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품절


  이만큼 나이가 들고 보니 쓸 수 있는 말보다 쓸 수 없는 말들이 많아진다. 

 잘한 일보다 못한 일들이 앞을 먼저 막아선다. 

이렇게 비겁해지는가 보다 

한 때 겂없이 설치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무시하려 할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런 눈 그런 마음의 자를 버리지 않고 있다 

사회는 부조리하기 때문에 나의 반항심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만큼 나이가 들고 보니 나의 반항심이 타인의 반항심으로 돌아오고 있다 

거기에 대항하고 억누르기가 어려워 

매일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 

항상심을 갖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들뢰즈가 말했다. '나는 시간에 의해 분열되어 있다'고, 

맞는 지는 모르겠다. [차이와 반복]을 읽고 나서 남은 것은 저 한 문장이다.  

나는 시간에 의해 분열되어 있다.  

과거의 나와 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는 같지 않다. 

다 다르다 

다른 시간 속에 수많은 나들이 공존하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수없이 많아진 나들의 간섭으로 인해  

매순간 흔들리고 반성하고, 고정될 수 없고, 확고 할 수 없어서 

판단해야할 순간을 보류해버리는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이래서 나이가 들면 단순해지나보다 

순간에 자신을 맡겨 버리고, 

단순함과  

순간의 득에 이끌려 나는 보수화되고 있다. 

나는 어느순간 골수 보수가 되어가고 있다. 

꼴통 보수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지금 나의 공부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철저하게 시간 속에 분열되어 있는  

마르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화자는 어쩔 때는 이렇고, 저쩔 때는 저렇다.  

일관성을 갖고 있지 않고 변덕스럽고, 

일상을 쫓는 집요함이 지나쳐 

 뭐 이런 쫌생이 아저씨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좀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 깊이 들어가서 

매순간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매순간 계산하고 따지고 이렇게 판단하고 저렇게 판단하는 순간 속에서 

선택을 하는 인간이 있다. 

이 소설이 위대한 것은 

작가가 자기 자신에게 솔직했다는데 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저리가 쳐질만큼 솔직하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자기 내면의 부조리를 심하게 따지거나  

그 근원을 밝히려 애쓰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나는 것을 통한 판단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단순성이 있기 때문에 

이런 소설을 어렵다고 말한다. 어렵다고 판단하고 조금 읽고 던져버리려 한다.  

그리고 연신 내뱉는다. 어렵다고, 단번에 읽혀지지 않기 때문에 단번에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살피고 살펴봐야 하고 집요하게 화자의 생각을 따라가야하고, 그의 혼란상에 동참해야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어렵다는 말을 이럴 때 써야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화자는 자신의 내면에 충실했고, 

그 내면을 최대한 글로 옮기려 애를 썼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적확한 묘사와 감정으로 인해 감동을 주고 

어떤 부분은 그 사유의 일관성의 상실로 인해 독자에게 실망을 준다. 

나는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난감함을 느낀다. 이 책 좋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답을 할 때 망설인다 

좋기도 했고 나쁘기도 했고 

혼란스럽기도 했다고,  

어떤 책은 재미있었다. 선굵은 서사를 따라가니 좋았고, 이해하기 편했다. 그래서 좋았다. 

어떤 책은 서사를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문장이 남았다. 

그 아름다운 문장에 내 영혼이 들렸다. 그래서 좋았다.  

하지만 들으려는 사람은 좋았다 나빴다에 중점을 둔다.  

좋고 나쁨의 강도와 그 이면에 관심이 없다 

나도 그랬다. 

모든 것에 문외한이었지만 책이 보고 싶었을 때 

책을 읽는 즐거움을 갖고자 했을 때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렸고, 

적어도 베스트셀러는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더이상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리지 않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베스트셀러를 경시하게 되는 경향까지 생겼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된 것에 만족한다. 

나는 나만의 책을 읽고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려 한다. 

그리고, 

그 솔직함으로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위대한 마르셀과 

좀생이 병자 마르셀 

섬세한 사랑에 고통스러워하는 마르셀 

주변사람들을 면밀히 살피고 

그들의 목소리를 감정상태를  

온전히 되살려보려는 마르셀을 모두 보여준다. 

