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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 (일반판)
반디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불안이 전염된 탓입니다.
현재는 좋지 않은 형편이라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시간이 지나가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기에 사람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그만 실수나 의도치 않았던 행동에 대한 사소한 오해로 인해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면 제 가느다란 신경은 금세 끊어져버릴 겁니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안고 살아야 하는 부당하고 부조리한 그것은 지금껏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악의입니다.
단편 소설집 <고발>의 작가는 반디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북한 작가입니다. 그는 자신이 써왔던 소설 중 북한 내에서는 절대로 출판할 수 없었던 것들을 탈북자인 친척에게 넘겨주어 북한의 비인권적인 실상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3년 전 국내에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탈북자가 아닌 현재 북한 거주 중인 작가가 쓴 소설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이슈가 되는 바람에 이 소설에 대한 문학적인 부분이나 어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깊이 살펴볼 기회가 적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차 올해(2017년) 3월 말, <고발>을 번역해 출판한 세계 20여 국의 출판 관계자들이 함께하는 콘퍼런스가 서울에서 열린다고 하고, 새로이 다산 책방 출판사에서 책을 내놓았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보자 싶었습니다. 책이 출판된 지 불과 한 달 정도 지났을 뿐인데, 벌써 네티즌 리뷰가 많이 올라와 있더군요. 그만큼 주목받고 있는 책인가 봅니다.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땐 아련한 향수 같은 게 느껴졌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시골의 할머니 댁에 가면 볼 수 있었던 풍경 같은 것이 떠올랐거든요. 문장에서 해방 전후의 문학의 냄새도 난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향수와 분위기는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제 뇌가 보여준 허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불안했고, 슬펐고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단련된 부분도 적지 않아 어떻게든 살아가려 애를 쓰고 버텨나갔습니다. 지키고자 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가족이었습니다. 어미는 아이를,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아들은 어머니를... 곁에 두고 바라보는 것조차 힘든 환경이어도 그들은 어떻게든 이겨내려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꾹꾹 눌려왔던 것이 터져버리면, 제정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평소와 같았던 행동이 반동의 행동이라며 사지로 끌려가는 걸 보는 가족들, 성분이 고약하다며 차별받는 날들... 이런 것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요.
문학 소설 속에서 공포를 느꼈습니다. 너무나 무서워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웠던 건 '복마전'이라는 단편이었는데요. 거친 길을 걸어가는 할머니를 친절하게 승용차에 태워준 김일성과 수행원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유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다치고, 유산되는 건 몰랐던지 모른체하려고 했던 건지... 자애로우신 어버이 수령께서 한 할머니를 도와주셨다는 선전 방송이 나올 때 정말 무서웠습니다. 이런 비슷한 일은 남한에도 있지 않은가. 정도의 경중만 다를 뿐 결국 그들이 사는 것과 우리가 사는 것이 비슷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곧 털어버렸습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의 고통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며 스스로를 나무랐습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너무 무겁고 무서워서 그랬나 봅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이 떠올랐습니다. 그 우화를 확장하여 돼지들이 아닌 농장 내 다른 동물들의 상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책 <고발>의 내용과 유사할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건, 이 책의 내용이 우화도, 그저 상상 속의 디스토피아의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실을 바탕으로 쓴 소설입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작가가 소설을 쓴지 벌써 25년 정도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나아졌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