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고 말해 스토리콜렉터 52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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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안하다고 말해."
이 말이 추악하게 들린 건 처음입니다.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 법이지만, 완전한 복종과 사육을 위해 사용하다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소녀는 생존을 위해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하다, 가엾은 사디스트 자식아. 정말 미안해. 그때 눈을 제대로 지르지 못해서, 미안해. 벽돌로 네놈의 머리를 완전히 박살 내지 못해서, 미안해. 네 눈알을 뽑아내지 못해서. 나는 이렇게 외쳐대고 싶지만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나는 공처럼 몸을 웅크린다.
-p.548

조 올로클린 시리즈 중 북로드 스토리콜렉터의 책으로는 세 번째로 소개된 <미안하다고 말해>는 원작 시리즈로는 여섯 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혹시 나중에 순서가 뒤바뀌어 앞쪽의 작품이 다음 순서로 출간될는지 어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되도록 순서대로 나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두 편의 소설 <산산이 부서진 남자>, <내 것이었던 소녀> 모두 충격적이며 스릴 넘쳤고, 작품 속에 독자를 잡아두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지만, 이번의 <미안하다고 말해>는 그 힘이 가히 폭발적이라, 책을 펼치고 첫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내 이름은 파이퍼 해들리다. 그리고

나는 3년 전 여름방학의 마지막 토요일에 행방불명되었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고, 도망친 것도 아니었다. (중략)
나는 계속 여기 있었다. 
-p.9

이 첫 대목은 책의 맨 마지막 부분과 딱 맞아떨어져 가슴 한 켠이 찡 해옴을 느꼈습니다. 

소설의 화자는 둘입니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조 올로클린과 납치된 소녀 파이퍼. 심리학자인 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에 개입하며 추리해나가고, 파이퍼는 회상록을 쓰듯이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기록해나갑니다. 그 끔찍했던 시간들을 하나씩 하나씩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씁니다. 그녀의 종이 위에 적힌 것들은 지옥이었습니다.


현실 속 공포는 상상 속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한때 나는 축제 마당의 탈것들을 좋아했다. 높이 올랐다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그런 공포는 즐길만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공포에는 긍정적인 면도, 해피엔딩도 없다.
-p.327


조 올로클린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경찰의 요청에 농장 부부 방화 살인 사건에 대한 프로파일링 및 용의자에 대한 심리 분석을 합니다. 무죄 추정이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용의자는 벌써 피의자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수사 결과 그의 행적과 농장의 방문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얽혀있음을 알게 됩니다. 3년 전 두 명의 소녀가 실종된 사건이었는데요. 그중 한 명의 학대당한 시신이 발견되어 경찰도, 조 올로클린도 3년 전의 사건을 추적합니다. 소녀 실종 사건에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는 한 남자의 열등감과 비뚤어진 욕망이 바닥에 깔려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멀쩡하며 타인에게 의심을 받을 건더기가 전혀 없는 이 남자는 두 소녀를 납치하여 3년 동안 자신의 집에 감금하고 학대를 일삼아왔습니다. 태쉬는 남자로부터 파이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린 소녀에게는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집에서 탈출하여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지만, 결국 얼음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파이퍼는 태쉬를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배고픔보다 추위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태쉬의 부재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장소에 또 다른 친구가 오는 건 더 싫었습니다. 태쉬가 안전하기를, 자신을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 파이퍼를, 남자는 집요하게 괴롭히고 협박했습니다.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안하다"라고 말하라며.

