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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빈말로도 내 스타일이라고 할 수 없는 책 <채식주의자>를 읽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내가 숨 쉬는 공기까지 모두 찬찬히 들여다보면 온통 우울한 일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늘 블랙코미디나 시트콤 같은 삶을 추구하며 내면의 불안감을 주변에 전염시키기 않으려 애쓰며 살고 있기에, 이렇게 낮지만 아름다운 목소리로 독백하듯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코 제 스타일의 책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까스로 숨기고 있는 우울이, 슬픔이 빈틈을 발견하고 뛰쳐나오거든요.
웃으며 육식주의자라고 말하는 제가 읽는 <채식주의자>라니. 처음부터 책을 향해 손을 뻗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 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 막대들에 매달려 있는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p.18
영혜는 꿈을 꾸고 난 후 냉장고의 모든 고기, 육류를 버립니다. 달걀도, 우유도 심지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죽제품들도.
꿈은 매일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남편도 친정 식구들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동물성의 모든 것들을 먹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채식주의자라고 불러서는 안될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채식주의자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세상에 잘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녀의 고기 거부증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는 사람들이 나의 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고기'라는 건 그녀의 내면에 있는 동물적인 것에 대한 거부였을 텐데.
이 책은 연작 단편입니다. 처음의 <채식주의자> 단편 이후 2년이 지났습니다 영혜의 형부는 아들의 몽고반점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무심히 흘린 아내의 말, 처제에겐 아직도 조그마한 몽고반점이 있다는 이야기에 어떤 자극을 받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아티스트의 영감을 자극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형부는 처제의 몸을 통한 예술을 원했습니다. 어떻게 영혜를 설득해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해낼 수 있을까. 그녀의 몸에 아름다운 꽃들을 그려 넣고, 남자 - 자신 혹은 그냥 남자에게도 꽃을 그려 넣고 교합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하고 싶었습니다. 처제는 의외로 쉽게 자신의 몸에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합니다. 아마 그것이 꽃 그림이었기 때문이었을겁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그녀의 엉덩이를 보았다. 토실토실한 두 개의 둔덕 위로 흔히 천사의 미소라고 불리는, 옴폭하게 찍힌 두 개의 보조개가 있었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p.101
그의 성욕은 처제의 육체가 전해주는 인체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고개를 들지 않았고 오롯이 예술적인 감각만 깨어났습니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 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을 느끼지요. 그가 원했던 것은 에로틱함이 아니라 진정 예술이었구나....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룬 후 아내에게 들키고 난 그의 눈에 비쳤던 공포. 그가 저지른 건 결국 욕망의 핑계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참 이상합니다. 야한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오는데 전혀 불쾌하거나 야하다고 느껴지지가 않았습니다 인간의 고독과 고독이 부딪히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이것은 동물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식물의 수정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사건 1년 후 영혜는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의 언니가 주인공으로 자신의 괴로움과 고독을 쏟아냅니다. 영혜는 여전히 고기를 거부하고, 이제는 먹을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나무가 될 거라고. 아니, 나무라고. 나무는 광합성을 한다며 물만 있으면 된다고 우겨댑니다. 그러면서 점점 죽음을 향해갑니다.
아직 더운 새벽, 지우가 깨어나기 전까지의 서너 시간, 어떤 살아 있는 것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 시간. 영원처럼 길고, 늪처럼 바닥이 없는 시간. 빈 욕조에 웅크려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 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들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영혜가 들려준 환상 때문일까. 살아오는 동안 보았던 무수한 나무들, 무정한 바다처럼 세상을 뒤덮은 숲들의 물결이 그녀의 지친 몸을 휩싸며 타오른다.
-p. 205
내가 언니라면, 자신은 나무라며 링거조차 거부하는 동생이 있다면. 숲으로 나가 보여줄 텐데. 커다란 비료포대도 보여주고, 영양제를 꽂아둔 나무도 보여주고, 나무 의사도 만나게 해주고, 나아가서는 흙 속에 부족한 인(P)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보충하기 위해 벌레를 잡아먹는 식충식물도 보여주며 이 친구들도 물과 태양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줄 텐데. 관심을 보인다면 나아가서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들도 소통을 하며 살고 있다는 걸 가르쳐 줬을 텐데.... 소설 속의 언니는 제가 아닌 탓에 동생의 우울과 자신의 우울을 더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