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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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아가면서 독서보다도 꾸준히 해 온 일이 있다면 사랑하는 내 아이의 기억에 나와의 추억을 되도록 많이 새기는 것입니다. 아이는 저와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 불행한 시간들을 자신 안에 차곡차곡 쌓습니다. 그게 아이에게 약속한, 제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민등록증을 만들 나이가 된 지금도 아이는 여전히 저에게 죽지 말라고 합니다. 언젠가 제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저는 그렇게 아이 안에 살아있을 것을 믿습니다.

죽는 것보다 무서운 일이 있다면 잊히는 거라 생각합니다. 혹시 이다음에 치매에 걸리더라도 -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 아이의 존재를 잊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잊어버린다면 슬퍼할 아이를 위해서. 차라리 환상동화나 SF처럼 내가 잊는다면 아이도 나를 잊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슬퍼할 일도 없을 테니까요.

돈과 명예를 좇아 열심히 살다가 아내와 아들이 떠나버린 것도 이틀이나 지나 눈치챘던 한 남자가 암에 걸려 병원에서 지냅니다. 죽음이 그를 따라다닐 때 비로소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자신은 사신이 아니라고 하지만 누가 봐도 사신인 회색 옷을 입은 여자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를 들고 다니는데요. 그 명부에는 남자와 친하게 지내는 어린 소녀도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미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다음에 크면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어보는 소녀의 엄마의 마음이 어떨지. 남자는 아이에게도 시크합니다. 애초에 아들이 어릴 때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돌봐준 기억이 거의 없기에 아이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이 남자는 죽음이 그에게 가까이 와 있음에도 여전히 무뚝뚝합니다. 하지만 무언가 그의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는데요.

회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오늘 아침에 나를 망가진 차체에서 끄집어냈다. 여자는 자기 폴더에 묻은 내 핏자국을 닦았다.

"다른 사람을...... 죽여요." 나는 애원했다.

-p.31

그는 죽음을 죽음으로 맞바꾸는 건 할 수 없지만 목숨을 목숨으로 맞바꾸는 것은 가능하다는 여자의 말에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가 맞바꾼 목숨은 누구의 것이었을까요.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러 갔을 때 비로소 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설, 혹은 동화는 이 삶을 소중한 누군가와 어떻게 나눌 것인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는 삽화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는데요. 실제 있는 장소이며 프레드릭 배크만이 자란 고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텅 빈 공간에 남자와 회색 옷을 입은 여자만 있다 해도 이곳에 존재하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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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생각은 사양합니다 - 잘해주고 상처받는 착한 사람 탈출 프로젝트
한경은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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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랫동안 거절을 못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절한다는 건 미움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어떻게 '싫어요'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제 아이가 열몇 살 때 제가 시키는 일을 하기 싫다며 투덜거리는 걸 본 엄마가 그러시더군요. '너희 엄마는 지금껏 한 번도 싫어요라고 한 적 없는 데.' 아이는 여전히 열몇 살이므로 제가 싫다는 말을 하게 된 지 몇 년 안되었다는 이야기겠죠. 엄마와 함께 한 세월은 길지 않았기에 싫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편안해진 후에도 그랬다는 건 여전히 나에게는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있었나 봐요. 하지만 싫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니 더 친해졌어요.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 건 무척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사 표현을 해본 적 없는 경우엔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감히 아버지는 언급도 못하잖아요. 거절했어야 하는 일들을 거절하지 못하고 나 하나만 참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날들에 크게 반항 한 번 하고 집을 나갔던 이후 저는 세상 나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괜찮아요.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거절하지 않고 복종하고 살아왔던 날들 속에서도 저는 나쁜 아이라고 불렸었으니까 변한 건 없죠. 다만 그때보다 좀 자유로워졌을 뿐.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아버지께 거절하는 건 기절할 정도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하기보다,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마치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생사 게임처럼 말이다. 내가 기대고 있는 벽은 원래 비스듬한데, 그걸 바로 세우겠다고 온 힘을 다해 벽을 밀어붙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완벽한 수평과 수직은 십자가가 될 뿐이다.

-p.265

저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엄청났죠. 그 스트레스는 저 자신을 파괴하기도 하고 괴팍하고 까칠한 성격으로 나타나기도 했어요. 동생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거나 친구에게 말로 상처를 입히기도 했죠. 지금은 극복했지만 여전히 아버지에게는 힘들어요. 폭력에 의한 학습일 테죠.