파킨슨병 1기를 앓고 있는 조 올로클린은 약물로 병세 진행을 늦추고 있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는 몸뚱어리 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딸 찰리 또래에 납치된 두 소녀를 생각하면 쉽사리 사건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추리와 프로파일링을 하며 점점 진상에 가까워지는 올로클린.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어른들의 사정도 알아버렸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나머지 한 소녀, 파이퍼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미안하다고 말해>는 앞의 두 작품과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조 올로클린은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 기드온 사건으로 인해 아내와 멀어지고 별거하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이 좀 더 산뜻해 보입니다. 불편하게 얽혀있던 이런저런 복잡한 것들에서 조금 해방이 되어서 그런 걸까요. 지금의 그라면 파킨슨병 따위가 자신을 좀먹게 둘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의 그를 보면, 여전히 그에게는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아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번 소설에서 갑자기 문장이 더 잘 정돈된 것 같았는데요. 작가의 힘인지, 역자의 힘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읽기 편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다만, 같은 사람이 말하는  내용이, 연속되는 두 번의 따옴표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 자칫 다른 사람의 대사로 오독될 수 있어서 약간 성가셨습니다. 그런 사소한 부분만 제외한다면, 이 책은 대단한 스릴러입니다.
600여 페이지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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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특권
아멜리 노통브 지음, 허지은 옮김 / 문학세계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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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새롭게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열심히 키우던 캐릭터가 망캐가 되어버리면 눈물을 머금고 '에라 모르겠다. 처음부터 다시 키우자'라는 심정으로 마음에 드는 새 캐릭터를 만들어서 초보 사냥터에서 요령 좋게 사냥을 하는 - 하지만 전에 키우던 본캐 장비를 팔아 아덴은 넉넉히 챙겨두었으니 풍요로운 환경에서 열심히 필드를 누비는 그런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환경과 위치가 달라진다고 해도 사람의 본성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니 결국은 같은 삶을 반복하고 말뿐이라는 걸 깨달은 후에는 인생 리셋 같은 걸 꿈꾸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생 역전은 가끔 꿈꿉니다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리셋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주 풍요로워 보이는 사람의 인생을 내 것인 양 살 수 있다면 갈등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리셋을 꿈꾸지 않는 저라도 순간적인 갈등은 할 것 같습니다.

아멜리 노통브의 <왕자의 특권>의 주인공 밥티스트 보르다브는 자신의 발밑에 바로 그 기회가 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밤 모임에서, 낯선 사람이 갑자기 자신의 집에 들어와 죽어버린다면 망설이지 말고 택시에 올라타 병원으로 가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는데요. 올라프 질더라는 남자가 자동차가 고장 났는데, 휴대폰도 없고 근처의 공중전화도 고장 났다며 전화를 한 번 쓰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남자가 번호를 누르고 연결이 되기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쓰러지고 그대로 죽어버립니다. 이런 일이 다 있을까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상상을 시작한 공상가 밥티스트는 체격과 대략적인 인상착의가 비슷한 그의 인생을 자신이 대신 살기로 결심합니다. 지긋지긋한 회사는 때려치우고 말이지요. 시간이 흘러 시신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죽은 건 밥티스트라고 여겨질 거라 믿습니다. 

밥티스트, 아니 이젠 올라프인 남자는 '전'올라프의 신분증과 자신의 예금 잔고와 비슷한 현금이 들어있는 그의 지갑을 들고, 고장 났다던 그의 차를 몰고 멀쩡한 공중전화를 지나 그의 집이 있는 베르사유로 향합니다. 집의 동태를 살피고 멋대로 화장실을 사용한 김에 허기를 채우려 요리를 해 먹었는데요. 아, 두근두근. 저 같은 안정기 심박수 103인 사람은 당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단 침입한 남의 집에서 오믈렛을 해 먹다니요. 심지어 '전'올라프의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자연스럽고 대담하게 응대합니다. 조금은 긴장 한 것 같지만 괜찮습니다. 어쩌면 속으로는 저만큼 심장이 달음박질치고 있을지도 모르죠. 
'현'올라프는 '전'올라프의 지인인척하며 그 집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남편의 부재중에 손님이 와서 묵고 가는 일이 다반사인지 아내 역시 자연스럽게 그를 대합니다. 

그녀를 지그리드라고 부르기로 한 '현'올라프는 선임자- 전 올라프를 어느새 선임자라고 부르고 있더군요-의 모든 것을 누립니다. 그의 저택, 그의 식량, 그의 엄청나게 많은 샴페인... 선임자의 통장은 마르지 않는 샘물인가 봅니다. 지그리드가 명품 사냥을 다녀도 한도가 초과되는 법이 없는 걸 보면요.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지그리드의 옛날 성이 밥티스트라지 뭐예요. 
소름 끼치는 일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모든 것이 우연이라기엔 석연찮은 부분이 한둘이 아닙니다. 외모와 키가 비슷한 한 남자가 전날 나누었던 담소대로 그의 집에 찾아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자동차도, 공중전화도 모두 멀쩡했던 것도 이상한데, 밥티스트일적에 받았던 대량의 포도주 구매에 관한 이야기... 어쩌면 그 포도주가 올라프의 초대형 저장고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닐까요? 그냥 상표만 동일한 건지. 저 역시 이름만 만화에서 여러 번 보았던 돔 페리뇽을 이 집에서는 마음껏 마실 수 있다지만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불안한 건 불안한 거고, 이 집에는 무슨 마력이 있는지 사람의 긴장을 놓게 합니다. 

