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여왕과 공주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Cha Tea 홍차 교실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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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여왕이나 공주에 대한 환상이 있었어요. 하지만 조금 자라면서 - 어쩌면 베르사유의 장미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였던 거 같은데요, 왕실에서 사는 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라고 여기게 되었죠. 넓고 화려하고 풍요로운 거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늘 싸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게 왕족이라면 절대 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삶이라니. 정해진 규율대로 살아야 하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자유까지 억제된 곳에서 살아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영국의 여왕과 공주>라는 책을 앞에 두고서도 찬란하고 화려한 생활이 있을 거라는 상상은 아예 하지 않았어요.


이들은 어떻게 그 긴 시간을 살아왔을까. 행복한 시절은 있었을까. 그리고 주어진 틀 안에서 스스로의 행복을 느끼는 방법을 찾았을까 그런 궁금증을 안고서 시작했죠. 그래서인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영국의 이야기를 볼 수 있었어요.


영국의 여왕과 공주


<영국의 여왕과 공주>는 영국 왕실에 차 문화를 심은 브라간사의 캐서린 왕비 이후의 여왕, 왕비들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황실의 일원이 되면 프린세스라고 하니 공주는 왕가와 관련된 여성들을 두루 표현한 거라고 생각하면 좋을 거예요.


수많은 바람 상대를 두고서도 왕비만을 아내로 여기며 사랑한 왕과 함께 하는 삶은 과연 어땠을까 상상하는 거 만으로도 정말 싫었어요. 현실에 순응 혹은 적응하면서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했던 왕비도 있었고, 왕을 증오하면서 버텨나간 왕비도 있었어요.



 


이 책의 또 하나의 관점이라면 바로 영국의 티 문화의 전파와 정착, 변화하는 역사를 담았다는 거예요. 애프터눈 티는 왜 생겼으며 그 시간대는 어떻게 정해졌는지. 찻잔의 문양이나 스타일의 변화 등을 사진과 함께 다루었어요.


여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한 서사 그리고 차 문화 이렇게 두 가지 관점으로 보면 재미있는 책이에요. 원래 AK커뮤니케이션즈에서 출판하는 트라비아는 창작자들을 위해 나온 시리즈예요. 그래서 여기서 어떤 영감을 얻을 수도 있고 자료로 사용할 수도 있죠.


하지만 저처럼 창작자가 아닌 일반 독자 역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참 잘 나왔어요. 수많은 사진 자료들과 함께 서술된 스토리는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했거든요. 지금까지 몰랐던 세상에 대한 신기함과 놀라움을 느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게 읽었어요.

 



22명의 여왕과 왕비의 이야기를 수록했기에 정말 많은 걸 알게 되었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놀랐던 건 엘리자베스 2세가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아기였다는 거였어요. 게다가 제왕절개로 태어났다니 그 시절에도 가능했던 일인가 하여 놀랐어요. 당시에는 최신 의학이었다죠.


이 책을 읽을 때는 어느 정도의 집중이 필요했어요. 비슷한 이름이 자꾸 나와서 헷갈리기 때문이죠. 지금 말하는 캐롤라인이 아까 그 캐롤라인이 아니라는 걸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으니까요. 한 시대의 이야기를 각자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풀어내는 부분도 있으니까 정말 주의가 필요하답니다.


상상하면서 읽다 보면 자연히 어우러지면서 연결되긴 하는데요, 역시 시끌벅적한 커피숍보다는 조용한 집에서 독서가 더 잘 되더라고요. 재미있게 술술 읽히는 책이지만 어느 정도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



화려함이 가득한 로열패밀리를 다룬 책이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궁정과 별궁, 정원, 티웨어가 무색하게 전체적으로는 무겁고 힘든 이야기였어요. 결과가 좋았던 스토리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수많은 고통과 고독은 제가 상상하는 그 범위 이상이었을 테니까요.


<영국의 여왕과 공주>는 분량에 비해서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긴 책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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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식료품점
제임스 맥브라이드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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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맥브라이드의 소설은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예전에 <어메이징 브루클린>을 만났을 때에도 초반이 약간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아무래도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 제가 녹아들기까지 어느 정도 워밍업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하지만 모셰가 누구인지, 초나, 도도, 네이트 등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이해하고 난 후에는 물 흐르듯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임스 맥브라이드

현대 미국 문학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 중 하나입니다. 이전의 <어메이징 브루클린>과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 식료품점>은 인종차별과 이민자들의 삶, 1920년대의 팍팍했던 삶 속에서도 이를 이겨내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잘 담았습니다.


<하늘과 땅 식료품점>은 아마존과 반스 앤 노블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다양한 추천사가 함께하는 도서라 어렵지는 않을까, 혹은 요란한 빈 수레는 아닐까 걱정했던 거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임스 맥브라이드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믿고 읽어 나갔습니다.


