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투쟁 -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 악셀 호네트 선집 1
악셀 호네트 지음, 문성훈.이현재 옮김 / 사월의책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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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면서 갈등은 피할 수 없다. 

피하려 하면 비겁해지고 

삶을 적당히 살게 된다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만 보려하고 

배면을 보려하지 않는다. 

빨리 판단하려 하고, 갈등을 피해가려 하고, 순간을 모면하려고만 한다. 

나이가 들면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 

.... '인정'은 이미 '이념상' 총체성으로 발전한 의식이 '다른 총체성, 즉 타인의 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인지적 단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타자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경험을 통해 갈등이나 투쟁이 발생하는 것은, 개인들이 자신의 주관적 요구가 손상될 때에만 타자 역시 내 속에서 자신을 '총체성'으로 재인식하는 지 어떤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p72 

 어제 나는 아이를 억눌렀다. 아이의 행동의 잘못만을 따지려 했고, 그 배후를 살피려 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의 잘잘못만 따졌고, 아이의 격한 반응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내가 해야할 행동의 강도를 넘어서 버렸다. 

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어리석게 화를 냈고, 

아이의 자존감을 짓밟아 버렸다. 그리고 지금 아이는 내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나의 잘못과 내가 인정하지 못한 아이의 총체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헤겔이 일생 동안 몰두한 정치철학적 과제는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칸트의 이념에서 단순한 당위적 요청의 성격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p33 

고민한다. 아이는 무조건 자유로워야 하는가. 아이는 무조건 억압없이 자라야 하고, 

아이는 아무런 조건 없이 존중 받아야 하는 것인가 

나는 나를 반성하면서 또 아이를 살핀다. 나를 살필 거라면서 아이의 행동의 잘잘못을 따진다. 

헤겔이 일생 동안 몰두한 정치 철학적 과제가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칸트의 이념에서 단순한 당위적 요청의 성격을 제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막연하게 나와 아이의 갈등 상황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아이가 한 독립적 개체라고 했을 때, 아이의 자율성은 나에 의해 침해받아서는 안된다. 아이는 

하고싶은 대로 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 자율성의 테두리는 나라는 부모에게 틀지워져 있고, 

아이가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아이는 내가 만든 경계를 함부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러니 아이는 그냥 자유로운 아무런 조건없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어른인 나는 아이의 자유로워야 할 권리를 빼앗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경계를 만들었다고 해서 아이가 무조건 그 경계 내부에서만 존재해야하고, 그 경계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틀지워진 경계 안에서만 있지 않다.  

나와 동등한 존재적 조건을 가지고 

세상에 있다. 한마디로 총체적으로 존재하는데, 내가 만든 경계를 함부로 행사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인정'의 미묘한 역학관계가 있다. 아이는 어리고 아직 나약해서 경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그 경계 안에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경계에 머물게 되면 나약한 채로 있고, 한 인간 존재가 치뤄야 할 세상과의 투쟁을 해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헤겔이 당시 지니고 있던 생각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를 실천적, 정치적으로 관철하려는 사회 내적 동력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상호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주체들의 투쟁에서 비롯한다는 것이었다. 33p 

헤겔의 변증법에서 '투쟁'이란 용어는 아주 중요하게 사용된다.  어른들은 자주 말했다. 세상에 쉽게 얻어지는 건 없다고. 어렵게 얻는 만큼 어렵게 지키는 것이라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투쟁'이란 용어가 지닌 부정적 어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신적 이상은 투쟁없는 삶이지만, 세상이 투쟁없는 삶을 쉽게 용인하지 않는다. 

 '정신사적으로 볼 때 근대 사회철학의 등장은 사회적 삶을 근본적으로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관계로 규정하려는 계획에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의 정치 저술에서 주체들이란 자신의 이해를 둘러싼 지속적 경쟁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정치적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 35p 

'주체들이란 자신의 이해를 둘러싼 지속적 경쟁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정지적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  

자칫 느낌이 좋은 소설과 영화는 부모와 자식간에는 ' 자신의 이해'나 '지속적 경쟁'의 상태를 제거해 버리는데 과연 그것이 옳은 지 의심스럽다.  

관계에도 긴장은 있다. 부모의 이해관계와 자식의 이해관계가 서로 집요하게 작용하지 못할 때 그 관계는 이미 어느 한쪽의 이해관계에 먹혀 버렸다. 대부분의 위대한 아들과 희생만하는 어머니의 관계에서 보이듯이. 그리고 위대한 아들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작품에서 어머니의 위대성을 들춘다. 하지만 그 위대성은 어머니의 하인됨의 위대성, 묵묵히 자신의 손발이 되어 주었던 그 기형성의 위대성은 아니었을까. 거기에 과연 정상적 인정의 자를 들이댈 수 있을까.  

