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의 인생미답 - 살다 보면 누구나 마주하는 작고 소소한 질문들
김미경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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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언니, 살살 달래며 북돋워주는 타입이 아니라 애정 어린 호통으로 끌어주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부드러워졌지?"

라는 것이 저의 첫 감상이었습니다.

예전엔 페미닌한 정장의 빳빳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앙고라 니트 같다고 할까요? 어쩐지 제가 알고 있던 김미경 같지 않았습니다. 

조언을 하고 애정을 듬뿍 퍼주는데, 그리고 희망을 주는데 무언가 가운데가 텅 빈, 허전한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의 중반쯤에 깨닫게 되지요. 

아, 이 중앙의 빈 부분은 내가 채워야 하는 것이구나.


각자의 인생이 다르고 각자가 지닌 무게가 다르니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딱 찍어 줄 수 없는 거예요. 그건 세상 누구도 불가능하겠죠. 다른 사람에게 정답이었다고 내게도 정답인 건 아닐 테고요. 그러니까, 그 공간은 제 스스로 채워야만 하는 겁니다. 그 길을 선택하고도 조금 불안합니다. 이제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혹시 내가 버린 길이 옳은 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껏지나 지나온 길을 모두 더해서 현재의 내가 된 것이니 모든 걸 다 받아들이고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네,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자꾸만 흔들립니다. 불안하기도 하고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걱정됩니다. 미리 걱정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없다고 다짐하면서도 미래를 위한 설계를 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그 선을 긋기가 애매합니다. 강하다고, 강해야 한다고 되뇌는 것이 나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듭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하는 마음을 달래주는 언니, 김미경 강사의 이야기. <인생미답>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인생이건 직선으로만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단은 우리가 태어난 것도 그 굴곡을 지나온 거고요. 살아가는 인생 끝까지 수많은 곡선을 좌우로 좌우로 굽어지면서 살아가게 되는 거거든요. 그렇게 굽어지고 살아내고 굽어지고 살아내고를 하다 보면 하나의 직선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수많은 곡선들이 있죠.

  살다 보면 요즘 왜 이렇게 일이 안 되지? 안 풀리고 자꾸 꺾이지? 그런데 꺾였다는 건 또 다른 방향으로 꺾일 수 있다는 거거든요. 모든 태어난 자는 그렇게 곡선을 좌우로 움직이다가 결국에는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거죠. 지금 힘들다고, 내 인생이 왜 직선으로 풀리지 않느냐고 억울해하거나 속상해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 다 각자의 곡선을 지니고 있습니다. 곡선의 굽이침 속에서 우린 의연하게 살아낼 겁니다.


-p.276~275



이 책 <인생미답>은 한 번에 읽어버리지 말고 하루에 3~10분씩, 두어 편의 이야기를 읽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읽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경우를 대입해 보면서 스스로의 답을 끌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책 중간중간 놓여있는 QR코드가 궁금해 찍어보았더니 유튜브에 연결이 되어, 책 속에 나온 이야기를 김미경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더군요. 사실은 책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김미경의 있잖아...>라는 5분여의 녹음파일 중 반응이 좋았던 55편의 이야기와 새로운 15편의 이야기를 모아 <인생미답>이라는 책으로 엮은 것이었습니다. 어쩐지.

각 장마다 "있잖아요."로 시작해서 좀 성가셨거든요. 나에게 말을 걸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좋은데 왜 자꾸 있잖아요.... 있잖아요... 하는 걸까.. 했더니만. 이유가 있었네요.

아무튼 그런고로 하루에 5분에서 10분 정도 시간을 내어 책을 조각조각 읽기를 권합니다.


초판 한정으로 특별 부록 오디오 CD가 함께 제공되니 QR 찍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집 PC는 CD롬이 없으니 오디오 CD가 필요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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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의 일기 밀리언셀러 클럽 146
척 드리스켈 지음, 이효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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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위키백과를 뒤적이며 히틀러에 대해 읽어보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히틀러의 공식 결혼 경력은 한 번이었으며, 그밖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가 한 명 존재했으나 행방은 미상이다.

