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빈말로도 내 스타일이라고 할 수 없는 책 <채식주의자>를 읽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내가 숨 쉬는 공기까지 모두 찬찬히 들여다보면 온통 우울한 일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늘 블랙코미디나 시트콤 같은 삶을 추구하며 내면의 불안감을 주변에 전염시키기 않으려 애쓰며 살고 있기에, 이렇게 낮지만 아름다운 목소리로 독백하듯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코 제 스타일의 책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까스로 숨기고 있는 우울이, 슬픔이 빈틈을 발견하고 뛰쳐나오거든요.


웃으며 육식주의자라고 말하는 제가 읽는 <채식주의자>라니. 처음부터 책을 향해 손을 뻗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 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 막대들에 매달려 있는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p.18

 


영혜는 꿈을 꾸고 난 후 냉장고의 모든 고기, 육류를 버립니다. 달걀도, 우유도 심지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죽제품들도.

꿈은 매일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남편도 친정 식구들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동물성의 모든 것들을 먹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채식주의자라고 불러서는 안될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채식주의자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세상에 잘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녀의 고기 거부증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는 사람들이 나의 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고기'라는 건 그녀의 내면에 있는 동물적인 것에 대한 거부였을 텐데.


이 책은 연작 단편입니다. 처음의 <채식주의자> 단편 이후 2년이 지났습니다 영혜의 형부는 아들의 몽고반점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무심히 흘린 아내의 말, 처제에겐 아직도 조그마한 몽고반점이 있다는 이야기에 어떤 자극을 받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아티스트의 영감을 자극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형부는 처제의 몸을 통한 예술을 원했습니다. 어떻게 영혜를 설득해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해낼 수 있을까. 그녀의 몸에 아름다운 꽃들을 그려 넣고, 남자 - 자신 혹은 그냥 남자에게도 꽃을 그려 넣고 교합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하고 싶었습니다. 처제는 의외로 쉽게 자신의 몸에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합니다. 아마 그것이 꽃 그림이었기 때문이었을겁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그녀의 엉덩이를 보았다. 토실토실한 두 개의 둔덕 위로 흔히 천사의 미소라고 불리는, 옴폭하게 찍힌 두 개의 보조개가 있었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p.101

 


그의 성욕은 처제의 육체가 전해주는 인체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고개를 들지 않았고 오롯이 예술적인 감각만 깨어났습니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 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을 느끼지요. 그가 원했던 것은 에로틱함이 아니라 진정 예술이었구나....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룬 후 아내에게 들키고 난 그의 눈에 비쳤던 공포. 그가 저지른 건 결국 욕망의 핑계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참 이상합니다. 야한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오는데 전혀 불쾌하거나 야하다고 느껴지지가 않았습니다 인간의 고독과 고독이 부딪히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이것은 동물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식물의 수정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사건 1년 후 영혜는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의 언니가 주인공으로 자신의 괴로움과 고독을 쏟아냅니다. 영혜는 여전히 고기를 거부하고, 이제는 먹을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나무가 될 거라고. 아니, 나무라고. 나무는 광합성을 한다며 물만 있으면 된다고 우겨댑니다. 그러면서 점점 죽음을 향해갑니다.

 



아직 더운 새벽, 지우가 깨어나기 전까지의 서너 시간, 어떤 살아 있는 것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 시간. 영원처럼 길고, 늪처럼 바닥이 없는 시간. 빈 욕조에 웅크려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 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들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영혜가 들려준 환상 때문일까. 살아오는 동안 보았던 무수한 나무들, 무정한 바다처럼 세상을 뒤덮은 숲들의 물결이 그녀의 지친 몸을 휩싸며 타오른다.

-p. 205

 



내가 언니라면, 자신은 나무라며 링거조차 거부하는 동생이 있다면. 숲으로 나가 보여줄 텐데. 커다란 비료포대도 보여주고, 영양제를 꽂아둔 나무도 보여주고, 나무 의사도 만나게 해주고, 나아가서는 흙 속에 부족한 인(P)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보충하기 위해 벌레를 잡아먹는 식충식물도 보여주며 이 친구들도 물과 태양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줄 텐데. 관심을 보인다면 나아가서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들도 소통을 하며 살고 있다는 걸 가르쳐 줬을 텐데.... 소설 속의 언니는 제가 아닌 탓에 동생의 우울과 자신의 우울을 더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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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인생미답 - 살다 보면 누구나 마주하는 작고 소소한 질문들
김미경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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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언니, 살살 달래며 북돋워주는 타입이 아니라 애정 어린 호통으로 끌어주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부드러워졌지?"