과연 선임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뭘 하는 사람이었을까요? 스파이? 대부호? 조직의 형님? 그의 아내조차 확실하게 말을 하지 않기에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저에게만 살짝 말해달라고 해 볼까요? .... 비밀인가 봅니다. 뭐, 적어도 눈사람은 아니겠죠.

<왕자의 특권>이라는 소설이 워낙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있다 보니 읽는 도중 추리소설로 착각했습니다. 올라프는 누구인가, 이렇게 타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어도 괜찮은 건가. 그만. 그런 건 그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미스터리를 꼭 풀고야 말겠다는 마음가짐으로는 이 소설을 즐길 수 없습니다. 그냥 이 상황 자체를 즐기면 됩니다. 이대로도 좋지 않은가요.

신분이나 신원을 교체함으로써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점에서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너무 심각해하지 말아요.

** 제목이 어째서 <왕자의 특권>이냐면, 부자는 빚이 많아도 여전히 부자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특권이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빚이 많을수록 더욱 대우받는다는 건데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확실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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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 (일반판)
반디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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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불안이 전염된 탓입니다.
현재는 좋지 않은 형편이라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시간이 지나가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기에 사람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그만 실수나 의도치 않았던 행동에 대한 사소한 오해로 인해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면 제 가느다란 신경은 금세 끊어져버릴 겁니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안고 살아야 하는 부당하고 부조리한 그것은 지금껏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악의입니다. 

단편 소설집 <고발>의 작가는 반디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북한 작가입니다. 그는 자신이 써왔던 소설 중 북한 내에서는 절대로 출판할 수 없었던 것들을 탈북자인 친척에게 넘겨주어 북한의 비인권적인 실상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3년 전 국내에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탈북자가 아닌 현재 북한 거주 중인 작가가 쓴 소설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이슈가 되는 바람에 이 소설에 대한 문학적인 부분이나 어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깊이 살펴볼 기회가 적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차 올해(2017년) 3월 말, <고발>을 번역해 출판한 세계 20여 국의 출판 관계자들이 함께하는 콘퍼런스가 서울에서 열린다고 하고, 새로이 다산 책방 출판사에서 책을 내놓았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보자 싶었습니다. 책이 출판된 지 불과 한 달 정도 지났을 뿐인데, 벌써 네티즌 리뷰가 많이 올라와 있더군요. 그만큼 주목받고 있는 책인가 봅니다.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땐 아련한 향수 같은 게 느껴졌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시골의 할머니 댁에 가면 볼 수 있었던 풍경 같은 것이 떠올랐거든요. 문장에서 해방 전후의 문학의 냄새도 난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향수와 분위기는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제 뇌가 보여준 허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불안했고, 슬펐고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단련된 부분도 적지 않아 어떻게든 살아가려 애를 쓰고 버텨나갔습니다. 지키고자 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가족이었습니다. 어미는 아이를,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아들은 어머니를... 곁에 두고 바라보는 것조차 힘든 환경이어도 그들은 어떻게든 이겨내려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꾹꾹 눌려왔던 것이 터져버리면, 제정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평소와 같았던 행동이 반동의 행동이라며 사지로 끌려가는 걸 보는 가족들, 성분이 고약하다며 차별받는 날들... 이런 것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요.