분노는 착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누구나 경험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분노가 이렇게 인간적인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람들은 유난히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한계에 도달하게 되면 결국 패배감을 느끼거나 언젠가는 뒤틀린 공격성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p.83

<당신 생각은 사양합니다>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구절이 너무 많았어요. 내가 왜 거절 못 하는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기도 하고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위로가 되기도 했지요. 읽다 보니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겠다는 방향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중반쯤 되니 묘한 반항심이 생기더군요. 저자는 그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 그랬겠지. 자기가 그런 환경에 대해 뭘 안다고. 극단적인 상황이라거나 좀처럼 말할 수 없는 상황 같은 거 모르니까 편하게 그러는 거겠지.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사람이 그렇게 딱 거절하고 그러면 얼마나 미움받는지 알기나 해? 사랑받으려고 노력하는 게 왜 나빠?라고 생각했어요. 미움받기 싫다는 게 반드시 사랑받는 것과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 융통성 없이 저렇게 굴면 사회생활은 불가한 거 아닌가 하고, 히키코모리에 가까운 제가 투덜거렸죠.

그러나 중반 넘어서부터 드러나는 저자의 가정사와 후반의 엄마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저자에게 미안해졌어요. 내가 뭘 안다고. 정작 모르는 건 저였습니다.

책을 다 읽고 뒤표지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된 건데요. 이 책은 마음 건강을 위한 심리 책, 자기 계발서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에세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기 계발서와 에세이 사이에 있는 책 같아요.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해요.

참 좋은 책이었습니다.

만일 1) 싫은 사람의 부탁도 잘 거절하지 못한다면 2) 거절하느니 차라리 맞춰주는 게 편하다면 3) 인정받지 못하면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4) 욕 좀 먹는 게 죽기보다 싫다면 5) 눈치 보느라 말 못 하고 이불킥만 날린다면 6)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언지 모르겠다면 이 책을 읽어보셔요. 스스로 생각할 기회가 생길 겁니다. 관계에서 늘 약자의 위치에 서있던 '내가' 그 위치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이 책은 본격 착한 사람 극복 에세이거든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미 내 안에 다 있다. 사랑도, 인정도, 행복도, 자유도 내 안에 있다. 그러니 타인에게 받고 싶은 칭찬과 인정을 스스로에게 해주자. 남이 해주는 건 한계가 있지만, 내가 해줄 때는 받고 싶은 만큼 원 없이 받을 수 있다. 손발이 오그라들도록 나를 추켜세워주자.

"정말 대단해!","네가 최고야","해낼 줄 알았어!"."지금까지도 정말 잘한 거야!"

우리가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이 아닌가.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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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 아는 농담 - 보라보라섬에서 건져 올린 행복의 조각들
김태연 지음 / 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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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는 한국의 몰디브 제주 함덕에 살고 있습니다. 창문을 열면 코앞에 바다가 보일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고 20여 분 정도 걸어가면 푸른빛 바다를 만날 수 있는데, 바다는 매일 다른 표정이라 만날 때마다 반갑고 행복합니다. 이런 곳에 사니 정말 좋다고 생각하다가도 밤이 되면 악취 때문에 미칠 지경입니다. 날이 쌀쌀해 창문을 꼭꼭 닫고 자는 요즘은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여름엔 자다가 숨이 막혀 깰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분뇨 냄새일 때도 있고, 음식물 쓰레기 같은 냄새일 때도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고 나면 햇살이 따사로운 제주의 하늘을 만납니다. - 밤에만 냄새가 나고 낮에는 나지 않는 걸 보면 밤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게 분명한데 이런 일은 제주에서 비일비재하여 무수한 민원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더하고 빼면 남는 게 없는 법이라더니, 보라보라 섬이 딱 그런 것 같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쁜 일도 생긴다. 행복하다기엔 만만치 않고, 불행하다기엔 공짜로 누리는 것 투성이다. 깨끗한 공기, 따뜻한 바다, 선명한 은하수.... 어디든 더하기만 있거나, 빼기만 있는 곳은 없을 거다. 그건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늘 까먹으니 문제지. -p.118

<우리만 아는 농담>의 저자 김태연은 타히티의 보라보라 섬에 살았습니다. 지금은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잠시 섬을 떠나 있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아직 그곳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이라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지만 언제나 따스하게 바라보아주는 존재가 있어 섬에서의 하루가 행복한 것 같습니다.

