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 소외된 영혼을 위한 해방의 노래, 라틴아메리카 문학 서가명강 시리즈 7
김현균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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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 문학이라는 건 무척 생소해서 가까이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붐을 대표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은 대학시절 선배들이 품에 끼고 다니는 걸 본 적 있지만 어쩐지 저 책을 읽으면 고독에 사로잡힐 것 만 같아 어떤 책인지 알아보는 것조차 꺼렸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밀란 쿤데라도 저에겐 멀었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만이 가까웠는데 그마저도 그의 글보다는 바벨의 도서관에 있는 책을 읽었기에 그의 이름을 알뿐이었습니다. 평소 좋아하는 소설에 관해서 그럴진대, 시는 오죽할까요. 스페인어를 전공한 올케는 마르고 닳도록 읽었을 파블로 네루다의 시조차 저는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파블로 네루다는 몇 년 전부터 집에 꽂혀있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소설 덕분이 이름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평소에도 시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 낯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기에 멀리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득, 가을이나 봄처럼 마음을 간질이는 때가 되면 살며시 시의 세계를 엿봅니다.

라틴 문학이라고 하니 괜히 정열적일 것 같았습니다.

저는 라틴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머릿속에 리키 마틴이나 샤키라, 카밀라 카베요 같은 팝 가수만 떠오릅니다. 노랫말도 시라고 생각해도 좋을는지.

길가의 돌멩이만큼 시인이 나오는 곳 라틴 아메리카의 시를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 자체가 희한한 일이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조차 읽지 않은 건 무슨 까닭이었을까요. 아마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이번 서가명강의 책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를 통해 인연이 닿았습니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김현균 교수의 명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으로 기존 서가명강 시리즈와 같이 책을 통해 서울대에 가지 않아도 명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읽을 수 있다는 것) 장점이 있습니다. 책을 접하면서 처음엔 조금 부담스러웠어요. 라틴 아메리카 문학도, 시도 저에겐 가깝지 않은 분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바닷가에서 종려나무 흔들리는 걸 바라보며 카밀라 카베요의 'Havana'를 들으며 책을 읽으니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었습니다.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네 명의 시인을 각 챕터에 두고 그들의 일대기와 시에 대한 생각, 그들의 대표적인 시, 시가 사회와 문화계에 미친 영향 등을 이야기합니다. 역사적인 특수성 때문에 서구적이지만 또한 서구적이지 않은 그들의 독특한 문화가 시에 녹아 있으며 스페인 내전 같은 사회의 큰 혼란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루벤 다리오는 스페인어권 문학의 황태자이자 근대 시의 선구자, 스페인어의 혁명가로 불린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다리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리고 그를 기점으로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시대를 앞서갔던 다리오는 무지렁이들이 판치는 척박한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킬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고, '모데르니스모'라는 이름의 문학적 혁신은 그 분투의 산물이었다. -p.54

한곳에 정주하기를 거부하고 삶과 문학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던 역동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너[책]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는 시구가 말해주듯이,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골방에 처박혀 글을 끄적이는 백면 서생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서 인간의 슬픔, 고통, 그리고 절망을 뜨겁게 호흡하고 그 속에서 기쁨과 희망을 길어 올린 광장의 시인이다. -p.130

"나는 신(神)이/ 아픈 날 태어났다." 세사르 바예호는 평생 가난하고 불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가난도 병도 정치적 핍박도 자기 파괴적인 습관도 그의 타고난 재능을 잠재울 수 없었다. 바예호의 시는 비인간적인 세상에 내던져진 소외된 존재의 고통으로 가득하다. (중략) 고통과 고독을 넘어 인간적 연대와 휴머니즘의 경지로 나아갔다. -p.212

니카노르 파라는 반시(antipoesia)를 주창한 시인으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안티'정신으로 무장한 이단아이자 저격수인 그는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만의 언어유희를 보여주고 유머와 아이러니, 풍자를 동원해 시를 엄숙하고 고상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적 통념을 깨트렸다. 파라가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인 방식으로 과거의 시를 부정하고 다시 세우고자 했던 새로운 시의 질서와 문법은 무엇이었을까? -p.274

이 책을 읽고 나니 어쩐지 김현균 교수의 라틴 아메리카 시에 관한 강의를 듣고 싶어졌습니다. 전공자들을 위한 심도 있는 강의라면 무리지만, 일반인이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양 수업 정도라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서가명강 시리즈를 애독해온 기간 중 처음으로 서가명강 팟캐스트에 접속해보았습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345

제15강으로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가 이미 올라와 있길래 책을 펴 놓고 강의를 들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대학시절 교과서를 두고 교수님 강의를 들었던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앞서의 시리즈 강의도 있었습니다. 한 번에 다 들을 수는 없지만 15분 정도 분량으로 편집해 올라와 있으니 책을 앞에 두고 한두 편씩 들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미련하게도 왜 이제야 시작했는지.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는 제게 특별한 책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 그리고 시에 대해서 알게 해준 첫 번째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디오 클립으로 처음 들은 강의이기도 하고요.

책은 모두 읽었지만 당분간 독서대 위에 그냥 있을 것 같습니다. 강의를 들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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