평소, 남자들은 권력을 쥐고 나면 왜 그다음은 많은 여자들을 취하려 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던 저로서는 사생아가 한 명 밖에 없다는 사실이 의아했습니다. 정말 한 명뿐일까요? 혹시 히틀러가 모르는 사생아가 또 있는 건 아닐까요. 심지어 그 아이에게 반은 유태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요. 아마 아돌프 히틀러는 무덤에서라도 뛰쳐나와 그 사실을 지우려 할 겁니다.


전직 미군에다 비밀 특수부대 출신인 게이지 하트 라인이지만 지금은 그저 별 볼일 없는 - 비폭력적인 의뢰만을 맡고 있는 프리랜서... 심부름꾼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그런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프랑스의 정보원 장의 의뢰로 한 건물에 도청기를 설치하러 갔다가 숨겨져 있던 일기장을 발견합니다. 호기심에 들춰본 그 일기는 1938년 그레타라는 여자가 남긴 것으로 기분 나쁜, 애인인 듯 한 남자 때문에 겪었던 고통의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이 적혀있는 일기라지만 그녀가 당해야 했던 수모와 고난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게이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일기장을 그곳에 두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마저 읽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일기를 그곳에서 가지고 나오기로 합니다. 6권이나 되는 일기를요.


게이지는 일기장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눈을 감은 채 뒤로 고개를 젖혔다. 이 불쌍한 유대인 여자에게서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보였다.

-p.81


변태적 성향을 가진 애인, 그것도 유부남인 자의 아이를 임신하고서 그의 아내의 도움으로 간신히 도망친 그녀를 안스러워하며 계속 일기를 읽어나가다가 그녀가 결국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머리를 스치는 생각. 그녀의 옛 남자 알도의 정체가 혹시?


그레타 드라이스바흐. 아돌프 히틀러의 오랜 하인. 애인이었다는 소문이 있음. 1938년에 가출 후 실종. 히틀러가 그녀의 살해를 명령했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있으나 철저한 조사에도 주변 인물이었던 드라이스바흐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찾을 수 없었다.

-p.85

게이지는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된 모니카에게 일기의 이야기를 하고, 그녀와 함께 책에 대해 잘 아는 고서점 주인이자 모니카의 사촌인 미셸을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일이 지독하게 꼬이기 시작해 그들의 앞날에 총 부림 칼부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그리고 제일 일어나지 말았으면 했던 일이 일어나고, 비폭력을 주장하던 게이지의 폭력성이 깨어나버립니다. 그야말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셈이었죠. 분명 잘 못 한건 그놈들이긴 한데, 게이지에게도 책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게, 그렇게 조심성 많은 사람이 그땐 왜 그런 걸까요.

그 일기에 등장하는 알도가 아돌프 히틀러라는 증거도 없는데, 생각해보면 게이지의 추측일 뿐인데 그 일기가 책으로 나온다면... 하는 생각에 판권을 노리는 사람들이 이상했습니다. 게이지는 그 일기로 책을 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생아로 컸을 아이 - 지금은 노인이겠지만- 에게 전해주려 했던 것인데,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으니 정말 난감했을 겁니다. 뭐 결국. 그 사생아는 진짜로 있는 사람이었다... 였지만요. (진짜 진짜는 아닙니다. 소설 속에서 그렇다는 거죠.)


처음 책의 정보를 접하고 상상했던 것과는 내용이 좀 다르게 진행되어서 약간 당황스럽긴 했습니다. 저는 좀 더 히틀러에 가까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요. 팩션이거나 네오 나치라거나 그런 쪽으로 진행될 거라고 예상을 했었습니다만, 전혀요. 액션물입니다. 게이지가 소설의 초반에 항공기 내 난동 승객을 제압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때라도 감을 잡았어야 했는데,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척 재미있더군요. 긴박하고 스릴 넘치게 진행됩니다. 게이지를 쫓는 사람들을 피하는 기술들이나 복수를 위해 적에게 접근하는 모습들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잔인한 장면들이 좀 있습니다. 적에게서 정보를 캐려고 고문하는 장면에서는 아무리 우리 편이지만 그러지 마! 그만둬!라고 중얼거렸습니다. 하지 마. 하지 마. 싫었어요. 고문 장면이 지나치게 상세해서 이런저런 소설들로 면역이 되어 있는 저조차 좀 힘들었습니다. 너의 상처는 이해하지만, 상상된단 말이야. 그만둬.