당장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타히티 보라보라 섬은 지상 낙원 같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그리고 싱그러운 초록 식물들이 아름답게 존재할 수 있는지. 그곳에 인공적으로 놓여있는 수상 방갈로까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이곳에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미 제주에 살고 있는 저는 압니다. 지내기엔 좋지만 살기에는 만만치 않을 거라는걸.

저자도 아름다운 섬 보라보라에서 많은 곤란한 일들을 겪습니다. 우리 어릴 때 종종 있었던 정전이라는 거. 요새는 태풍이라도 불지 않은 다음에야 좀처럼 겪지 못하는 일이지만 보라보라에서는 제법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봅니다. 전기가 끊기면 그대로 원시생활을 해야 하는 곳, 마트에 물건이 떨어져 살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곳. 그곳이 보라보라입니다.

하지만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인정 많은 이웃이나 마트 직원. 저자처럼 외국에서 온 이웃 친구나, 셰어 하우스 메이트 등. 물론 불편하거나 좋지 않은 사람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만 행복의 조각을 전하려는 에세이에 굳이 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저자가 만난 좋은 사람들 중에 최고는 아마 남편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제가 멀리서 보고 있기에, 책을 통해서만 만났기에 좋은 점만을 본 것일 테지만 저자의 글에서 느껴지는 남편의 모습은 다정하고 인정 많으며 따스한 정의가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때로 다투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그런 남편이 있기에 보라보라에서의 생활이 더 행복한 건 아닌가 생각하니 제게도 행복이 전염되었습니다.

내일의 불확실한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모른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어제오늘과 똑같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가 계속될 수도 있고, 반대로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지루함이 축복이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뭐 그렇다고 별 수 있나. 무너진 자리에 다시 새로운 지루함을 만들 수밖에 없다. 오늘이 언젠가 우리만 아는 농담이 될 날을 기다리며.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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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패시지 1~2 - 전2권 패시지 3부작
저스틴 크로닝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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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손에 넣었을 때, 조금 당황했습니다. 두께야 그렇다 치더라도 근래 보기 드문 작은 폰트가 페이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 책, 만만치 않겠구나.

하지만 자간과 줄 간격이 읽기 좋게 되어 있어 노안이 시작되는 제 눈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활자가 주는 상상력에 금세 내가 글을 읽고 있다는 걸 잊을 수 있었습니다. 점점 세상을 느리게 살아 하루가 짧아지고 있는 저는 그 풍부한 상상을 통해 책을 소화시키느라 시간이 제법 걸렸습니다. 며칠을 붙잡고 있었던 건지. 그러나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삼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 패시지 트릴로지의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를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어떤 사건, 이를테면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말도 안 되는 실험이나 정부의 비밀 실험으로 인해 디스토피아가 일어나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며 그 집단들끼리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가 우연히 알게 되고 다시 문명을 회복하는 이야기, 심지어 바이오해저드 같은 경우엔 면역을 지닌 사람으로 인해 백신을 만들어 치료나 예방의 길이 열린다...라는 스토리는 흔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매번 비슷한 장면을 상상하게 됩니다. 괴물이나 액션은 좀 다를지 몰라도 등장인물이나 그들이 살고 있는 콜로니 같은 건 거의 비슷하게 연상됩니다. 아이작 마리온의 <웜 바디스>와 후속작 <타오르는 세계>에 등장하는 배경과 패시지 퍼스트 콜로니를 비슷하게 상상했습니다. 마을 지도가 첨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렴 어떻습니까. 이 소설 <패시지>는 기존의 디스토피아 역경을 이겨나가는 스토리와 비슷한 전개를 따라가고 있음에도 그들을 뛰어넘고 있었는걸요.

