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 싶다
SBS그것이알고싶다 제작진 / 엘릭시르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별로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 늘 그 자리에 있던 방송 프로그램을 책으로 엮은 것이니 하루도 걸리지 않아 뚝딱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1000회까지 달려온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였으며 나의 이야기였기에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SBS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를 처음 방송했을 때, 저는 그 방송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제주에선 SBS를 볼 수 없었거든요. 1992년 3월의 이야기입니다. 1992년이라고 하니 사건이 하나 떠오르는군요. 혹시 1992년 휴거 소동을 아시나요? 저는 휴거라는 이야기를 아버지 친구분으로부터 처음 들었었습니다. 당시에 사극 악역으로 출연하거나 농촌 취재 리포터로 활동하시던 분이 제주에 온 김에 집에 들러 휴거 이야기와 참고 자료, 사진들을 보여주더군요. 아버지께서는 신기해하시면서 저에게도 어떠냐 어떠냐 하셨습니다. 친구분이 떠난 후 아버지께 사진은 신기하지만 그 외에는 별로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씀드렸고, 1992년 그날, 휴거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24회 그리고 237회에 이 사건을 다뤘었지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뤘던 사건들로 인해 지난 세월 동안 많은 것이 변했거나 변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이 진행형이어서 개운하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좀 더 나은 세상, 범죄자가 판치지 않는 세상, 살기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의 알 권리를 챙겨주는 그것이 알고 싶다.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더군요. 진행자만 하더라도 문성근에서 정진영, 그런데 말입니다의 김상중. 중간에 오세훈 변호사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제목만 떠올려도 김상중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모가지의 위태위태함을 감수하면서도 열심히 취재해왔던 PD, 작가, 스태프들이 있었기에 이 프로그램은 1000회가 넘도록 사랑받았다고 생각합니다.

1000회를 기념하면서 엘릭시르 출판사와 함께 제작한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책은 주요 사건들을 테마에 맞게 연결해서 엮어두었습니다. 진행자의 인터뷰도 있었는데요. 인터뷰 형식의 글을 불편해하는 저조차 읽기 쉽도록 잘 편집되어 있었습니다. 엘릭시르와 미스터리아에게 수고하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각 챕터에 전문인 및 피디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표창원, 이윤민, 이수정, 배정훈, 박준영, 고상만등의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객관적인 본문과 주관적인 내용 모두를 함께 하며 나 스스로도 생각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책 말미에는 <그것이 알고 싶다> 1000회 방송 목록이 적혀있었습니다. 모든 사건이다. 짧게 요약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좋은 일보다는 아프고 슬픈 일들이었지만요. 

어서 <그것이 알고 싶다>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우리에게 계속 알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전, 그것이 알고 싶으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물농장 : 어떤 동화 세계문학의 숲 19
조지 오웰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엔 모두가 다 함께 잘 살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속박하고 억압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농장주만 없어지면. 공동생활을 하면서 생산물과 이윤을 나눈다면 서로를 의지하며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 이후로 지배층이 없는 생활은 해 본 적이 없기에, 누군가 모두를 통제해야만 했습니다. 파파 스머프처럼 지혜롭게 다독이며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건 만화에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 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조지 오웰의 우화 속에서도모두가 평등하고 아름다운 세상은 만들 수 없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네. 다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행동 방식 모두를 증오하는 것이 여러분의 의무라는 걸 절대 잊지 말게. 두 발로 걷는 건 뭐든 다 적이야.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들은 다 친구고. 또한 인간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닮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게. 인간을 타도한 후에도 인간의 악덕을 받아들여서는 안돼. 어떤 동물도 집에서 살거나 침대에서 자거나 옷을 입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돈을 만지거나 장사를 해서는 안되는 거야. 인간의 습성은 모두 악한 걸세.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에게 군림해서는 안 되네. 약하건 강하건, 영리하건 단순하건 간에 우린 모두 형제들이야.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되네. 모든 동물은 평등한 거야."