그럼에도 게이지는 참 매력적인 주인공입니다. 강하지만 약한 면이 있는 남자. 여자들은 그런 점에 끌리지 않나요? 앗, 저만 그런가요?

아무튼 게이지 하트라인은 시리즈를 통해 계속 제 앞에 나타날 모양입니다. 책 오른쪽 위에 Series 1이라고 찍혀 있는 걸 보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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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방정식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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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러니까 최초의 담임 선생님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폭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요. 반 아이가 잘못된 방법으로 연필을 잡고 글을 쓰는 걸 보고 '병신'이라고 하질 않나, "너희들을 가르치느니 내가 개를 데려다 앉혀놓고 가르치겠다."라고 하지 않나, 심한 감기에 걸린 아이가 욕지기를 느껴 화장실로 뛰어가다 말고 복도에서 구토하자 "왜 치우기 힘들게 여기다가 토하고 그래!" 하고 소리 지르질 않나...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저와, 같은 반 친구 엄마들은 혹시나 항의를 했다가 아이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을까, 지금 찍히면 선생님들끼리 이야기를 해서 학교생활 내내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의도 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눈물짓기도 했었습니다. 참, 바보 같죠. 제주로 이사 올 줄 알았다면 용기를 좀 내볼걸. 경북 교육청이나 학교에 이야기를 해 볼걸.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 하겠습니까. 많은 피해자를 낳고 선생님은 정년을 맞이하셨는걸요. 아이들에 용기를 주고 바른길로 인도해주는 선생님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아이들에게 폭언이라니. 그런 식의 말들을 뱉는 건 자신의 인격이 거기까지 밖에 안된다는 증거가 아닌가요.


그런 인격 함량 미달의 선생님이 미야베 미유키의 <음의 방정식>에도 등장합니다. 피난소 생활 체험 캠프라는 이름의 자연재해 대비 1박 2일 캠프를 하던 날 밤, 히노 다케시 선생이 아이들에게 찾아옵니다. 이런 느슨한 가상 체험 말고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해보라며 너희들 일곱 명 중 살아남을 여섯 명과 죽어야 할 한 명을 정하라고 말하고선 자리를 뜹니다. 아이들은 투표로 선출된 시모야마 요헤이를 죽을 아이로 정하고 낄낄거리는데요. 그 아이가 평소에도 약간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라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버리거든요. 히노 선생의 부적절한 언동으로 아이들은 모두 크고 작은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히노 선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극구 부인합니다. 언뜻 보기에 별건 아닌 것 같은 사건이지만 당사자들은 나름 심각했습니다. 히노 선생. 참, 말을 잘 못 가리는 사람입니다. 열혈 선생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의 언동이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요. 

이 사건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이 아키요시 쇼타의 부모님은 사립탐정을 고용합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했겠죠. 그들이 고용한 사립탐정은 스기무라 사부로! 제가 좋아하는 좋은 사람입니다. <누군가>, <이름 없는 독>,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 등장하는 행복한 탐정이죠. 드디어 회사를 관두고 본격 탐정이 되었군요. 벌이는 시원치 않을는지 모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만큼이나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들에게 진정한 평안을 찾아 줄 수 있는 탐정으로서 활약할 거라 생각하는데요. 제 예상이 틀리지 않아, 이 책에서도 아이들과 주변인들을 탐문하며 그들의 편에 섭니다. 