제로의 해, 그러니까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전멸하기 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한 박사가 영원불멸의 약을 연구하고 있었고, 정부는 무적의 병사를 만들기 위해 박사의 연구를 지원하고 임상 실험을 위해 사형수들을 이용하지만 그들은 극심한 고통 끝에 자신이 아닌 자가 되고 맙니다. 이제까지의 연구는 단 하나의 완성체를 위해였는데요. 빌어먹을 남자(그 남자의 이름이 빌이라는 건 우연이겠지만)에게 몸도 마음도 털린 자넷이 홀로 낳아 키우다 슬픈 사건으로 수녀원에 버리고 간 여자아이 에이미가 그 완성체가 될 것이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에이미를 지키려는 레이시 수녀에게서 아이를 납치한 FBI 요원 도일과 울가스트는 지금까지 실험체를 감언이설로 꼬드겨 제공하였지만 이렇게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다니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어린 딸을 잃은 울가스트는 에이미에게 깊은 정을 느끼고 보호하려고 하지만 결국 실험동으로 옮겨지고 에이미는 실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그들이 어떻게 에이미라는 아이를 특정해서 찾아냈는지 의문이지만 이 소설에서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에이미는 실험 이전부터 영혼의 소리를 듣는 아이였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을 포함한 사람이 아닌 것의 소리까지 듣습니다. 어째서 그런 능력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 아이는 노아의 방주가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로의 그날, 실험동의 청소부들의 마음에 침투한 실험체들은 그들을 이용해 연구소를 파괴하며 빠져나가고 그 핏빛 난리 통에서 울가스트는 에이미를 구해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이와 함께 살아갑니다. 언제까지고 영원히 그렇게 살았으면 좋으련만. 운명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울가스트가 죽었을 때 무척 슬펐습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역사가 그렇듯 이젠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살아있을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흘러가 버렸는걸요.

천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문명이 발달했나 봅니다. 국제회의 자료, 각국의 대학 연구소 등이 존재하는 걸 보면요. 그들이 그곳에서 무얼 하는지는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발굴된 자료 '사라의 서'를 발표하는 장면, 아니 사라의 서 만이 책에 등장합니다. 사라는 퍼스트 콜로니의 간호사이자 의사입니다. 그리고 제로의 날 이후 90여 년이 지난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었죠. 그곳은 피터나 알리시아 같은 파수꾼이 있는 작은 규모의 생존자 마을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연히 그 긴 세월 동안 누구하고도 만난 적 없이 외롭게 지내던 에이미를 만나게 되고 에이미가 피터를 찾아 콜로니를 찾아온 그날 이제는 바이럴이라고 부르는 감염체들도 마을을 습격합니다.

신비한 소녀 에이미는 콜로니에 혼란을 가져오지만 그 아이의 운명에 따라 함께 콜로라도로 향하는 피터와 친구들. 그들은 거센 운명의 폭풍을 맞습니다.

<패시지>에는 무척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도 허투루 표현하지 않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런 인생이 나타났다가 느닷없이 사라집니다. 바이럴이 순식간에 채 가버리는 것처럼요. 사라질 땐 겨우 한 문장이면 족했습니다.

작은 글씨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이라 읽는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읽는 속도가 느리다면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몰입감이 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이게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죠.

이 소설은 삼부작입니다. 이제 패시지의 문을 열었을 뿐입니다. 다음 시즌인 <트웰브>,<시티 오브 미러>를 빨리 만나고 싶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떠했는지.

어째서 스티븐 킹이 극찬했는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FOX TV 드라마 원작 소설이라고 하는데요. 조만간 우리나라에도 수입되어 매체를 통해 방영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무엇을 본다는 말입니까?"

"당신이 여기까지 찾으러 온 바로 그것요.

'패시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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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 소외된 영혼을 위한 해방의 노래, 라틴아메리카 문학 서가명강 시리즈 7
김현균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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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 문학이라는 건 무척 생소해서 가까이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붐을 대표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은 대학시절 선배들이 품에 끼고 다니는 걸 본 적 있지만 어쩐지 저 책을 읽으면 고독에 사로잡힐 것 만 같아 어떤 책인지 알아보는 것조차 꺼렸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밀란 쿤데라도 저에겐 멀었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만이 가까웠는데 그마저도 그의 글보다는 바벨의 도서관에 있는 책을 읽었기에 그의 이름을 알뿐이었습니다. 평소 좋아하는 소설에 관해서 그럴진대, 시는 오죽할까요. 스페인어를 전공한 올케는 마르고 닳도록 읽었을 파블로 네루다의 시조차 저는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파블로 네루다는 몇 년 전부터 집에 꽂혀있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소설 덕분이 이름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평소에도 시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 낯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기에 멀리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득, 가을이나 봄처럼 마음을 간질이는 때가 되면 살며시 시의 세계를 엿봅니다.