비록 마르셀이 어떤 귀족성, 

어떤 부르조아성, 

어떤 속물성을 버리지 못한 보수주의자처럼 보일 망정 

비록 마르셀이 

어떤 가부장성 

어떤 억압성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나는 그를  

나는 그의 욕망을 존중할 마음이 생겼다. 

그가 그의 주변사람들을 복잡하게 

이해하려 애썼고, 

그 이해의 노력이  

흔히들 읽기 어려운 책이라 말하는 

이 책에 담겨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다시  말하고 싶다. 버지니아 울프든 마르셀 프루스트든 제임스 조이스든 

함부로 어렵다고 말하지 말았으면 

그의 문장을 온몸의 세포로  

받아들이고, 

이해해 보려 노력하지도 않고 

섣불리 어려워서 접근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말았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ude the Obscure (Paperback, 2)
Hardy, Thomas / W W Norton & Co Inc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 Rewritihg 군요. 다시쓴 것은 다시 썼다고 정확히 나와 있으면 좋겠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흑인 청년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읽을 만한 선입견 없음이 과연 가능하냐고 묻는다. 흑인청년의 정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읽을 능력이 있는 지 묻는다. 백인에게 백인이 주인공인 영화를 오랜 세월 보아온 입장으로 흑인 주인공과 나를 일치 시키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색함이 읽는 내내 거리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속도감 있게 읽지 못했다. 적나라한 육체에 대한 묘사와 그리 어려울 것 없는 내용이었음에도 쉽게 책 속의 글자를 따라가지 못한 이유는 이미 전제된 인종적 편견의 소치는 아니었느냐고 ..... 왜 하필 백인 소녀였느냐고, 그런 이분법이 흑인차별에 대한 아무런 답을 주지는 못할 거라고. 나 자신 말하면서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 안에 있는 인종차별적 사유와 싸우느라 책에 몰입하지 못했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 흑인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어야 하는 지도 모른다. 이건 물리력에서 몹시 딸린다. 영화중 흑인이 주인공이 영화를 과연 몇 개나 보았느냐는 질문과, 그런 저급한 수치화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 무의식을 관장하지 못한다는 답을 하겠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루쉰P 2010-10-1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훗 저도 요즘 다시 서재를 오픈하고 있습니다. 근데 사자님은 9월에 이렇게 리뷰를 써 주셨네요.ㅋㅋㅋ 여전히 조용하고 고독한 서재의 분위기가 풍기네요. 전 지금 엄청나게 일을 열심히 하고 있어서 정신이 나가 버릴 판입니다.
이공계의 달인이 되고 있다고 할까요? ^^;; 암튼 사자님의 글도 자주 봤으면 합니다. 항상 바쁘신데도 제 글에 애정을 가지고 봐 주셔서 감사해요!!
 
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왜 저런 거창한 제목을 달았을까.  

 나는 저 소설을 꼼꼼히 읽었다. 

 저 소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사실주의적 서술 방식의 미덕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서 

 빠르고 쉽게 읽을 수 있고, 젊음이 가지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가슴 뛰게 긍정할 수 있게 하면서, 엄혹했던 이승만 독재시절과, 군부독재 시절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 후루룩 두리뭉수리하게 잘 서술한 것이 탁월했던 소설이었다. 

그래서 좋았느냐는 평가는 우선 보류하기로 한다. 

 그래서 재밌었으면 다 아니냐는 평가도 일단 보류하기로 한다. 

 나는 저 책을 보는 이들이 함께 보았으면 하는 책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떠올렸다. 