라는 것이 저의 첫 감상이었습니다.

예전엔 페미닌한 정장의 빳빳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앙고라 니트 같다고 할까요? 어쩐지 제가 알고 있던 김미경 같지 않았습니다. 

조언을 하고 애정을 듬뿍 퍼주는데, 그리고 희망을 주는데 무언가 가운데가 텅 빈, 허전한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의 중반쯤에 깨닫게 되지요. 

아, 이 중앙의 빈 부분은 내가 채워야 하는 것이구나.


각자의 인생이 다르고 각자가 지닌 무게가 다르니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딱 찍어 줄 수 없는 거예요. 그건 세상 누구도 불가능하겠죠. 다른 사람에게 정답이었다고 내게도 정답인 건 아닐 테고요. 그러니까, 그 공간은 제 스스로 채워야만 하는 겁니다. 그 길을 선택하고도 조금 불안합니다. 이제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혹시 내가 버린 길이 옳은 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껏지나 지나온 길을 모두 더해서 현재의 내가 된 것이니 모든 걸 다 받아들이고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네,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자꾸만 흔들립니다. 불안하기도 하고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걱정됩니다. 미리 걱정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없다고 다짐하면서도 미래를 위한 설계를 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그 선을 긋기가 애매합니다. 강하다고, 강해야 한다고 되뇌는 것이 나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듭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하는 마음을 달래주는 언니, 김미경 강사의 이야기. <인생미답>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인생이건 직선으로만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단은 우리가 태어난 것도 그 굴곡을 지나온 거고요. 살아가는 인생 끝까지 수많은 곡선을 좌우로 좌우로 굽어지면서 살아가게 되는 거거든요. 그렇게 굽어지고 살아내고 굽어지고 살아내고를 하다 보면 하나의 직선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수많은 곡선들이 있죠.

  살다 보면 요즘 왜 이렇게 일이 안 되지? 안 풀리고 자꾸 꺾이지? 그런데 꺾였다는 건 또 다른 방향으로 꺾일 수 있다는 거거든요. 모든 태어난 자는 그렇게 곡선을 좌우로 움직이다가 결국에는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거죠. 지금 힘들다고, 내 인생이 왜 직선으로 풀리지 않느냐고 억울해하거나 속상해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 다 각자의 곡선을 지니고 있습니다. 곡선의 굽이침 속에서 우린 의연하게 살아낼 겁니다.


-p.276~275



이 책 <인생미답>은 한 번에 읽어버리지 말고 하루에 3~10분씩, 두어 편의 이야기를 읽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읽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경우를 대입해 보면서 스스로의 답을 끌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책 중간중간 놓여있는 QR코드가 궁금해 찍어보았더니 유튜브에 연결이 되어, 책 속에 나온 이야기를 김미경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더군요. 사실은 책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김미경의 있잖아...>라는 5분여의 녹음파일 중 반응이 좋았던 55편의 이야기와 새로운 15편의 이야기를 모아 <인생미답>이라는 책으로 엮은 것이었습니다. 어쩐지.

각 장마다 "있잖아요."로 시작해서 좀 성가셨거든요. 나에게 말을 걸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좋은데 왜 자꾸 있잖아요.... 있잖아요... 하는 걸까.. 했더니만. 이유가 있었네요.

아무튼 그런고로 하루에 5분에서 10분 정도 시간을 내어 책을 조각조각 읽기를 권합니다.


초판 한정으로 특별 부록 오디오 CD가 함께 제공되니 QR 찍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집 PC는 CD롬이 없으니 오디오 CD가 필요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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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의 일기 밀리언셀러 클럽 146
척 드리스켈 지음, 이효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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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위키백과를 뒤적이며 히틀러에 대해 읽어보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히틀러의 공식 결혼 경력은 한 번이었으며, 그밖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가 한 명 존재했으나 행방은 미상이다.

평소, 남자들은 권력을 쥐고 나면 왜 그다음은 많은 여자들을 취하려 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던 저로서는 사생아가 한 명 밖에 없다는 사실이 의아했습니다. 정말 한 명뿐일까요? 혹시 히틀러가 모르는 사생아가 또 있는 건 아닐까요. 심지어 그 아이에게 반은 유태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요. 아마 아돌프 히틀러는 무덤에서라도 뛰쳐나와 그 사실을 지우려 할 겁니다.


