 유대인들을 구원에서 탈락한 존재로써 방관해버린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듯이 저도 이스라엘 사람이며 아브라함에 씨에서 낳고 베냐민 지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탈락시키지 않았습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방적이고 전적인 구원은 자신이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다. 예를 들어 아무리 기독교를 박해하는 김정은과 같은 위치에 서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불가항적으로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를 구원하실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라는 존재가 다르지 않다라는 전제를 제시 한 다음에 그 다음 순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결론적으로 서로를 필요로 한다라는 것이다(p408).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었고, 이스라엘은 이방인이 받은 긍휼의 결과로 긍휼을 받는다고 한다(롬 11:31).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여전히 계획들을 갖고 계시는 것이다. 이방인으로써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들은 계속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게 바로 유대인에게 받은 “빚”과 같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언약백성으로 출생한 우리는 칼빈이 말하듯 율법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기까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희망을 소망케하려는 의도에서 작정되고 작성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먼저 맡고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 많은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방인으로써 빚과 같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방인은 그 긍휼로 나음을 얻었고, 아직 그 나음을 얻지 못한 그들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복음의 필요성은 불가결해 보이는게 우리(이방인)와 우리(유대인)의 입장인 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선교의 역사의 현장 가운데 우리가 기필코 다뤄야 할 유대인의 선교는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있어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고, 우리라는 공동체로 연합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앞으로도 믿는 자로써 그들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 나라에 신랑과 신부로써 입장해야 할 같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로 바라볼뿐만 아니라 구약성서로 바라볼때도 유대인에겐 구원이 필요함으로 모든 성경 가운데 모든 선교의 현장 가운데 계신 그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찬양하며 그 깊으신 뜻에 흠뻑 매료되는 아주 귀한 경험을 책을 통해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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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란 무엇인가
최갑종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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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를 말하는 자, 성화의 삶을 살지어다.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다보면 구원론의 입구이자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대한 교리라고 할수 있는 칭의에 대해 불신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은 “거래”에서 출발해서 조건적으로 인간 사이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의 표현인 칭의라는 개념이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들중에 무료로 롤스로이스나 람보르기니 같은 차를 준다고 했을 때 그것을 은혜로 받아 드릴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 할겁니다. 이게 무슨 신종 사기인가?라는 생각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겐 칭의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칭의를 받았다라는 믿음이 확실하다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최갑종 교수님이 쓰신 책인『칭의란 무엇인가』가 성경적인 적절한 해답과 최근 신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여러 관점들을 정리하고 살펴봄으로 칭의와 성화의 균형 잡힌 시각을 주리라 확신합니다.

일반적으로 칭의는 구원론적인 관점으로 개개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정적 선고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는 신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해있는지를 지칭하는 교회론적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또한 그들은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보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 이유인 즉슨 칭의가 신학과 윤리의 삶을 서로 분리시켜 복음을 윤리 없는 값싼 복음으로 전락시킨다는 점이 계속해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어떨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적 정황은 어떻게 연결 되어 있을까요? 저자는 여기서 샌더스라는 새관점의 출발을 알리는 그를 소개합니다.

여기서 새 관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샌더스는 칭의를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선택과 은혜에 의해 주어진 그들의 특별한 신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p37)로써 전통적으로 우리가 받아 들이는 칭의교리를 수정하려는 시도를 거듭합니다. 이것의 배경은 유대교 문헌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이해가 등장했기 때문에 기존의 잘못된 유대교 이해를 따라 해석된 바울의 칭의 교리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라고 주장입니다. 또한 새관점을 주장하는 던이나 라이트도 의견 같이 하여 칭의 교리를 구약에서의 하나님께서 맺으신 율법의 언약들이 종말론적인 관점 아래에서 해석합니다. 물론 이 의견은 타당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언약은 종말을 향해 모든 사람들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함하여 언약하고 있음을 성경은 자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관점 주의자들은 언약백성으로써 자격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성화를 더 강조하는 경향성이 보입니다. 정통적으로 신학자들은 신명기 27:26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은 율법을 완벽하게 준수 할수 없으므로 인간은 무능력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주님의 은총을 구하게 된다라는 결론이 나오지만 그들은 바울 당대의 유대교의 가르침은 유대인인 바울 자신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거부를 합니다. 