부모 자식간에도 '자신의 이해를 둘러싼 지속적 경쟁'은 있고, 그로 인한 대립은 있다. 그 대립이 나쁜 것은 아니다. 

나쁘다고 판단할 필요도 없다.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호네트의 인정 개념을 너무 나이브하게 생활에 적용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내면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두고 

상대를 바라보는 투쟁이라는 의미에서 

그 투쟁에 의해 생생하게 살아오는 타인의 의미에 의해서 역동적으로 살아난다. 

호네트가 들고 나온 인정 개념이 

하버마스와는 달리 인간의 상호주관적 관계가 담론에 참여하여 더 나은 논증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보편적 동의에 도달하는 언어적 관계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다. 사랑, 권리, 사회적 연대 등은 하버마스의 틀에 비해 광범위한 상호주관적 관계로 우리를 인도하여, 하버마스에게서는 차츰 사라져간 심리적 현상이나 전언어적 영역에 대한 접근 또한 가능하게 한다. 21p  옮긴이의 말 중 

 타인의 총체적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총체적 조건을 살핀다. 면밀히 살피고 냉정하게 판단한다. 그 판단의 여하에 따라 타인과의 의사소통은 가능해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담론의 장은 어쩌면 너무 이상적 지식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사소통에 의해 사회적인 문제가 다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호네트가 말하는 '좋은 삶'이 호네트가 드는 논거들에 의해 바야흐로 등장할 수 있을 지 의심스럽지만, '인정'이란 개념은 중요하다. 

'인정'의 복잡성은 주변에 널려 있다. 

노동자가 사측과 말을 하려 하지만, 사측은 모르는 척 입을 닫아 버린다. 

거기에 답은 없다.  

어제 아이에게 소리 지르는 순간 아이는 부모를 경멸하게 된다. 

거기에 정상적인 소통의 장은 만들어질 수 없다. 

뒤늦게 깨달은 부모가 아이로 하여금 말문을 열개 하려고 하지만 되지 않는다. 

그리고 부모는 끝내 아이를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또 다른 일상적 아침을 맞았다.  

태연하게 아침을 먹고, 학교로 간다. 태연하게 날씨는 흐리고, 아이의 우울한 마음 상태와 다르게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은총아래 그다지 어둡지 않다. 고딕식의 음침함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울함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 

또 다른 아침이 왔고 

공기의 흐름은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다 

이런 아침은 수없이 많은 아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시간은 그 태연함으로 인간을 길들여 왔다. 

지금 버티면 

또 다른 시간은 온다. 

하지만 쉽게 오지는 않는다. 

부당하게 당한 사람이 따지러 가는 아침이다. 하지만 상대는 없다. 

할 말을 가슴에 품고 온 사람을 적당한 웃음으로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 

포즈를 취한다. 선함의 포즈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포즈 

당한 사람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우울하다. 

억압하고 누르고 폭력을 가하는 사람의 일상은 멀쩡하고 너무 정상적이고 

온갖 명품과 기품으로 가득한 이는 화면을 향해 미소만 날린다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미소 

자신을 닮으라는 미소 

상대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인정하고 존경하고 따라하라는 미소 

거기에 인정이란 개념이 끼여들 틈은 없다.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이 

정치적으로 변할 때 

억압하는 자는 자유롭다 

만인이 만인을 향해 칼을 휘두를 때 

우리는 전체주의적으로 아주 평균적으로 단순하게 변한다. 거기에 답은 없다. 

'인정'은 어렵다. 

부모가 자식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서 

피눈물을 흘리는데 

하물며 다른 관계에서랴.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서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에서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서 

그리고 대통령과 그 국민들의 관계에서 

'인정'의 의미는 중요하게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마음에 두고 바라볼 줄 모른다면 

말놀음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좀 똑똑 해지길, 좀 이기적이길  일개 개인은 거대한 말에 줏대없이 휘둘릴 필요가 없다. 

특히나 그 사고의 지반이 약하다면 어떻게 해야할 지. 

사실 똑똑하게 이기적이어지기 위해 공부한다. 

집요하게 공부하고 그 날카로운 눈으로 인정을 받아내기 위해 

그러니 적당히 살다보면 인정을 받을 수 없다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이 무서운 이유는 거기에 있다. 

나이브하게 현실을 

똑똑하기 때문에 누구를 존경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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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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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큼 나이가 들고 보니 쓸 수 있는 말보다 쓸 수 없는 말들이 많아진다. 

 잘한 일보다 못한 일들이 앞을 먼저 막아선다. 