어쩐지 위치상으로는 반대편이라고 해야 하지만 사실은 같은 편일 수밖에 없는 학교 측 변호사로는 후지노 료코가 등장합니다. <솔로몬의 위증>에서 중학교 3학년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똑 부러지는 여학생으로 당시 모의재판에서는 검사였던 후지노 료코가 정말 법조계에 진출, 변호사가 되어 활약하니 앞으로도 그녀의 활약을 더 지켜보고 싶습니다. 

아직 중학생으로만 생각되던 후지노 료코가 벌써(?) 이렇게 자라서 34살이 되었다니. 스기무라와 함께 어른으로서 대등하게 만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만 보아도 기분이 묘해졌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책이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만난 것도 기뻤고, 무엇보다 이런 짧은 글에도 미야베 미유키는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구나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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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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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무덤이었다. 우리의 두려움이나 고통은 모두 폐허 아래 묻혀버렸다. 

-p.8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스물한 살의 '나'는 어린 시절 휴가지에서 샀던 2펜스 짜리 그림엽서에 그려져 있던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이 됩니다. 뚱뚱하고 수다스러운 반 호퍼 부인에게 연봉 90파운드에 고용되어 몬테카를로 코트다쥐르 호텔에서 그녀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수줍었던 어린 처녀가 그 호텔의 또 다른 손님 맥심 드 윈터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혼자만의 사랑의 열병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나'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식 같은 기타 형식은 생략하고 짧은 신혼여행과 간단한 쇼핑을 마치고 맨덜리 저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맥심의 갑작스러운 청혼 대목에서 기묘한 불길함을 느꼈습니다. 이상하게 뱃속이 꿀렁거렸습니다. 잘 된 일이잖아. 뭐지? 뭐가 문제지? 맥심이 마흔두 살, '나'는 스물한살이라서?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닌데... 십이지장이 뒤틀리는 이 느낌은 뭘까요? '나'와 맥심을 보며 괜히 불안해졌습니다.


맥심의 전처는 한밤중에 혼자서 보트를 타고 나갔다가 전복되는 바람에 죽었는데, 큰 키에 날씬하며 긴 검은 머리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레베카. '나'는 레베카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 맨덜리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여기까지. 저택에서의 생활은 그리 녹녹치 않았습니다. 특히 레베카가 친정에서부터 데리고 와 여전히 맨덜리에서 일하고 있는 댄버스 부인은 정말이지 어려운 존재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저택에 어울리는 품위를 갖추지 못 해서 얕잡아 보였는가 했더니, 단지 전 부인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로 미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시름 놓습니다. 그렇다면 궂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댄버스 부인은 '드 윈터 부인'을 미워했겠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첫날부터 댄버스 부인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였는지, 모든 이가 자신을 탐탁잖아 하는 것 같습니다. 고용인들도, 영지의 주민들도, 심지어 맥심까지도.


  오늘 오후처럼 답방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제대로 해낼까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내죠. '대체 맥심은 뭘 보고 저 여자랑 결혼한 걸까?'라고 말하는 듯 말이에요. 그러면 저 스스로도 자신이 없어져요. 해서는 안 될 결혼을 했다는 생각,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와 처음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저 여자는 레베카와 정말 다르군'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저도 안다고요.

-p.198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은 바로 '나'입니다. 하지만 저택에는 여전히 레베카가 존재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죽은 레베카는 이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살아있는 '내'가 허깨비처럼 떠도는 것만 같았습니다. 모두가 레베카의 이야기를 하고 '나'와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하찮은 작은 일들, 하나씩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지만 내게 있어 레베카는 보고 듣고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난 정말이지 레베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맥심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며 함께 살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그것 말고 아무런 바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늘 머릿속에, 꿈속에 레베카가 찾아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 스스로가 맨덜리의 손님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 했다. 레베카가 다니던 곳을 걷고 쉬던 곳에 몸을 누이는 손님. 안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손님. 말 한 마디 한 마디, 물건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내게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p.206


'내'가 레베카의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나' 스스로의 자격지심이나 소심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댄버스 부인은 '나'를 괴롭히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저택에서의 가장 큰 괴로움은 맥심이 숨기고 있던 비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과연 모든 괴로움을 떨쳐버리고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그들의 뒷이야기를 알 고 싶어서 저는 소설이 끝나자  처음으로 돌아와 19페이지까지 다시 읽었습니다. 그곳에 그들의 마지막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드 윈터 부인으로서의 전처 '레베카'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 일 뿐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아무도 불러주지 않습니다. 아니, 아마도 불렀겠죠. 적어도 맥심은.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그들만이 소유할 뿐, 저에게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그녀는 '드 윈터 부인' 이름으로만 불리다니. 레베카와 이름을 공유하는 셈이 아닌가요. 저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맥심이 아주 독특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한 그 이름을요.