재미로만 소설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비슷한 인물, 성장이라는 비슷한 주제 의식의 저 소설은 [개밥바라기별]과 비교해서, 그 정신적인 배경과, 주변세계의 폭력성을 살피는 일은 단순히 한일간의 문화를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내면풍경에 대해 잘 들여다볼 필요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 인물은 똑같이 타인들을 웃김으로 해서 타인들에게 호감을 사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개밥바라기 별- 이하 개밥]의 주인공이 약간은 위악적이며 과시적이인 유머를 구사하는 반면, [인간실격--이하 실격]의 주인공은 자기 혐오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든 남성다움과 강함을 요구하는 바깥세계와 불화하는 자신의 내면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기 위한 위장용으로 유머를 사용한다. [개밥]의 주인공이 주변 세계 속에서 꼿꼿하게 자신의 강함을 잃지 않으면서 세상 속에 제대로 욱여들면서 잡고 휘두르지 못해 안달하는 반면,[실격]의 인물은 끝없이 자신을 은폐 시키면서 폭력적 세계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는 자폐적인 성향을 드러내 보인다. 언뜻 보기에 [개밥]의 주인공은 외향적인 듯이, [실격]의 인물은 철저하게 내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춘기 청년이었던 그들의 내면이 그렇게나 달랐을까을 질문해보면 아니라는 답이 떠오른다.  

단지 [개밥]이 황석영 작가의 자전적 성격의 소설이라면, 노작가가 자신의 청년시절을 호기롭게 그려내고 있으며, 자기의 영향력을 충분히 즐기면서 쓰고 있다는 인상과 

[실격]의 인물이 중년에 채 접어들지 않은 나이에 자살에 성공해, 폭력적인 세계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진 작가의 나중 모습이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둘은 어떻게 다르며,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두 소설은 사회의 폭력성에 의해 고뇌하는 인간군상들의 삶의 조건을 보여주고 있다. [실격]에서는 가부장적인 집안분위기와 남성위주의 강함과 사무라이 정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일본 남성들의기대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남자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인간의 내면은 누구나 약하리라고 생각한다. 단지 사회의 요구에 의해 길들여질 뿐이다. 그에 순응해서 강한 흉내를 제대로 내고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나뉘는데, [실격]의 주인공은 순응하지 못해 시대와 불응하고, 스스로 몽환적인 골방 속으로 파고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ree Food for Millionaires (paperback)
Min Jin Lee 지음 / Hutchinson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다음이 궁금해서 책장을 계속 넘기게 되다니 그것도 원서를... 그것은 정서적 공감대가 비슷하기 때문에 더 쉽게 읽어나간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자유와 방종이 판치는 나라에 가서도 딱 그 틀에서만 살아가야 했던 앞세대 부모들의 판에 박힌 고단하고 악착같은 삶은 이곳이나 그곳이나 달라보이지 않았다. 그에 비해 싸가지 없이 자기 중심으로만 사는 케이시 한이란 인물은 낯설었지만 또 그럴 법 했다. 그녀의 사랑 이야기에 아주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그럴 법한 삶에 대한 이해는 또 할 수 있었다.

 엘라 심의 인생 또한 케이시의 엄마의 삶이 될 뻔한 데서 구원 받는다. 엘라의 삶은 케이시 엄마의 삶과 달라보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없었다. 성격이 비슷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따뜻한 아버지와 새로운 연인에 의해 구원 받는다.

곳곳에 담긴 희망의 메세지가 약간은 억지스런 설정은 아닌가 의심하게 했다. 케이시에게 아내가 썼던 모자를 남긴, 노인의 이야기와, 엘라의 미모에 혼자서 마음을 끓이기만 했던 직장 동료에 대한 이야기, 의심스런 아내를 묵묵히 보아주던 과묵한 한국사람의 성정을 보여주던 케이시의 아버지. 과하지 않았다. 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범했을 지도 모른다.

 미국이란 나라에서 살면서도 한국사람들의 정체성을 하나도 버리지 않은 사람들. 그들의 삶이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너무나 한국적인 내면을 하고 있었다는데 이물감이 들었다. 그들이 만든 한인사회가 눈에 환하게 그려졌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과도하게 의지해서 한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어 미국 사회에 제대로 욱여 들기도 어려웠던 그들의 폭폭한 삶이 이해가 가면서도 그들의 폐쇄성이 한없이 답답해 보이는 것은 내 앞세대와는 어쨌든 다른 환경에서 자란 자의 관찰정도에 그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 비하면 아직은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아보이는 작가의 눈이 넓고, 또 넓어 보인다. 아직 깊이는? 모르겠다. 그건 순전히 작가의 노력에 달려 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