라틴 문학이라고 하니 괜히 정열적일 것 같았습니다.

저는 라틴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머릿속에 리키 마틴이나 샤키라, 카밀라 카베요 같은 팝 가수만 떠오릅니다. 노랫말도 시라고 생각해도 좋을는지.

길가의 돌멩이만큼 시인이 나오는 곳 라틴 아메리카의 시를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 자체가 희한한 일이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조차 읽지 않은 건 무슨 까닭이었을까요. 아마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이번 서가명강의 책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를 통해 인연이 닿았습니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김현균 교수의 명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으로 기존 서가명강 시리즈와 같이 책을 통해 서울대에 가지 않아도 명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읽을 수 있다는 것) 장점이 있습니다. 책을 접하면서 처음엔 조금 부담스러웠어요. 라틴 아메리카 문학도, 시도 저에겐 가깝지 않은 분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바닷가에서 종려나무 흔들리는 걸 바라보며 카밀라 카베요의 'Havana'를 들으며 책을 읽으니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었습니다.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네 명의 시인을 각 챕터에 두고 그들의 일대기와 시에 대한 생각, 그들의 대표적인 시, 시가 사회와 문화계에 미친 영향 등을 이야기합니다. 역사적인 특수성 때문에 서구적이지만 또한 서구적이지 않은 그들의 독특한 문화가 시에 녹아 있으며 스페인 내전 같은 사회의 큰 혼란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루벤 다리오는 스페인어권 문학의 황태자이자 근대 시의 선구자, 스페인어의 혁명가로 불린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다리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리고 그를 기점으로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시대를 앞서갔던 다리오는 무지렁이들이 판치는 척박한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킬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고, '모데르니스모'라는 이름의 문학적 혁신은 그 분투의 산물이었다. -p.54

한곳에 정주하기를 거부하고 삶과 문학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던 역동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너[책]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는 시구가 말해주듯이,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골방에 처박혀 글을 끄적이는 백면 서생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서 인간의 슬픔, 고통, 그리고 절망을 뜨겁게 호흡하고 그 속에서 기쁨과 희망을 길어 올린 광장의 시인이다. -p.130

"나는 신(神)이/ 아픈 날 태어났다." 세사르 바예호는 평생 가난하고 불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가난도 병도 정치적 핍박도 자기 파괴적인 습관도 그의 타고난 재능을 잠재울 수 없었다. 바예호의 시는 비인간적인 세상에 내던져진 소외된 존재의 고통으로 가득하다. (중략) 고통과 고독을 넘어 인간적 연대와 휴머니즘의 경지로 나아갔다. -p.212

니카노르 파라는 반시(antipoesia)를 주창한 시인으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안티'정신으로 무장한 이단아이자 저격수인 그는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만의 언어유희를 보여주고 유머와 아이러니, 풍자를 동원해 시를 엄숙하고 고상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적 통념을 깨트렸다. 파라가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인 방식으로 과거의 시를 부정하고 다시 세우고자 했던 새로운 시의 질서와 문법은 무엇이었을까? -p.274

이 책을 읽고 나니 어쩐지 김현균 교수의 라틴 아메리카 시에 관한 강의를 듣고 싶어졌습니다. 전공자들을 위한 심도 있는 강의라면 무리지만, 일반인이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양 수업 정도라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서가명강 시리즈를 애독해온 기간 중 처음으로 서가명강 팟캐스트에 접속해보았습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345

제15강으로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가 이미 올라와 있길래 책을 펴 놓고 강의를 들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대학시절 교과서를 두고 교수님 강의를 들었던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앞서의 시리즈 강의도 있었습니다. 한 번에 다 들을 수는 없지만 15분 정도 분량으로 편집해 올라와 있으니 책을 앞에 두고 한두 편씩 들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미련하게도 왜 이제야 시작했는지.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는 제게 특별한 책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 그리고 시에 대해서 알게 해준 첫 번째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디오 클립으로 처음 들은 강의이기도 하고요.

책은 모두 읽었지만 당분간 독서대 위에 그냥 있을 것 같습니다. 강의를 들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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