멘덜리는 평화로웠다.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 영역 안에 누가 살든 어떤 문제가 생기고 투쟁이 벌어지든, 아무리 큰 고통과 불편이 있다 해도, 어떤 눈물이 흐르고 슬픔이 차올라도 맨덜리의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은 끄떡없다. 죽은 꽃은 이듬해면 다시 피고 같은 새들이 둥지를 지으며 같은 나무들이 무성하다. 오래된 이끼 냄새는 계속 대기 중에 머물 것이고 벌은 어김없이 찾아오며 찌르레기와 왜가리는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둥지를 마련할 것이다. 나비들이 잔디밭에서 즐거운 춤을 추고 거미들은 거미줄을 자아내며 작은 토끼들이 무성한 덤불 사이로 슬쩍 머리를 내밀겠지. 라일락과 인동덩굴이 자리를 지키고 백목련은 식당 창 아래에서 천천히 봉오리를 열리라. 이곳 맨덜리를 망가뜨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제까지나 이곳은 숲에 안전하게 둘러싸여 매력을 발산하고 바다는 작은 조약돌 해변을 들락거릴 것이다.

-p.543


어째서 대프니 듀 모리에를 서스펜스의 여왕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1940년에 쓰인 이 <레베카>는 영화와 뮤지컬로 공연되면서 단 한 번도 절판이 된 적이 없는 명작인데요. 초반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보며 풋풋한 옛날식 사랑에 미소를 지었지만 아름답고 향기로운 대저택에 들어선 순간 제 얼굴은 점점 굳어갔습니다. 이젠 어떻게 되려나 조마조마 해졌고요. 탁월한 심리묘사와 서술이 저를 이 소설에 붙잡아 두었습니다. 쉬지 않고 책을 읽는 바람에 눈이 아파지는데도 책을 내려놓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는 어느새 레베카가 아닌 '나'의 '드 윈터 부인'을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맥심과 '내'가 행복과 평안을 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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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전이의 살인 스토리콜렉터 42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 / 북로드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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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펜터스의 'This Masquerade'는 제가 좋아하는 올드 팝 중 하나입니다.

 

Are we really happy with

This lonely game we play

Looking for the right words to say

Searching but not finding

Understanding anyway

We′re lost in this masquerade


원래는 사랑을 가장하고 있는 연인들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노래라고 생각하는데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인격 전이의 살인>에도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매스커레이드에서 길을 잃었으니까요.


사회심리학자 다니엘 아크로이드 박사는 1970년대에 말도 안 되는 걸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인격을 바꿀 수 있는 기계인데요. 앤트맨에 나오는 인체 축소 광선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이 기계의 이름은 체임버라고 합니다. 체임버 안에 들어가 서로의 인격이 바뀐 인간들은 바뀐 채로 생활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 또 뒤바뀔지 모르는 상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매스커레이드라고 하죠. 둘이서만 바뀌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주인공 에리오의 경우처럼 여섯 명의 인격이 바뀔 때는 일이 복잡해집니다. 

