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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집은 무덤이었다. 우리의 두려움이나 고통은 모두 폐허 아래 묻혀버렸다.
-p.8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스물한 살의 '나'는 어린 시절 휴가지에서 샀던 2펜스 짜리 그림엽서에 그려져 있던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이 됩니다. 뚱뚱하고 수다스러운 반 호퍼 부인에게 연봉 90파운드에 고용되어 몬테카를로 코트다쥐르 호텔에서 그녀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수줍었던 어린 처녀가 그 호텔의 또 다른 손님 맥심 드 윈터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혼자만의 사랑의 열병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나'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식 같은 기타 형식은 생략하고 짧은 신혼여행과 간단한 쇼핑을 마치고 맨덜리 저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맥심의 갑작스러운 청혼 대목에서 기묘한 불길함을 느꼈습니다. 이상하게 뱃속이 꿀렁거렸습니다. 잘 된 일이잖아. 뭐지? 뭐가 문제지? 맥심이 마흔두 살, '나'는 스물한살이라서?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닌데... 십이지장이 뒤틀리는 이 느낌은 뭘까요? '나'와 맥심을 보며 괜히 불안해졌습니다.
맥심의 전처는 한밤중에 혼자서 보트를 타고 나갔다가 전복되는 바람에 죽었는데, 큰 키에 날씬하며 긴 검은 머리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레베카. '나'는 레베카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 맨덜리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여기까지. 저택에서의 생활은 그리 녹녹치 않았습니다. 특히 레베카가 친정에서부터 데리고 와 여전히 맨덜리에서 일하고 있는 댄버스 부인은 정말이지 어려운 존재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저택에 어울리는 품위를 갖추지 못 해서 얕잡아 보였는가 했더니, 단지 전 부인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로 미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시름 놓습니다. 그렇다면 궂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댄버스 부인은 '드 윈터 부인'을 미워했겠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첫날부터 댄버스 부인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였는지, 모든 이가 자신을 탐탁잖아 하는 것 같습니다. 고용인들도, 영지의 주민들도, 심지어 맥심까지도.
오늘 오후처럼 답방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제대로 해낼까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내죠. '대체 맥심은 뭘 보고 저 여자랑 결혼한 걸까?'라고 말하는 듯 말이에요. 그러면 저 스스로도 자신이 없어져요. 해서는 안 될 결혼을 했다는 생각,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와 처음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저 여자는 레베카와 정말 다르군'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저도 안다고요.
-p.198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은 바로 '나'입니다. 하지만 저택에는 여전히 레베카가 존재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죽은 레베카는 이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살아있는 '내'가 허깨비처럼 떠도는 것만 같았습니다. 모두가 레베카의 이야기를 하고 '나'와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하찮은 작은 일들, 하나씩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지만 내게 있어 레베카는 보고 듣고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난 정말이지 레베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맥심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며 함께 살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그것 말고 아무런 바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늘 머릿속에, 꿈속에 레베카가 찾아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 스스로가 맨덜리의 손님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 했다. 레베카가 다니던 곳을 걷고 쉬던 곳에 몸을 누이는 손님. 안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손님. 말 한 마디 한 마디, 물건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내게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p.206
'내'가 레베카의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나' 스스로의 자격지심이나 소심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댄버스 부인은 '나'를 괴롭히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저택에서의 가장 큰 괴로움은 맥심이 숨기고 있던 비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과연 모든 괴로움을 떨쳐버리고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그들의 뒷이야기를 알 고 싶어서 저는 소설이 끝나자 처음으로 돌아와 19페이지까지 다시 읽었습니다. 그곳에 그들의 마지막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드 윈터 부인으로서의 전처 '레베카'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 일 뿐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아무도 불러주지 않습니다. 아니, 아마도 불렀겠죠. 적어도 맥심은.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그들만이 소유할 뿐, 저에게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그녀는 '드 윈터 부인' 이름으로만 불리다니. 레베카와 이름을 공유하는 셈이 아닌가요. 저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맥심이 아주 독특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한 그 이름을요.
멘덜리는 평화로웠다.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 영역 안에 누가 살든 어떤 문제가 생기고 투쟁이 벌어지든, 아무리 큰 고통과 불편이 있다 해도, 어떤 눈물이 흐르고 슬픔이 차올라도 맨덜리의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은 끄떡없다. 죽은 꽃은 이듬해면 다시 피고 같은 새들이 둥지를 지으며 같은 나무들이 무성하다. 오래된 이끼 냄새는 계속 대기 중에 머물 것이고 벌은 어김없이 찾아오며 찌르레기와 왜가리는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둥지를 마련할 것이다. 나비들이 잔디밭에서 즐거운 춤을 추고 거미들은 거미줄을 자아내며 작은 토끼들이 무성한 덤불 사이로 슬쩍 머리를 내밀겠지. 라일락과 인동덩굴이 자리를 지키고 백목련은 식당 창 아래에서 천천히 봉오리를 열리라. 이곳 맨덜리를 망가뜨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제까지나 이곳은 숲에 안전하게 둘러싸여 매력을 발산하고 바다는 작은 조약돌 해변을 들락거릴 것이다.
-p.543
어째서 대프니 듀 모리에를 서스펜스의 여왕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1940년에 쓰인 이 <레베카>는 영화와 뮤지컬로 공연되면서 단 한 번도 절판이 된 적이 없는 명작인데요. 초반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보며 풋풋한 옛날식 사랑에 미소를 지었지만 아름답고 향기로운 대저택에 들어선 순간 제 얼굴은 점점 굳어갔습니다. 이젠 어떻게 되려나 조마조마 해졌고요. 탁월한 심리묘사와 서술이 저를 이 소설에 붙잡아 두었습니다. 쉬지 않고 책을 읽는 바람에 눈이 아파지는데도 책을 내려놓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는 어느새 레베카가 아닌 '나'의 '드 윈터 부인'을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맥심과 '내'가 행복과 평안을 찾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