-p.14


나이 많은 돼지 메이저 영감은 인간인 존슨이 운영하는 매너 농장에서 노동을 강요당하는 동물들을 구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멋진 연설 후 그들에게 '영국의 동물들'이라는 노래도 가르쳐줍니다. 그 노래와 연설은 동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고, 그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정말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존스를 몰아내고 농장을 차지합니다. 모두 행복해했지요. 자 이제 평등하게 공동생활을 하게 되는데요. 이른바 동물주의에 입각해 평화롭게 살기로 합니다. 좀 더 효율적인 농장 운영을 위해 그나마 글을 알고 영리한 축에 속하는 돼지들 - 스노볼, 나폴레옹, 스퀼러 - 가 그들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다 함께잘 되자고 하는 일이니까 모두 기꺼이 돼지들을 따릅니다. 그러나 조금씩, 상황이 이상해져갑니다. 우유도, 사과도 돼지들이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설마 우리 돼지들이 이기심과 특권 의식으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사실 우리 중에는 우유와 사과를 싫어하는 돼지들도 많습니다. 나부터도 싫어한다고요. 우리가 이걸 먹는 목적은 오로지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유와 사과에는(이건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동지들) 돼지의 건강에 꼭 필요한 요소들이 들어있어요. 우리 돼지들은 정신노동자입니다. 이 농장을 경영하고 조직하는 일이 모두 우리에게 달려 있어요. 우린 밤낮으로 여러분의 안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유를 마시고 사과를 먹는 건 다 여러분을 위해서예요. 우리 돼지들이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압니까? 존스가 돌아올 거라고요! 그렇고말고요, 동지들."

-p.36


순진한 동물들은 착취를 당하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농장을 위해 일을 합니다. 열심히 일할수록 '반드시'풍요로워질 테니까요. 한편, 돼지들 사이에서도 다툼이 일어납니다. 동물들로부터 농장을 재탈환하고자 했던 인간들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훈장을 받은 스노볼은 나폴레옹과 이념 갈등 - 특히 풍차 건립 때문에 -을 겪고 축출당합니다. 나폴레옹은 이 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강아지들을 매섭게 훈련시켜 자신의 군대로 삼고 있었거든요. 스노볼의 추방 이후로 농장의 모든 잘못된 일은 모두 스노볼의 짓으로 소문을 냈고, 돼지들은 그럴싸한 말로 동물에게 강제노동의 굴레를 씌웁니다. 돼지들은 메이저 영감이 하지 말라고 한 모든 것들을 어깁니다. 그리고 절대권력자들이 행하는 모든 짓들을 그대로 따라 합니다. 자아비판 후 자살, 혹은 처형까지. 돼지들에게 불가능한 것들은 없었습니다.


길지도 않은 소설을 읽던 매 페이지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어쩜 이리도 내가 아는 것들과 닮아있는지.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 북한의 이야기와도 닮아있었고, 소련의 이야기와도 닮아있었습니다. 세치 혀에 놀아나는 동물들이 어리석어 보였습니다.(돼지 혀는 더 길던가요?) 당근이 되었던 채찍이 되었든 간에 이것저것을 주워 먹으며전보다 못한 생활을 하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충성을 다했지만 결국 그 시신마저도 돼지들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되고 마는 동물의 모습에 분노했습니다. 세대가 바뀌어 이렇게 사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동물들을 생각하면 더 답답합니다. 그게, 소설 속의 동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더 화가 납니다. 이 이야기는 20세기의 이야기이며, 21세기에도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시대가 흘렀으니 조지 오웰에게 "당시엔 그랬군요. 지금은 그렇지 않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몇몇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종종 챙겨보는 TvN의 비밀 독서단에서 '은밀하고 위대한! 시대의 금서'편을 하더군요. 읽어본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이 있었는데요. 뭔가 찔리는 사람들이 금서로 정했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편견에 의해 금서가 된 책도 있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금서가 된 경우가 많아서 좀 씁쓸했습니다. 누가 자신들을 쿡쿡 찔러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있구나. 비밀 독서단에서 소개한 금서 중 1위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피책 - 당신이 쓰는 모든 글이 카피다 카피책 시리즈
정철 지음, 손영삼 이미지 / 허밍버드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저는 읽은 책의 대부분을 리뷰합니다. 