더군다나 샌더스는 바울의 가르침을 수사학적(구원론적·기독론적)으로 판단하여 갈라디아서 3:10-11에서 말하는 율법의 완전한 순종에 대한 요구나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축복“을 말하는 선행 문단과 대조적으로 ”율법“→”저주“를 말하는 데 있다(p117)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관점은 칭의 교리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며 믿음의 행위를 언약백성으로써의 율법 준수에 힘을 쏟게 함으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수도 있다는 위험성 마저 보입니다. 

율법은 의를 가져다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씀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의와 구원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경우는 저주를 자초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 성경의 구원관입니다. 더 들어가 바울은 인간이 율법 준수에 문제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믿음의 길처럼 과연 인간에게 의/구원에 이르는 길/수단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더 근원적인 문제로 나아가는 것임을 성경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칭의에 대한 논의가 정리된 우리는 성화를 어떻게 볼 것입니까? 성화는 주로 실천적인 문맥에서 사용되는 것을 볼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칭의와 성화를 비록 다른 각도나 문맥에서 사용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일종의 동의어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의 서신을 보게 되면 “거룩하게 하다”를 9번(롬 15:16; 거잔 1:2 6:11; 7:14, 14; 엡 5:26; 살전 5:23; 딤전 4:5; 딤후 2:21), 명사 “거룩함”을 8번 사용합니다. 어휘적인 용법을 살펴보게 되면 과거나 완료형 그리고 현제 시제로 사용이 됩니다. 성화도 칭의의 경우처럼 이미 이루어진 사건인 동시에 지금도 이루어지는 실제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p222). 디도서 3:4-7절을 보게 되면 구원의 행위를 삼중적으로 표현합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의롭다 하심”으로 표현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것이 칭의와 성화의 순서를 나타내고 있기 보다는 서로 동일한 의미로 구원의 실재를 표현이라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칭의와 성화를 계속해서 살펴보게 되면 칭의와 성화는 서로 분리 되어 있지만 구분되어지지 않음을 우리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할수 있으며 그것은 삼위로 계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아래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칭의란 무엇인가』이지만 구원론의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는 책입니다. 최근에 대두되어 지는 바울의 새관점을 주장하는 샌더스, 던, 라이트의 주장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있으며 그들의 교리의 심장부인 칭의와 성화를 정통적인 교리와의 차이점에 대해 잘 분석하고 있습니다. 구원론의 중심에 서 있는 칭의는 성화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잘 설명하고 한국 교회가 다시 한번 각성해야 할 칭의와 성화를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온전하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되었다라는 것에 대한 감격으로 삶을 살아 갈 때 칭의에 대한 감격과 마땅히 그 감격으로 사랑하는 이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동시적으로 나타나 신자들의 삶을 이끌어 간다는 사실을 조금만 더 이해한다면 이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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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적 교회 - 탈육신 시대에 교회의 역사성과 공공성 회복하기
마이클 프로스트 지음, 최형근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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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적 교회가 왜 그대에게 필요한가?


  요즘 밖으로 나가 세상을 둘러보면 한결 같이 스마트 폰에 빠져 들어갈 듯 눈을 붙이고 몰입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쉽게 발견 할수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들은 문명의 발달이 주는 “인간관계의 단절”이라는 원초적인 요소에 매몰 되어 버렸다. 단적인 예로 SNS안에서 이용자들의 모습들을 유심히 관찰을 해보면 그들이 얼마나 훌륭한 가면을 쓰고 자신을 포장하기에 애를 쓰는지를 분명하게 알수 있다. 자신이 현실에서 극복하지 못했던 다양한 관계의 문제들을 SNS안에서 쉽고 편리하게 해소시키는 탈출구로 매번 배설하여 자신의 자아를 내가 꿈꾸는 자아 안으로 함몰 시켜 버린다. 