이렇게 비겁해지는가 보다 

한 때 겂없이 설치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무시하려 할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런 눈 그런 마음의 자를 버리지 않고 있다 

사회는 부조리하기 때문에 나의 반항심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만큼 나이가 들고 보니 나의 반항심이 타인의 반항심으로 돌아오고 있다 

거기에 대항하고 억누르기가 어려워 

매일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 

항상심을 갖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들뢰즈가 말했다. '나는 시간에 의해 분열되어 있다'고, 

맞는 지는 모르겠다. [차이와 반복]을 읽고 나서 남은 것은 저 한 문장이다.  

나는 시간에 의해 분열되어 있다.  

과거의 나와 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는 같지 않다. 

다 다르다 

다른 시간 속에 수많은 나들이 공존하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수없이 많아진 나들의 간섭으로 인해  

매순간 흔들리고 반성하고, 고정될 수 없고, 확고 할 수 없어서 

판단해야할 순간을 보류해버리는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이래서 나이가 들면 단순해지나보다 

순간에 자신을 맡겨 버리고, 

단순함과  

순간의 득에 이끌려 나는 보수화되고 있다. 

나는 어느순간 골수 보수가 되어가고 있다. 

꼴통 보수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지금 나의 공부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철저하게 시간 속에 분열되어 있는  

마르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화자는 어쩔 때는 이렇고, 저쩔 때는 저렇다.  

일관성을 갖고 있지 않고 변덕스럽고, 

일상을 쫓는 집요함이 지나쳐 

 뭐 이런 쫌생이 아저씨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좀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 깊이 들어가서 

매순간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매순간 계산하고 따지고 이렇게 판단하고 저렇게 판단하는 순간 속에서 

선택을 하는 인간이 있다. 

이 소설이 위대한 것은 

작가가 자기 자신에게 솔직했다는데 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저리가 쳐질만큼 솔직하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자기 내면의 부조리를 심하게 따지거나  

그 근원을 밝히려 애쓰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나는 것을 통한 판단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단순성이 있기 때문에 

이런 소설을 어렵다고 말한다. 어렵다고 판단하고 조금 읽고 던져버리려 한다.  

그리고 연신 내뱉는다. 어렵다고, 단번에 읽혀지지 않기 때문에 단번에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살피고 살펴봐야 하고 집요하게 화자의 생각을 따라가야하고, 그의 혼란상에 동참해야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어렵다는 말을 이럴 때 써야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화자는 자신의 내면에 충실했고, 

그 내면을 최대한 글로 옮기려 애를 썼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적확한 묘사와 감정으로 인해 감동을 주고 

어떤 부분은 그 사유의 일관성의 상실로 인해 독자에게 실망을 준다. 

나는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난감함을 느낀다. 이 책 좋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답을 할 때 망설인다 

좋기도 했고 나쁘기도 했고 

혼란스럽기도 했다고,  

어떤 책은 재미있었다. 선굵은 서사를 따라가니 좋았고, 이해하기 편했다. 그래서 좋았다. 

어떤 책은 서사를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문장이 남았다. 

그 아름다운 문장에 내 영혼이 들렸다. 그래서 좋았다.  

하지만 들으려는 사람은 좋았다 나빴다에 중점을 둔다.  

좋고 나쁨의 강도와 그 이면에 관심이 없다 

나도 그랬다. 

모든 것에 문외한이었지만 책이 보고 싶었을 때 

책을 읽는 즐거움을 갖고자 했을 때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렸고, 

적어도 베스트셀러는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더이상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리지 않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베스트셀러를 경시하게 되는 경향까지 생겼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된 것에 만족한다. 

나는 나만의 책을 읽고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려 한다. 

그리고, 

그 솔직함으로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위대한 마르셀과 

좀생이 병자 마르셀 

섬세한 사랑에 고통스러워하는 마르셀 

주변사람들을 면밀히 살피고 

그들의 목소리를 감정상태를  

온전히 되살려보려는 마르셀을 모두 보여준다. 

비록 마르셀이 어떤 귀족성, 

어떤 부르조아성, 

어떤 속물성을 버리지 못한 보수주의자처럼 보일 망정 

비록 마르셀이 

어떤 가부장성 

어떤 억압성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나는 그를  

나는 그의 욕망을 존중할 마음이 생겼다. 

그가 그의 주변사람들을 복잡하게 

이해하려 애썼고, 

그 이해의 노력이  

흔히들 읽기 어려운 책이라 말하는 

이 책에 담겨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다시  말하고 싶다. 버지니아 울프든 마르셀 프루스트든 제임스 조이스든 