전직 미군에다 비밀 특수부대 출신인 게이지 하트 라인이지만 지금은 그저 별 볼일 없는 - 비폭력적인 의뢰만을 맡고 있는 프리랜서... 심부름꾼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그런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프랑스의 정보원 장의 의뢰로 한 건물에 도청기를 설치하러 갔다가 숨겨져 있던 일기장을 발견합니다. 호기심에 들춰본 그 일기는 1938년 그레타라는 여자가 남긴 것으로 기분 나쁜, 애인인 듯 한 남자 때문에 겪었던 고통의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이 적혀있는 일기라지만 그녀가 당해야 했던 수모와 고난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게이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일기장을 그곳에 두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마저 읽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일기를 그곳에서 가지고 나오기로 합니다. 6권이나 되는 일기를요.


게이지는 일기장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눈을 감은 채 뒤로 고개를 젖혔다. 이 불쌍한 유대인 여자에게서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보였다.

-p.81


변태적 성향을 가진 애인, 그것도 유부남인 자의 아이를 임신하고서 그의 아내의 도움으로 간신히 도망친 그녀를 안스러워하며 계속 일기를 읽어나가다가 그녀가 결국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머리를 스치는 생각. 그녀의 옛 남자 알도의 정체가 혹시?


그레타 드라이스바흐. 아돌프 히틀러의 오랜 하인. 애인이었다는 소문이 있음. 1938년에 가출 후 실종. 히틀러가 그녀의 살해를 명령했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있으나 철저한 조사에도 주변 인물이었던 드라이스바흐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찾을 수 없었다.

-p.85

게이지는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된 모니카에게 일기의 이야기를 하고, 그녀와 함께 책에 대해 잘 아는 고서점 주인이자 모니카의 사촌인 미셸을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일이 지독하게 꼬이기 시작해 그들의 앞날에 총 부림 칼부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그리고 제일 일어나지 말았으면 했던 일이 일어나고, 비폭력을 주장하던 게이지의 폭력성이 깨어나버립니다. 그야말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셈이었죠. 분명 잘 못 한건 그놈들이긴 한데, 게이지에게도 책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게, 그렇게 조심성 많은 사람이 그땐 왜 그런 걸까요.

그 일기에 등장하는 알도가 아돌프 히틀러라는 증거도 없는데, 생각해보면 게이지의 추측일 뿐인데 그 일기가 책으로 나온다면... 하는 생각에 판권을 노리는 사람들이 이상했습니다. 게이지는 그 일기로 책을 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생아로 컸을 아이 - 지금은 노인이겠지만- 에게 전해주려 했던 것인데,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으니 정말 난감했을 겁니다. 뭐 결국. 그 사생아는 진짜로 있는 사람이었다... 였지만요. (진짜 진짜는 아닙니다. 소설 속에서 그렇다는 거죠.)


처음 책의 정보를 접하고 상상했던 것과는 내용이 좀 다르게 진행되어서 약간 당황스럽긴 했습니다. 저는 좀 더 히틀러에 가까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요. 팩션이거나 네오 나치라거나 그런 쪽으로 진행될 거라고 예상을 했었습니다만, 전혀요. 액션물입니다. 게이지가 소설의 초반에 항공기 내 난동 승객을 제압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때라도 감을 잡았어야 했는데,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척 재미있더군요. 긴박하고 스릴 넘치게 진행됩니다. 게이지를 쫓는 사람들을 피하는 기술들이나 복수를 위해 적에게 접근하는 모습들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잔인한 장면들이 좀 있습니다. 적에게서 정보를 캐려고 고문하는 장면에서는 아무리 우리 편이지만 그러지 마! 그만둬!라고 중얼거렸습니다. 하지 마. 하지 마. 싫었어요. 고문 장면이 지나치게 상세해서 이런저런 소설들로 면역이 되어 있는 저조차 좀 힘들었습니다. 너의 상처는 이해하지만, 상상된단 말이야. 그만둬.

그럼에도 게이지는 참 매력적인 주인공입니다. 강하지만 약한 면이 있는 남자. 여자들은 그런 점에 끌리지 않나요? 앗, 저만 그런가요?