  이와 같은 현상은 결론적으로 개인주의와 나르시시즘(Narcissism)등으로 인간의 관계를 단순히 각자가 필요 할 때 쉽게 꺼내 쓸수 있는 휴대용 가치로 전락 시켜 버렸다. 이것은 고스란히 신앙의 문제와도 직결되어 신자들에게 이원론적인 사상을 자기 스스로가 강요해 버리는 결과가 초래 되었다. 단절이 단절을 만들고 그 단절은 결론적으로 포류하고 있는 인간의 자아상을 계속적으로 조명하는데 이것을 ‘성육신적 교회’의 저자인 마이클 프로스트(Michael Frost)는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의 방식들을 살기를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 ‘성육신’과는 반대의 개념으로 정의되는 ‘탈육신’으로 신자의 고유의 삶이 이탈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대표적으로 비디오 게임과 포르노 중독에 젖어 있는 젊은이들을 이야기 하면서 그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극복해야 할 많은 관계들을 해결해야 하는 용기조차 빼앗아 버렸으며 지속적으로 고립된 관계 속에서 황폐해져가는 삶을 유리하듯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한다(p42). 불행하게도 이러한 현상들은 가족 관계에서도 자주 찾아 볼수 있다. 가족들이 도란 도란 식탁에 앉아서 서로의 삶을 인격적으로 다듬어 줄수 있는 시간들을 스마트 폰이라는 문명의 발전이 강탈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가족 공동체의 재앙과도 같아서 사회 공동체에 진입하고 나서도 고스란히 그 문제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스스로에게 집착하여 이기주의라는 괴물을 탄생시켜 버린 이 세상이 바로 ‘탈육신’된 세상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가족이라는 최초의 공동체가 탈육신적인 삶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앞으로의 미래는 더욱 더 침체 된 가족 관계와 사회 풍토가 성육신적 교회의 모습을 점차 빼앗아 버릴 것임을 너무나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있어 성육신적 교회의 모습에 대한 어떤 정의가 필요 할까? 프로스트는 탈육신 되어가는 세상과 교회에 대항하여 성육신의 단어에 대하여 세가지로 정의하며 이에 따라 대안을 분석한다. 

1) 성육신의 본을 따르는 것 2) 성육신의 지속적인 힘으로 능력을 부여 받는 것과 3) 하나님의 성육신적 선교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과의 분류 혹은 분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인간이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총체적인 삶을 성육신적 삶이라 정의한다면 칼빈이 말했던 신적 의상을 소멸해 버린 인간이 과연 성육신적 삶을 당당하게 전할수 있는 것일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바울의 말은 예수가 전하신 성육신적인 삶을 따르는 모든 믿는 신자에게 해당하며 그것을 통해 호흡하며 그 규칙들을 모방하여 서로가 서로를 본 받는 삶의 체계가 형성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5, 벧전 1:16)의 말씀은 곧 거룩 할수 없는 인간이 거룩한 자로써 말할수 있는 주님께서 주신 자신감으로써 삶을 영위 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살아 숨쉬어 역동적으로 신자들을 성육신적 삶으로 구속 시키며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게 함을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거룩을 향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탈육신적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육신적 교회를 위협하고 있음을 예의 주시하며 이 시대에 어떤 방법으로 선교를 할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책을 풀어 낸다. 먼저 9장에서 그는 현재 발전해 온 단기선교가 선교의 단어가 제거 된 “자원봉사관광”(voluntourism)의 부상을 목격했다고 말한다(p220). 과연 보육원 방문이나 클릭티비즘이 만약 우리가 하는 주 사역이라면 과연 성육신적 교회를 형성 할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제기 된다. 여기서 그는 로버트 립턴의 ”긍휼사역 선서“(Oath for Compassionate Service)를 인용 하여 주로 가난한 선교 지역의 사람들이 물질적으로나 선교적으로 자생할수 있는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 목적으로 돕는 손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립턴은 실제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시도는 선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종들을 양성하는 좋은 계기가 될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어느 정도 입장이 다르다. 선교의 목적을 ”구제를 해야 한다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다 보니 선교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희미 해질수 있는 위험성 또한 보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선교 현장에서 구제를 먼저 하지 않고 복음을 먼저 전하는 메신저로써 선교를 감당한 것처럼 선교의 주체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이 부분이 공급 되어지지 않으면 행위로 점철 되어 지는 탈육신적 선교로 변질 되어 버릴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선교의 주체는 행위가 아닌 복음으로써의 방향성을 절대적으로 유지 한 채 고민을 쌓아 가야 한다. 