반드시 한 명씩만 들어가서 인격이 바뀌는 것을 주의했었지만, 아크로이드 박사와 빨간 머리의 진저의 인격이 서로 바뀌는 바람에 체임버는 폐쇄되고, 20여 년이 흐른 뒤 체임버가 있는 곳은 어쩐지 커다란 쇼핑센터의 햄버거 가게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사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단단히 봉해져 있었지요.-라고는 하지만 좀 허술했던 건 사실입니다. 평소엔 손님이 거의 없던 그 가게 '치킨 하우스'에 일본인 '나(에리오)'가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여러 명의 손님이 더 들어와 다소 산만해졌는데요.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대피할 장소가 필요해졌던 그들은 마치 기둥처럼 그곳에 존재하던 체임버의 문을 부수고 암흑 속에서 그 안으로 찾아들어가게 됩니다. 그 공간이 어떤 곳인지 몰랐던 그들은 오랜만의 손님을 반가이 맞이하는 체임버에 의해 인격 전의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여럿의 인격이 바뀔 때는 그들이 위치한 곳에서 시계방향으로 인격이 이동하게 되는데요. 그다음 인격 전이에서는 처음 인격 전이가 있었던 때의 배치에 따라 다시 시계방향으로 한 칸 이동합니다.


  우리 6명이 '1'부터 '6'까지 원을 그리는 순서대로 앉아 있다는 사실. 그렇다. 순서대로다. 그건 대체 무슨 순서인가. 두말할 필요 없이 '인격 전이' 순서다. 아직 명확한 설명을 들은 건 아니지만 이 연출적인 배치에 다른 의미가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길한 상상은 더욱 끔찍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1'의 육체에서 옮겨진 인격은 '2'의 육체에, '2'에서 옮겨진 인격은 '3'의 육체, '3'에서 '4', '4'에서 '5', '5'에서 '6', 그리고 '6'에서 '1'로, 각각 '전이'된다는 뜻인 듯했다.

  어쩌면 '전이'는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번호가 하나씩 옮겨 가는 슬라이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느낀 끔찍한 예감은 그랬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의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p.115


처음엔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모두들 당시 상황대로 둘러앉아 아크로이드 박사님의 이야기를 차분히 듣습니다. 섹시 글래머 보디를 차지한 엉큼한 아저씨는 오히려 신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 여자 아야가 죽었다는 이야기에 - 아니, 목을 졸려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로를 의심합니다. '나(에리오)'역시 머리를 짜내며 추리를 해보지만 일단은 이곳에서의 생존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인격 전이 장치가 비밀이니만큼 그들은 세상에서 지진으로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고, 대혼란을 막기 위해 공동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함께 살아야 하는 여섯 명 사이에 살인자가 한 명 숨어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CIA에서 그녀의 죽음은 사고였다고 했지만 미심쩍습니다. 성격도 뭣도 안 맞는 그들이지만 어떻게든 함께 살아보려고 하는데, 그곳에서 다시 살인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인격 전이, 살인, 인격 전이. 상황이 무척 빠르게 변화합니다. 누가 누굴 죽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그 안에 들어 있던 인격 즉, 영혼마저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육체도 인격도 소중한 이 마당에 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왜?


  "우리 인류의 의학이나 과학으로는 방법이 없어. 말하자면 여러분은 앞으로 계속 이 '매스커레이드'라는 감옥의 포로로 살아야 해. 알겠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은 모두 죽었어. 적어도 사회적인 존재로서는 소멸하고 말았다는 거야. 원래의 삶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어. 그 운명을 부디 잘 받아들이면 좋겠군."

-p.121

수첩까지 함께 따라온 이 책은 많은 메모를 하며 읽어야 하나보다...하는 부담감을 주었지만, 읽어보니 별로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친절하게도 중간에 그림으로 설명해주기도 하고, 본문중에 '나(=나)', '나(=바비)'하는 식으로 누구의 몸에 누가 들어 가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빠른 인격전이가 일어날 때엔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헷갈렸습니다. 그치만 그것 역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제가 혼란스러운 것 만큼 주인공도 혼란스러웠으니 이 혼돈을 고스란히 안고 읽는 것이 맞는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한바퀴 돌고 다시 돌고, 뱅그르 돌고. 그러다 점핑. 아니, 지금 나는 누구지?




마지막엔 책을 덮고선 배시시 웃었습니다. 

아, 니시자와 야스히코 스타일이 이런 것이로구나. 

그렇군요.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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