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포크를 생각하다 - 식탁의 역사
비 윌슨 지음, 김명남 옮김 / 까치 / 2013년 12월
평점 :
어릴 때 부터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좋아하지 않아도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는데 마침 좋아하는 일이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보글 보글 끓는 구수한 된장찌개는 뚝배기에. 껍질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게 튀기듯이 구워내는 고등어는 프라이팬에. 요리를 하고,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무척 행복했습니다. 제가 처음 요리를 한 건, 석유 곤로(풍로)에서였습니다. 심지를 올려 성냥불을 붙이고 불의 크기를 조정하고 그리고 그 곤로 한개에서 온갖가지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가스렌지가 생기자 두개의 화구와 그릴에서 더 손쉽게 음식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원이 하나였을때는 식어빠진 고등어에 뜨거운 찌개를 먹었었다면, 드디어 세가지 음식을 한번에 따뜻하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전자렌지겸 오븐이 생겼을 때 저의 레시피는 더욱 광범위 해졌습니다. 로스트 치킨, 미트로프, 쿠키... 동생을 위해 피자도 구워줄 수 있었습니다. 남동생은 그 전자렌지를 이용해 처음으로 학교에 다녀오는 누나를 위해 카레밥을 지어주었습니다. 학교에 다녀와서 느낀 카레의 향기. 밥알 하나하나에 스민 카레의 맛이 행복했습니다.
어릴 때 부터 음식을 만든 데다 때로는 대량의 음식도 조리했기 때문에 명절에 음식 만드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지만 단 한가지. 치명적이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모든 날 선 것에 대한 두려움. 어린시절 무거운 칼로 재료를 썰며 얼마나 베었는지. 가위, 칼, 캔... 그래서 지금도 칼질이 두렵습니다. 숙련된 주부의 안보고 썰기 같은건 없습니다. 그러니,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처음으로 만능 슬라이서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요. 여러개의 칼날을 교체해가며 모든 것을 슬라이스, 챱, 채썰기 등등 다 할 수 있다는 시연자의 말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나이 24살. 엄마와 같이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토록 간절한 눈으로 물건을 탐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안전 손잡이까지 달린 그것. 이것만 있으면 칼질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여 더욱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엄마는 당시엔 비싼 편이었던 그것을 사주셨고, 신나서 집으로 돌아온 저는 5분도 안되어 양배추 채 더미를 붉게 물들였습니다.
저말고도 그런 사람이 또 있다는게 어찌나 반갑던지. <포크를 생각하다>의 저자 비 윌슨은 '선데이 텔레그래프'에 음식 칼럼을 쓰는 음식 저널리스트입니다. BBC방송의 '마스터 셰프'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한 능력자. 지식과 실력 모두 갖춘 저널리스트인데, 이사람도 손을 썰었습니다. 새로 산 일본제 채칼 '만돌린 슬라이서'에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많은 요리사들도 저처럼- 저는 그냥 우리집 요리사 - 피맛을 본 채칼을 봉인해두었다고 합니다.
저와 이상한 공통점을 가진 비 윌슨의 <포크를 생각하다>라는 책은 요리와 식사를 중심으로 인류사의 흐름을 짚어나갑니다.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방대한 내용을 어떻게 한 권의 책에 담아냈을까,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저 개인의 요리의 역사, 그 중 열원의 변화만 보아도 그토록 다양한데 - 심지어 연탄불에서 닭을 삶은 적도 있습니다 - 인류 전체로 본다면 '불'의 변화 뿐만이 아니라 냄비와 팬, 칼, 계량법, 갈아내는 방법, 먹기 위한 도구, 보존식의 변화 , 심지어 키친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내용들이 존재하는지!
책 뒤 표지에 [펭귄 북 - 음식과 음료 편집자]인 폴 레비의 추천사가 있습니다.
"나는 비 윌슨의 책을 펴자마자 푹 빠져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이 책에는 놀라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식사 예절이 어떻게 우리의 몸을 바꾸었는가 하는 이야기에서부터 기술변화가 우리 개개인의 식성을 어떻게 바꾸었는가하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윌슨은 이런 내용에 정통하고,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학술적이지 않은 자세로 서술했으며, 글 솜씨 또한 대단하다."
저는 이 추천사 이상으로 이 책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 추천사는 전혀 과장이 아니며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서는 제 주방에 있는 각종 조리기구들이 달라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 식품및 관련 전공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 어렵지 않고 끌어당기는 문체로 되어있어 전공자가 아니어도 기쁘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