  물론 책의 주제가 이 시대를 겨냥하고 있고 “탈육신”에서 “성육신”으로 지형이동을 하는 실제적인 과정을 다루고 있으므로 글이 다소 편향 되어 질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써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일 때 구제 만큼 그들의 마음을 복음으로 이끄는데 편리한 수단은 없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리고 바울 또한 고린도 후서 9장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연보(헌금)함으로 하나님께 감사(고후 9:11~12)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들이 복음 앞에 진실 됨으로 복종하기를 권고 한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유하고 채워 주려는 시도는 마땅히 복음과도 부합한다. 이것을 마이클 프로스트는 성육신적 교회에 대비해서 지속적으로 설명하고자 노력하는 모습들이 책에 역력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성육신적 교회의 포지션을 취하는데에 있어서 인간의 의식이 사회적으로 결코 독립 할수 없음을 피력 하면서 만약 앞으로의 인류가 표면적 이미지와 시뮬레이션 및 파편화되고 단순화된 것에 익숙해진다면 분명히 의미 있는 성찰과, 평생의 약속이나 연대감을 포용하는 것이 점차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p278). 그러므로 인간학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위에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게 중요하다. 예전에 인터넷이 상용화되지 않던 시절에 옆에 붙어 사는 이웃들과 어떤 관계속에 지냈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매일 같이 마실 나온 것처럼 이웃들과의 교제 안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옆에 누가 살았는지가 죽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소통의 부제가 사랑의 부제로 연결 되어 삭막한 세상을 인간 스스로가 시뮬레이션의 세계에 자신을 고립 시켜 버리는 것이다. 사실상 이웃들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디지털의 세계로 환원 되는 것이다. 디지털은 자본의 세계를 구축하고, 자본의 세계는 개인주의로 경쟁 사회를 부축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즉, 탈육신 되어 가는 이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탈육신의 원인을 분석하여 성육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정립 하는 것이 현대 선교의 최대의 난점이자 해답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난제들을 제시함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에게 스스로가 해답을 찾을수 있도록 충실히 쓰여진 “책”임은 틀림 없다.


  현대 시대에는 누구도 믿을수 없다라고 많은 사람은 주장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성육신 된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한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며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라는 것이 이 책의 실제적인 교훈처럼 보인다. 마이클 프로스트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격려로 글을 마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싸움을 절대 포기하지 마라. 우리는 진리를 맛보았고, 그 맛을 잃어버릴 수 없다.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갈 뿐이다. 우리는 최고라고 주장하면서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 세상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주는 자들로 중심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끈질기게 부여잡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모습을 지속해서 드러내는 급진적 신앙 공동체로 존재해야 한다.”(p378)


  그렇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급진적으로 실천했던 성육신적 삶에 대하여 용기 있게 부딪혀 나가야 할 사명자 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탈육신의 사회는 계속해서 교회를 위협하지만 성육신적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진리를 수호하는 이들에게 포기 하지 않는 힘을 계속해서 공급해주신다는 사실 또한 기억하자. 나도 그의 격려에 화답하여 말씀 구절로 마이클 프로스트에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싶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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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 지형도 - 조직신학 각 주제에 대한 현대적 개관
켈리 M. 케이픽.브루스 L. 맥코맥 엮음, 박찬호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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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은 철학의 손을 잡고 베타주의와 포괄주의 사이를 활발하게 운행한다. 배척과 포용이 존재 하며 때로는 서로를 보완하여 자신들이 주장하는 사상들에 대한 적절한 비유와 함께 설득력을 높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철학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이 준비 되어 있지 않는 이상, 현대 신학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결국에 신학에 대한 조예가 깊다 하여도 신학과 철학을 종합적인 관점에서 관찰 할수 없는 도구가 없다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왔던 현대 신학을 다루는 서적들은 대부분 인물을 위주로 서술하거나 현대 신학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경향의 서적들이 다수를 차지하였으나 이번에 발간 된 『현대 신학 지형도』는 서론부터 종말론에 이르기까지의 15가지의 주제들을 신학적으로 통찰력 있게 그려 낸다. 이러한 분류는 신학 공부를 하는 독자로 하여금 안정감을 찾을수 있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내가 누군가에게 현대 신학의 어떤 한 분야를 설명하고 싶을 때 챕터에 해당하는 부분들을 읽고 대답 할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신학적인 교양을 키워 낸다. 목회자와 신학자들에게 교양이란 세상의 역사(문화적·정치적·사회적·윤리적)를 분석하고, 그것을 성경적으로 다시 담아내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사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는 항상 “현대”를 대상으로 신학과 철학을 발전시켜 왔다.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현대가 현대를 재창조하는 현상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며,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시대를 타고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 되어 현대 신학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위치하게 되었다. 특히나 현대 신학의 입구와도 같은 슐라이어마허와 헤겔이 서로를 대척점으로 삼고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상을 구축했다. 이는 브루스 L. 맥코맥이 서론에 『현대성을 신학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서술했던 것처럼 슐라이어마허는 “고전적 유신론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고난당할 수 없음(또는 “영향 받을 수 없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의 완전한 단순성(simplicity 또는 “구성요소의 결여”)이라는 결과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론적인 측면을 약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헤겔은 반대로 고전적 유신론을 유지하면서 신정론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여 슐라이어마허를 극복한 존재로 간주 되어 현대 신학을 시작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부분은 현대 신학을 진입 하는데 큰 틀을 제공해 준다. 