함부로 어렵다고 말하지 말았으면 

그의 문장을 온몸의 세포로  

받아들이고, 

이해해 보려 노력하지도 않고 

섣불리 어려워서 접근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말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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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e the Obscure (Paperback, 2)
Hardy, Thomas / W W Norton & Co Inc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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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Rewritihg 군요. 다시쓴 것은 다시 썼다고 정확히 나와 있으면 좋겠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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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 청년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읽을 만한 선입견 없음이 과연 가능하냐고 묻는다. 흑인청년의 정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읽을 능력이 있는 지 묻는다. 백인에게 백인이 주인공인 영화를 오랜 세월 보아온 입장으로 흑인 주인공과 나를 일치 시키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색함이 읽는 내내 거리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속도감 있게 읽지 못했다. 적나라한 육체에 대한 묘사와 그리 어려울 것 없는 내용이었음에도 쉽게 책 속의 글자를 따라가지 못한 이유는 이미 전제된 인종적 편견의 소치는 아니었느냐고 ..... 왜 하필 백인 소녀였느냐고, 그런 이분법이 흑인차별에 대한 아무런 답을 주지는 못할 거라고. 나 자신 말하면서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 안에 있는 인종차별적 사유와 싸우느라 책에 몰입하지 못했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 흑인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어야 하는 지도 모른다. 이건 물리력에서 몹시 딸린다. 영화중 흑인이 주인공이 영화를 과연 몇 개나 보았느냐는 질문과, 그런 저급한 수치화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 무의식을 관장하지 못한다는 답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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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0-10-1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훗 저도 요즘 다시 서재를 오픈하고 있습니다. 근데 사자님은 9월에 이렇게 리뷰를 써 주셨네요.ㅋㅋㅋ 여전히 조용하고 고독한 서재의 분위기가 풍기네요. 전 지금 엄청나게 일을 열심히 하고 있어서 정신이 나가 버릴 판입니다.
이공계의 달인이 되고 있다고 할까요? ^^;; 암튼 사자님의 글도 자주 봤으면 합니다. 항상 바쁘신데도 제 글에 애정을 가지고 봐 주셔서 감사해요!!
 
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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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왜 저런 거창한 제목을 달았을까.  

 나는 저 소설을 꼼꼼히 읽었다. 

 저 소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사실주의적 서술 방식의 미덕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서 

 빠르고 쉽게 읽을 수 있고, 젊음이 가지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가슴 뛰게 긍정할 수 있게 하면서, 엄혹했던 이승만 독재시절과, 군부독재 시절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 후루룩 두리뭉수리하게 잘 서술한 것이 탁월했던 소설이었다. 

그래서 좋았느냐는 평가는 우선 보류하기로 한다. 

 그래서 재밌었으면 다 아니냐는 평가도 일단 보류하기로 한다. 

 나는 저 책을 보는 이들이 함께 보았으면 하는 책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떠올렸다. 

재미로만 소설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비슷한 인물, 성장이라는 비슷한 주제 의식의 저 소설은 [개밥바라기별]과 비교해서, 그 정신적인 배경과, 주변세계의 폭력성을 살피는 일은 단순히 한일간의 문화를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내면풍경에 대해 잘 들여다볼 필요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 인물은 똑같이 타인들을 웃김으로 해서 타인들에게 호감을 사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개밥바라기 별- 이하 개밥]의 주인공이 약간은 위악적이며 과시적이인 유머를 구사하는 반면, [인간실격--이하 실격]의 주인공은 자기 혐오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든 남성다움과 강함을 요구하는 바깥세계와 불화하는 자신의 내면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기 위한 위장용으로 유머를 사용한다. [개밥]의 주인공이 주변 세계 속에서 꼿꼿하게 자신의 강함을 잃지 않으면서 세상 속에 제대로 욱여들면서 잡고 휘두르지 못해 안달하는 반면,[실격]의 인물은 끝없이 자신을 은폐 시키면서 폭력적 세계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는 자폐적인 성향을 드러내 보인다. 언뜻 보기에 [개밥]의 주인공은 외향적인 듯이, [실격]의 인물은 철저하게 내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춘기 청년이었던 그들의 내면이 그렇게나 달랐을까을 질문해보면 아니라는 답이 떠오른다.  

단지 [개밥]이 황석영 작가의 자전적 성격의 소설이라면, 노작가가 자신의 청년시절을 호기롭게 그려내고 있으며, 자기의 영향력을 충분히 즐기면서 쓰고 있다는 인상과 

[실격]의 인물이 중년에 채 접어들지 않은 나이에 자살에 성공해, 폭력적인 세계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진 작가의 나중 모습이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둘은 어떻게 다르며,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두 소설은 사회의 폭력성에 의해 고뇌하는 인간군상들의 삶의 조건을 보여주고 있다. [실격]에서는 가부장적인 집안분위기와 남성위주의 강함과 사무라이 정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일본 남성들의기대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남자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인간의 내면은 누구나 약하리라고 생각한다. 단지 사회의 요구에 의해 길들여질 뿐이다. 그에 순응해서 강한 흉내를 제대로 내고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나뉘는데, [실격]의 주인공은 순응하지 못해 시대와 불응하고, 스스로 몽환적인 골방 속으로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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