처음부터 리뷰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에는 플래그와 독서메모용 노트, 볼펜, 책갈피를 반드시 옆에 끼고 있습니다. 편안히 읽어도 좋을 것을 뭘 그리 유난 떨며 읽느냐 하시겠지만, 기억력이 예전 같지가 않아요. 책을 많이 읽어 뇌를 활발히 굴리면 치매 예방도 된다던데 저에게는 해당 없음인가 봅니다. 메모도 해야 하고, 플래그도 붙여야 합니다. 책에 직접 적어두시는 분들도 있는 걸로 아는데요. 학교를 졸업 한 후, 책에 글을 적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는 저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책을 읽다가 자리를 옮길라치면 모든 도구들이 함께 이동합니다. 제 가방에 파우치가 없는 날은 있어도 필통과 노트가 없는 날은 드뭅니다. 그 안에 책이 없을 때라도요.


메모와 플래그를 확인하며 리뷰 초고를 작성하거나 말하자면 콘티 같은 것을 짜봅니다. 술술 써지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합니다. 그래서 정수리에 탈모가 있나 봅니다. 이 책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싶은 책은 차라리 낫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고 나면 어느 정도 길이 보이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정말 골치 아픈 건,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는 책입니다. 작가가 의도한 바가 아니더라도 제 스스로의 인생과 평소의 마음가짐 때문에 이야기가 마구 쏟아지고 감상이 흘러내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한두 줄기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과도한 곁가지가 저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해야 할까. 이것저것 생각이 났다고 해서 그 모든 걸 글에다가 쏟아버리면 그냥 흙탕물이 되고 말 겁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몇 가지의 이야기만 자연스레 연결되게 글을 써야 합니다. 대실패를 하고 마는 글도 있지만 그렇게 글을 쓰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30년째 저를 괴롭히고, 저는 글을 괴롭힙니다. 마크 트웨인은 "우리는 가지고 있는 열다섯 가지 재능으로 칭찬받으려 하기보단, 가지지도 않은 한가지 재능으로 돋보이려 안달한다."라고 말했는데요. 저한테 하는 말인가 봅니다. 글쓰기는 저에게 그런 녀석입니다. 애증의 관계죠. 말을 잘하는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질투 나고요. 긴 문장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샘이나 그 능력을 가로챌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하물며 짧은 문장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쇼트-쇼트의 대가 호시 신이치는 한두 페이지짜리 단편을 쓰는 능력자였습니다. 어쩜 이렇게 짧은 소설 속에 그의 SF, 판타지가 들어 있을 수 있을까. 위트는 또 어떻고. 

그런데 호시 신이치보다 더 짧은 문장으로 사람의 눈과 마음을 가로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카피라이터죠. 우연히 마주한 문장을 보고 '아니 도대체 누가 이런 재치 있는 글을 쓴 거야?'라며 질투합니다.


우리나라 대표 카피라이터 정철의 <카피책>을 읽었습니다. <카피책>을 읽고 그의 능력을 카피할 테다!라는 포부를 가지고요.

췟. 카피는 무슨 카피. 못하겠어요. 저는 아직 이 단계에 이르를 수 없습니다. 그도 아날로그고, 나도 아날로그인데 왜 그는 되고 나는 안되는 걸까요? 그는 <내 머리 사용법>을 쓴 사람이고, 나는 읽지도 않은 사람이기 때문일까요. 아마도 생각과 생각의 분할 방식이 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카피책>을 읽다말고 그의 능력을 훔치고자 온라인 서점에 접속. <내 머리 사용법>을 북카트에집어넣었습니다. 다음에 지름신이 내려오시면 질러주겠노라고 다짐하면서요. <카피책>은 초반부터 저를 웃게 만들고 안달복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이 모든 게 내 것이 되는 게 아닌데도요. 이 책은 굉장히 재치 있습니다. 재치 있는 사람과 몇 시간을 함께 있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피곤했습니다.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짧은 시간 동안 그의 30년 카피 라이프를 훔쳐내는 게말이 되나요? 천천히 다시 함께 해야겠습니다. 카피를 쓸 생각은 없어요. 다만 짧은 문장에 의미를 함축하는 법을 알고 싶고,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런 문장을 만들고 싶고, 피식 웃음이 나오게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정말이에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물관의 뒤 풍경
케이트 앳킨슨 지음, 이정미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저희 아이가 사랑의 빵 동전 모으기를 한다는 말에 집안의 동전을 모아서 건네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할머니의 동전 주머니를 끄르던 아이는 1967년에 발행된 10원짜리 주화를 발견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저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 동전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거쳐 우리에게 왔을까요.