그 이후로의 현대 신학은 두 인물을 기초로 하여 사상들을 전개해 나가는 경향을 볼수 있다. 프레드 센더스는 2장『삼위 일체』에 관해 다룰때에도 헤겔의 영향은 몰트만에게서도 찾을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몰트만은 헤겔의 가장 창조적이고 영향력 있는 옹호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라고 밝힌다. 헤겔과 몰트만은 역사 안에서 자신들을 소통함을 통하여 보편적인 진리를 역사 안으로 회귀시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용법으로 “역사적 삼위 일체론”을 주장하는 공통적인 면모를 관찰 할수 있다. 이처럼 각 장마다 현대 신학의 지대한 영향을 준 대표적인 인물들을 나열함으로 어떻게 상호간의 체계들을 연결 시키는 지에 대한 적절한 설명들을 통해서 신학적인 격차를 극복 할수 있도록 도와 준다. 

대다수가 개혁주의에 의존하고 있는 신학자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장에서 맥코멕은 이렇게 밝힌다. “그것이 유형론적(typological)이든, 주제 중심적이든, 아니면 거의 역사학적이든 자신만의 접근방식을 택하도록 안내를 받았으며, 무엇을 포함시킬지 그리고 무엇을 합리적으로 배제할지에 대해 그들은 상당한 자유를 부여 받았다. 분별력 있는 독자는 몇몇 집필자들에게, 현대 신학자들이 다루는 문제들을―그것들이 이전의 일련의 고전적인 사고로 소급될 수 있음에도―현대 신학자들 자신의 고안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차이를 평준화를 시도하지 않았고, 그 대신 그 차이를 현대신학의 풍요로움을 증언하는 한가지 방법으로 보았다” 

현대 신학은 시대를 거듭해 가면서 풍요로움과 함께 성경이 쉽사리 깨뜨릴수 없는 견고한 성으로 변모해 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와 신학도는 현대 신학을 공부 해야 할 일은 자명라고 판단 되어 진다. 왜냐하면 현대에 이르러 다원주의등의 가속화함에 따라 성경적 가치 판단의 기준이 모호해지고 있으므로 현대의 신학을 성경으로 풀어 낼수 있는 이들이 공급 되어지지 않는 이상 현대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방어 할수 있는 수단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현대 신학 지형도』는 각 분야의 신학자들이 전개해 놓은 현대의 신학의 흐름을 한 눈에 볼수 있으므로 목회자와 신학도가 앞으로 현대를 풀어 나가야 할 과제에 대해서 면밀히 볼수 있는 그러한 장점을 가진 책이다. 역사는 더욱 더 빠르게 업데이트 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현대를 알지 못하고는 성경적인 변증이 불가하다. 그러므로 현대의 신학이 주는 풍성함속에 성경과 대치되는 부분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 할 때 이 책을 적극 추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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