아무튼 게이지 하트라인은 시리즈를 통해 계속 제 앞에 나타날 모양입니다. 책 오른쪽 위에 Series 1이라고 찍혀 있는 걸 보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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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방정식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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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러니까 최초의 담임 선생님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폭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요. 반 아이가 잘못된 방법으로 연필을 잡고 글을 쓰는 걸 보고 '병신'이라고 하질 않나, "너희들을 가르치느니 내가 개를 데려다 앉혀놓고 가르치겠다."라고 하지 않나, 심한 감기에 걸린 아이가 욕지기를 느껴 화장실로 뛰어가다 말고 복도에서 구토하자 "왜 치우기 힘들게 여기다가 토하고 그래!" 하고 소리 지르질 않나...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저와, 같은 반 친구 엄마들은 혹시나 항의를 했다가 아이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을까, 지금 찍히면 선생님들끼리 이야기를 해서 학교생활 내내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의도 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눈물짓기도 했었습니다. 참, 바보 같죠. 제주로 이사 올 줄 알았다면 용기를 좀 내볼걸. 경북 교육청이나 학교에 이야기를 해 볼걸.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 하겠습니까. 많은 피해자를 낳고 선생님은 정년을 맞이하셨는걸요. 아이들에 용기를 주고 바른길로 인도해주는 선생님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아이들에게 폭언이라니. 그런 식의 말들을 뱉는 건 자신의 인격이 거기까지 밖에 안된다는 증거가 아닌가요.


그런 인격 함량 미달의 선생님이 미야베 미유키의 <음의 방정식>에도 등장합니다. 피난소 생활 체험 캠프라는 이름의 자연재해 대비 1박 2일 캠프를 하던 날 밤, 히노 다케시 선생이 아이들에게 찾아옵니다. 이런 느슨한 가상 체험 말고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해보라며 너희들 일곱 명 중 살아남을 여섯 명과 죽어야 할 한 명을 정하라고 말하고선 자리를 뜹니다. 아이들은 투표로 선출된 시모야마 요헤이를 죽을 아이로 정하고 낄낄거리는데요. 그 아이가 평소에도 약간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라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버리거든요. 히노 선생의 부적절한 언동으로 아이들은 모두 크고 작은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히노 선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극구 부인합니다. 언뜻 보기에 별건 아닌 것 같은 사건이지만 당사자들은 나름 심각했습니다. 히노 선생. 참, 말을 잘 못 가리는 사람입니다. 열혈 선생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의 언동이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요. 

이 사건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이 아키요시 쇼타의 부모님은 사립탐정을 고용합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했겠죠. 그들이 고용한 사립탐정은 스기무라 사부로! 제가 좋아하는 좋은 사람입니다. <누군가>, <이름 없는 독>,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 등장하는 행복한 탐정이죠. 드디어 회사를 관두고 본격 탐정이 되었군요. 벌이는 시원치 않을는지 모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만큼이나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들에게 진정한 평안을 찾아 줄 수 있는 탐정으로서 활약할 거라 생각하는데요. 제 예상이 틀리지 않아, 이 책에서도 아이들과 주변인들을 탐문하며 그들의 편에 섭니다. 

어쩐지 위치상으로는 반대편이라고 해야 하지만 사실은 같은 편일 수밖에 없는 학교 측 변호사로는 후지노 료코가 등장합니다. <솔로몬의 위증>에서 중학교 3학년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똑 부러지는 여학생으로 당시 모의재판에서는 검사였던 후지노 료코가 정말 법조계에 진출, 변호사가 되어 활약하니 앞으로도 그녀의 활약을 더 지켜보고 싶습니다. 

아직 중학생으로만 생각되던 후지노 료코가 벌써(?) 이렇게 자라서 34살이 되었다니. 스기무라와 함께 어른으로서 대등하게 만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만 보아도 기분이 묘해졌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책이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만난 것도 기뻤고, 무엇보다 이런 짧은 글에도 미야베 미유키는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구나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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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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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무덤이었다. 우리의 두려움이나 고통은 모두 폐허 아래 묻혀버렸다. 

-p.8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스물한 살의 '나'는 어린 시절 휴가지에서 샀던 2펜스 짜리 그림엽서에 그려져 있던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이 됩니다. 뚱뚱하고 수다스러운 반 호퍼 부인에게 연봉 90파운드에 고용되어 몬테카를로 코트다쥐르 호텔에서 그녀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수줍었던 어린 처녀가 그 호텔의 또 다른 손님 맥심 드 윈터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혼자만의 사랑의 열병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나'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식 같은 기타 형식은 생략하고 짧은 신혼여행과 간단한 쇼핑을 마치고 맨덜리 저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맥심의 갑작스러운 청혼 대목에서 기묘한 불길함을 느꼈습니다. 이상하게 뱃속이 꿀렁거렸습니다. 잘 된 일이잖아. 뭐지? 뭐가 문제지? 맥심이 마흔두 살, '나'는 스물한살이라서?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닌데... 십이지장이 뒤틀리는 이 느낌은 뭘까요? '나'와 맥심을 보며 괜히 불안해졌습니다.