 

처음엔 지금과는 다른 대접을 받으며 행복했겠죠. 60년대 10원짜리의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높아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1963년엔 라면 한 봉지가 10원이었거든요. 이 돈을 건네받으며 라면 한 봉지를 내어준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가난한 살림에도 아이에게 고기 비슷한 걸 먹여보려고 아이 손에 도로 10원을 쥐여주며 나가서 번데기를 사 먹으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는 기쁜 얼굴로 번데기 장수에게 그 돈을 주고 간식을 먹었겠지요. 저보다 연상인 이 동전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서 저를 만났습니다. 어쩌면 우린 구면인지도 몰라요. 생명이 없는 것이지만 어쩐지 반가운걸요. 이 동전은 저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요. 물건이 무언가를 기억한다거나 뜻을 품는다는 개념은 일본의 정서 같기도 한데, 꼭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물관의 뒤 풍경>에 등장하는 행운의 부적 '토끼발'은 정말이지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프레더릭이 놓은 덫에 걸린 토끼를 요리하기 전, 레이철은 부적으로 삼기 위해 다리를 잘라둡니다. 토끼발은 기원전부터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이었으니까요. 여전히 부적으로서, 행운의 상징으로서 팔리고 있다니 신기하죠? 아무튼 레이철은 자신이 장만한 토끼발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후대에까지 - 비록 의붓자식의 후대이지만 - 이어질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을겁니다.  이 토끼발은 레이철의 손을 떠나 넬 - 잭 - 프랭크 - 클리퍼드 - 그리고 번티에게까지 이동하는데요. 번티의 딸 퍼트리샤가 정원에 묻어줄 때까지 주인을 수호합니다. 단지 주인을 떠나 다른 이에게로 갈 때면 본래 주인의 모든 운을 빼앗아버려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하게 만들었지만요.


토끼발 이야기를 먼저 하긴 했지만, 이 책은 '토끼발'이나 '부적'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박물관' 큐레이터의 속사정 같은 이야기도 아니고요. 이야기는 한 아이, '루비'의 출생, 아니 생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 내가 생긴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여는 루비는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1인칭 전지적 시점입니다. 신도 아닌데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루비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자기 언니 질리언이 1959년에 어떻게 죽는지까지 알고 있습니다. '생긴'날에요. 우리에게 벌써 그 이야기를 해주거든요. 루비는 모르는 것이 없는 아이입니다.증조모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엄마나 할머니조차 모르는 세세한 부분들까지도요.


"영원히 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퍼트리샤. 모든 건 다 어딘가에 있어. 핀 하나하나까지도 다."

"핀?"

"내 말 믿어도 좋아, 퍼트리샤. 난 세상의 끝까지 갔다 왔거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 갑자기 바람이 쌀쌀해지자, 우리는 코트 깃을 세우고 서로 팔짱을 끼면서 고이 잠들어 있는 망자들 사이로 조심스레 발길을 옮긴다.

-p.534


그러나 다른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만은 모르고 있습니다. 몇 번이고 그녀의 엄마가 복선을 던져주었었는데도 말이죠. 그녀는 전혀 알지 못 했습니다.


"우린 왜 여태까지 이 얘길 한 번도 안 한 거야?" 나는 번티의 침묵이 두려웠다. 그 침묵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몰랐으니까. 마침내 번티가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네가 잊어버렸어."

"내가 잊어버렸었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내가 잊어버렸었다는 게?"