문학 소설 속에서 공포를 느꼈습니다. 너무나 무서워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웠던 건 '복마전'이라는 단편이었는데요. 거친 길을 걸어가는 할머니를 친절하게 승용차에 태워준 김일성과 수행원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유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다치고, 유산되는 건 몰랐던지 모른체하려고 했던 건지... 자애로우신 어버이 수령께서 한 할머니를 도와주셨다는 선전 방송이 나올 때 정말 무서웠습니다. 이런 비슷한 일은 남한에도 있지 않은가. 정도의 경중만 다를 뿐 결국 그들이 사는 것과 우리가 사는 것이 비슷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곧 털어버렸습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의 고통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며 스스로를 나무랐습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너무 무겁고 무서워서 그랬나 봅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이 떠올랐습니다. 그 우화를 확장하여 돼지들이 아닌 농장 내 다른 동물들의 상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책 <고발>의 내용과 유사할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건, 이 책의 내용이 우화도, 그저 상상 속의 디스토피아의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실을 바탕으로 쓴  소설입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작가가 소설을 쓴지 벌써 25년 정도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나아졌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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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를 지켜라
제충만 지음 / 푸른숲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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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제주에는 놀이터나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어린이 공원이 제법 있는 편입니다. 관리 상태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요. 모든 놀이터를 돌아본 것은 아니니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나름 도보로 많이 돌아다니는 제가 직접 보았던 놀이터에 한해서는 그렇습니다. 하루 종일 뛰어놀아도 좋은 놀이터에 할머니나 엄마가 함께 나와 아이들이 노는 것을 벤치에 앉아 지켜보며 수다를 떨기도 합니다. 좀 아쉬운 점이라면,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까지가 전부라는 거죠. 3학년 이상이 되면 놀이터에 잘 나오지 않습니다. 교육열이라면 전국 최고를 자랑하는 제주이기에 아이들이 학원에 다니느라 나와 놀 시간이 없어요. 가끔 저녁 7시 넘어 초등학교에 산책 겸 운동 겸 나가보는데요. 그 늦은 시간에 아이들이 뛰어놉니다. 9시에도 아이들이 놀고 있더군요. 집이 바로 옆이거나 엄마가 운동장에서 뱅글뱅글 걷기 운동을 하는 사이 친구들과 뛰어노는 겁니다. 밝은 낮에 즐겁게 노는 건 아니지만 밤에라도 노니까 다행이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어릴 때 놀았던 기운으로 청소년기에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어른이 되어서도 힘을 낼 수 있다고요. 어린 시절 별로 놀지 못했던 제가 하는 말이니 절반은 믿으셔도 됩니다. 
제 아이는 올해 중 3인데요. 지금까지 사교육을 시킨 적이 없습니다. 여섯 살 때 학습지 두 달 공부한 것 빼고는요. 학원에 매이지 않았으니 놀 시간이 많았겠지요. 하지만 친구들이 모두 학원에 가버려서 같이 놀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놀이터에 가도 심심하니 별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서 혼자 노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뭐, 똑같습니다. 다른 청소년들처럼 스마트폰,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놀이터를 지켜라>라는 책을 읽다가 알게 되었는데요. 서울에서는 놀이터가 점점 사라지는 추세였나 보더라고요. 그렇잖아도 골목길 놀이 같은 것이 없어지는 이 시기에 놀이터까지 사라지면 아이들은 어디서 노나요? 키즈카페? 실내 놀이터?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아이들끼리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부모가 개입하지 않고 아이들끼리 함께 어울리며 낯선 아이들과도 교류하는 사회성도 키울 수 있는, 그러니까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 놀이터를 없애고 줄여나가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관리가 소홀하거나 외진 곳에 있는 놀이터에서는 주취자나 노숙자가 차지해서 아이들이 놀 수 없다고도 하고, 노후된 시설 때문에 위험한 곳도 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는 NGO - 세이브더칠드런- 이 주축이 되어 건축가, 기업, 마을 공동체가 함께하여 아이들이 즐거워할 수 있고 지역 주민들도 행복한 놀이터를 만들었는데요. 처음부터 끝까지 순조로웠던 건 아닙니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순간도 무척 많았었거든요. 그런 어려움을 하나하나 넘어가며 아이들에게 놀이터를 돌려주는 프로젝트는 참 좋았습니다. 주민의 목소리, 아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반영하는 자세도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건축법상 들어가야만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만든다는 태도로 만들어진 놀이터와는 달랐습니다. 근처에 있다며 한 번 구경 가보고 싶은 공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놀이터는 지속적인 관리가 중요한데요. 다행히 지자체에서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은 에너지를 발산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어른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름의 방법으로 풀어나가는데, 아이들도 그런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게임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지만, 게임이라는 게 실은 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더 쌓이는 법이라 온몸으로 파워 업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놀이터를 돌려줍시다. 마음껏 뛰게 해주자고요.