맥심의 전처는 한밤중에 혼자서 보트를 타고 나갔다가 전복되는 바람에 죽었는데, 큰 키에 날씬하며 긴 검은 머리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레베카. '나'는 레베카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 맨덜리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여기까지. 저택에서의 생활은 그리 녹녹치 않았습니다. 특히 레베카가 친정에서부터 데리고 와 여전히 맨덜리에서 일하고 있는 댄버스 부인은 정말이지 어려운 존재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저택에 어울리는 품위를 갖추지 못 해서 얕잡아 보였는가 했더니, 단지 전 부인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로 미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시름 놓습니다. 그렇다면 궂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댄버스 부인은 '드 윈터 부인'을 미워했겠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첫날부터 댄버스 부인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였는지, 모든 이가 자신을 탐탁잖아 하는 것 같습니다. 고용인들도, 영지의 주민들도, 심지어 맥심까지도.


  오늘 오후처럼 답방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제대로 해낼까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내죠. '대체 맥심은 뭘 보고 저 여자랑 결혼한 걸까?'라고 말하는 듯 말이에요. 그러면 저 스스로도 자신이 없어져요. 해서는 안 될 결혼을 했다는 생각,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와 처음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저 여자는 레베카와 정말 다르군'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저도 안다고요.

-p.198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은 바로 '나'입니다. 하지만 저택에는 여전히 레베카가 존재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죽은 레베카는 이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살아있는 '내'가 허깨비처럼 떠도는 것만 같았습니다. 모두가 레베카의 이야기를 하고 '나'와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하찮은 작은 일들, 하나씩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지만 내게 있어 레베카는 보고 듣고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난 정말이지 레베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맥심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며 함께 살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그것 말고 아무런 바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늘 머릿속에, 꿈속에 레베카가 찾아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 스스로가 맨덜리의 손님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 했다. 레베카가 다니던 곳을 걷고 쉬던 곳에 몸을 누이는 손님. 안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손님. 말 한 마디 한 마디, 물건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내게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p.206


'내'가 레베카의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나' 스스로의 자격지심이나 소심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댄버스 부인은 '나'를 괴롭히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저택에서의 가장 큰 괴로움은 맥심이 숨기고 있던 비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과연 모든 괴로움을 떨쳐버리고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그들의 뒷이야기를 알 고 싶어서 저는 소설이 끝나자  처음으로 돌아와 19페이지까지 다시 읽었습니다. 그곳에 그들의 마지막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드 윈터 부인으로서의 전처 '레베카'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 일 뿐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아무도 불러주지 않습니다. 아니, 아마도 불렀겠죠. 적어도 맥심은.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그들만이 소유할 뿐, 저에게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그녀는 '드 윈터 부인' 이름으로만 불리다니. 레베카와 이름을 공유하는 셈이 아닌가요. 저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맥심이 아주 독특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한 그 이름을요.


멘덜리는 평화로웠다.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 영역 안에 누가 살든 어떤 문제가 생기고 투쟁이 벌어지든, 아무리 큰 고통과 불편이 있다 해도, 어떤 눈물이 흐르고 슬픔이 차올라도 맨덜리의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은 끄떡없다. 죽은 꽃은 이듬해면 다시 피고 같은 새들이 둥지를 지으며 같은 나무들이 무성하다. 오래된 이끼 냄새는 계속 대기 중에 머물 것이고 벌은 어김없이 찾아오며 찌르레기와 왜가리는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둥지를 마련할 것이다. 나비들이 잔디밭에서 즐거운 춤을 추고 거미들은 거미줄을 자아내며 작은 토끼들이 무성한 덤불 사이로 슬쩍 머리를 내밀겠지. 라일락과 인동덩굴이 자리를 지키고 백목련은 식당 창 아래에서 천천히 봉오리를 열리라. 이곳 맨덜리를 망가뜨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제까지나 이곳은 숲에 안전하게 둘러싸여 매력을 발산하고 바다는 작은 조약돌 해변을 들락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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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대프니 듀 모리에를 서스펜스의 여왕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1940년에 쓰인 이 <레베카>는 영화와 뮤지컬로 공연되면서 단 한 번도 절판이 된 적이 없는 명작인데요. 초반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보며 풋풋한 옛날식 사랑에 미소를 지었지만 아름답고 향기로운 대저택에 들어선 순간 제 얼굴은 점점 굳어갔습니다. 이젠 어떻게 되려나 조마조마 해졌고요. 탁월한 심리묘사와 서술이 저를 이 소설에 붙잡아 두었습니다. 쉬지 않고 책을 읽는 바람에 눈이 아파지는데도 책을 내려놓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는 어느새 레베카가 아닌 '나'의 '드 윈터 부인'을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맥심과 '내'가 행복과 평안을 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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