-p.462


루비는 작품 전체를 아우를만큼의 커다란 미스터리를 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안고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4대에 걸친 여러 가지 미스터리들이 나타났다 해결되고 사라집니다. 아마 다른 이들은 죽을 때까지도 진실을 몰랐을 겁니다. 저도 루비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몰랐거든요.


이 작품은 독자의 각기 다른 상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세밀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나의 첫날! 뮤지엄 가든의 모든 나무에 새잎이 돋기 시작하고, 번티의 머리 위 높은 하늘은 완연한 파란색을 띤다. 만일 어머니가 손을 뻗는다면(물론 안 그러겠지만) 하늘을 만질 수도 있을 텐데. 아기 양처럼 보송보송한 하얀 구름들이 서로 포개져 있다. 우리는 콰트로첸토의 천국 속에 있다. 새들이 짹짹거리며 쏜살같이 내려와 우리 머리 위에서 정신없이 춤을 춘다. 천사의 축소판인 조류 가브리엘들이 수태고지를 하려고 작은 날개 근육을 파닥이며 전속력으로 나의 도래를 외치러 왔도다! 할렐루야!

-p.25


초반에는 이런 문학적이고 세세한 묘사를 따라가지 못해 진도가 나가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등장인물들. 맨 뒤에 친절하게도 그려준 가계도를 메모 노트에 옮겨 그리고 부연 설명을 첨가해나가면서 읽어야만 했습니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 비록 '주'의 형태로 따로 처리했다지만 - 루비의 서술은 한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찬 듯 저를 느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고 오름을 오르듯 천천히 꾸준히 걸을 수밖에 없었지만 150페이지쯤에서 그 정상에 도달, 드디어 모든 풍경이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구름과 안개에 가려진 부분은 제외하고요. 그것들은 페이지를 거듭하며 서서히 걷혀나갑니다. 책의 제목은 <박물관의 뒤 풍경>이지만 저에겐 <오름 위 풍경>이었습니다.

 인생의 부분만 보았을 때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보았을 때는 놀랍도록 미스터리 한 부분들이 숨어있고,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이 다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책에 나오는 어머니들과 아이들은 서로에게 불친절합니다. 어쩌면 저럴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요. 그것이 사랑의 한 형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지만 결국 그 판단 자체를 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책에 달린 주석이 꽤 많습니다. 읽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본문 중에 아니라 권말에 실려있어 독서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석을 뒤적이고 있는 저를 발견할 때면 자신의 비상식에 슬퍼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이 빛나는 밤
지미 리아오 글.그림, 김지선 옮김 / 씨네21북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동양의 장 자끄 상뻬라고 불리는 지미 리아오의 <별이 빛나는 밤>을 읽었습니다. 

표지만 보고서 재미있는 동화책인가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요.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읽었을 때보다 더 푹 잠겨버렸습니다. 재미있고 가볍게 읽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이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있지만 외로운 소녀는 상상력으로 그 외로움을 대신합니다. 선물 받은 아기 고양이도 커다란 고양이가 되어 자신과 함께 할 수 있었고, 어릴 적 함께 살았던 할아버지가 보내준 장난감 코끼리도 커다란 코끼리가 되어 함께 합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그 외로움이 더욱 깊어지져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숨어듭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창밖으로 보이는 이웃집 할머니의 지붕에서 한 소년을 발견합니다. 

그 소년도 소녀만큼이나 자신을 표현할 줄 몰랐고,

무리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소녀는 새장 안에 갇혀있는 아이였고,



소년은 미궁 속에 갇혀있는 아이였습니다. 그는 바다와 물고기를 사랑했죠.



어느 날을 계기로 두 아이는 서로 가까워졌고,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사이가 됩니다. 




둘은 별이 빛나는 밤을 사랑했고 바다의 물고기를 사랑했습니다. 언젠간 그런 것들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림이 있는데도 상상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차분한 소녀의 목소리가 마음속으로 직접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가 잔잔하게 서성이다가 느닷없이 폭발하고 마는,

그런 감정을 느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