** <놀이터를 지켜라>는 기아와 고통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돕는 세이브더칠드런의 한 직원이 평범한 아이들에게도 즐겁게 놀 수 있는 공간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서울시의 버려진 놀이터 두 곳을 재생한다는 프로젝트를 세우고 부장님 이하 직원들과 함께 여러분들의 힘을 합쳐 놀이터 재생에 성공하는 586일의 여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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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 보이스 - 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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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 보이스>는 농아 보호시설에서 벌어진 두 건의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소설입니다만, 범인은 누구이며 얼마나 잔인한 사건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른바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주인공인 아라이 나오토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듣고 말할 수 있는 아이, 이른바 코다 (Children Of Deaf Adults)입니다. 자신의 가족이 다른 가족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쯤에는 이미 가족의 통역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청인과 농인의 사이에서 통역을 하며 가족의 대소사를 처리하고 있었음에도 자신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고독했습니다. 어른이 되어 가족에게서 독립해 나와 경찰서 사무직으로 일할 때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언어인 수화를 버리고 다른 이들처럼 살았습니다. 살인사건의 용의자 농인을 취조하는 현장에서 통역을 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원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갔던 취조실에서 들리는 사람이었다면 받지 않았으리라 여겨지는 처우를 받던 농인을 보며 분개했지만, 아라이는 소극적인 사람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항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총대를 메고서 으쌰 으쌰 할 법도 하지만, 아라이는 우리 주변의 현실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용의자에게 가족을 만나 볼 수 있게 도움을 줄 수는 있었습니다. 결국 용의자는 실형이 선고되어 감옥에 가게 되는데, 용의자 몬나의 딸이 수화로 남긴 말이 아라이의 마음에 남습니다.
"아저씨는 우리 편? 아니면 적?"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물음은 철이 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자신을 옭아매 온, 결론이 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p.90

아라이는 내내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했습니다. 들리는 사람들에게는 농아의 아이이며 어쩐지 대하기 불편한 사람이었으며, 농인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편이 아닌 청인 세계에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자신은 과연 어느 쪽일까. 외롭고 괴로웠습니다. 어른이 되어 결혼하고 경찰서 내의 일로 인해 실직한 후 이혼하고,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나 연애를 하면서도 과거로부터의 질문에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아버지의 장례식 때도 그랬다.
장례식에 찾아와 준 사람들은 대부분 농인들이었다. 아라이는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교대로 나타나서 진심이 담긴 말을 건네며 위로해 주었다.
 그런 그 사람들도 그가 '들리는 아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한결같이 '아아, 그렇구나.'라는 표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아라이의 곁에서 멀어졌고 어머니나 형에게로, 자신들의 '동지'에게로 옮겨 갔다.
 아라이 주위에는 언제부터인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p.146

수화를 하나의 언어로 규정한다면 바이링구얼인 아라이는 수화 통역사 시험을 보고 통역사일을 하는데, 법정에 서서 통역을 한 후 펠로십이라는 단체에서 그와 함께 일을 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옵니다. 이후 농아 보호시설의 원장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17년 전 자신이 취조실에 들어갔을 때 피해자였던 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17년 전 그 농인이었는데요. 미심쩍은 점들에 마음이 쓰인 아라이는 사건을 조사하고 진실에 다가섭니다.

읽는 내내 외로웠습니다. 코다로 이쪽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한 외로움과 어두움이 자꾸만 다가와 슬펐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들지 못한 것에 슬펐습니다. 이야기는 일본의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나라의 환경이 그들보다 월등히 나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사회 제도적 접근은 많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인식의 개선이라거나 시선 같은 것은 비슷하기에 마음이 아픕니다. 소설을 읽으며 농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들의 외로운 아이들에게도 생각이 미쳤습니다. 미스터리 그 자체보다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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