이 소설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하기로 결정할 정도로 매력적인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펜실베이니아의 '치킨 힐'을 배경으로 하여 복잡한 인간상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들에게 익숙해지는데 필요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금세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 식료품점



소설은 1972년 펜실베이니아에서 발견된 백골 시신으로 시작합니다. 경찰은 노인 말라기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찾아옵니다. 시신과 함께 발견된 메주자(팬던트 비슷하게 생긴)에 히브리어로 그를 지목하는 듯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허리케인이 지나간 뒤, 노인 말라기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다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설은 말라기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댄서였던 시절인 1920년대로 거슬러갑니다. 발견된 백골은 누구이며 왜 메주자가 그의 곁에 있었는지 궁금증을 안고서 책을 읽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추리물이 아닙니다. 히틀러가 아직 공직에 오르기도 전의 시기에 이민자와 유색인종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흑인과 유대인, 이민자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때로는 이해하고, 때로는 경계하면서 조금씩 연대를 갖게 됩니다. 쵸나의 하늘과 땅 식료품점이 중심이 되어서 사람들은 점점 함께 하게 됩니다. 아직까지 미국에 평등이 없고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던 시기였기에 더욱 소중한 관계였습니다.


책 속으로




사고로 청력을 잃은 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까지 세상을 떠나 오갈 데 없게 된 흑인 소년 도도는 모셰에게 맡겨집니다. 모셰는 자신이 운영하는 극장 한구석을 내주고 거기서 생활하게 하지만 초나는 그 사실에 분개하며 당장 아이를 데리러 오라고 합니다.


정부는 도도를 특수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하지만, 학교라고 표현하는 그곳은 악명 높은 감금시설 '팬허스트 주립 정신병원'이었습니다. 이후에 시설의 묘사가 자세히 등장하는데, 멀쩡한 사람도 정신질환을 앓을 수밖에 없게 될 정도로 파렴치한 곳입니다.


초나는 평소 모든 이들을 사랑하며 화합하기를 원했고, 그런 그녀를 모셰는 깊이 사랑했습니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초나에게 도도는 마치 자신의 아이와 같은 존재였고 마음 깊이 사랑했습니다. 인종과 관계없이 모두가 평화롭기를 원했기에 KKK단을 비난하는 글을 쓰곤 했습니다.


그렇기에 백인 권력자들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고, 설상가상 고등학생 때부터 초나를 마음에 두었던 의사 '닥'은 애증을 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의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도도는 정신병원에 잡혀들어가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를 구출하려 합니다.


이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각 캐릭터마다 인생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작가는 하나하나에 사연을 부여하여 모든 이들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곤 합니다. 각자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얽히면서 살아가는 게 사람이고 인생이기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2020년대에 만나는 1920년대 이야기

<하늘과 땅 식료품점>은 미국 사회에서의 인종 간의 편견과 경계, 갈등을 깊이 다룹니다. 생명을 부여받은 캐릭터는 많지만 소설의 말미에서 모두의 끝을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이후로의 희망과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인생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흑인과 유대인으로 갈리는 게 아니라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에 따라서도 서로 차별을 하는 게 참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화합합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나가면서도 스스로를 구원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이겨냅니다.


백인 남성인 '닥'의 행동에 분노하고 소년 '도도'를 보며 안타까웠습니다. 초나를 마음속 깊이 사랑한 남자 모셰의 이야기까지도 모두 감정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차별과 폭력이 난무하는 스토리가 1920년~30년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면서 모두 끝났다고 할 수 없다는 게 정말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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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부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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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는 아시다시피 일본의 소설가입니다. 올해가 탄생 130주년인데요, 생전에 정말 많은 작품을 내었습니다. 그가 만든 다양한 장르의 스토리 중에서 '기담'만을 엄선한 <에도가와 란포 기담집>이 있습니다. 부커에서 내놓은 신간 소설인데, 정말 재미있습니다.



단편을 모아 엮은 책으로 한 편 한 편의 완성도가 높아서, 짧은 스토리를 좋아하지 않는 분도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장면과 배경 묘사가 얼마나 좋은지, 방안 편안한 자리에서 읽는데도 점점 이야기 속으로 스며들어 20세기 초반의 일본에 머무는 거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몰입감이 좋은 단편, 여름에 읽으면 좋을 기이한 이야기를 원한다면 바로 <에도가와 란포 기담집>입니다. 일본 호러라고 하면 귀신이나 살인마를 연상하게 되는데, 그와는 결이 좀 다릅니다. 정말 분위기 자체만으로도 기이하고 어쩌면 있을법한 스토리를 에도가와 란포 스타일로 서술하기에 혹시 실화를 듣고 창작을 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책 표지 디자인이 생각보다 얌전한 거 같은데 - 역시 란포의 소설을 통해 사람은 겉만 보아서는 모른다는 걸 종종 느끼듯, 이 도서 역시 그렇습니다. 게다가 표지 후가공이 얼마나 좋은지 손안에 착 붙는 건 물론이고, 껴안고 가만히 쓰다듬으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정말 묘한 책입니다.



​에도가와 란포는 일본 미스터리, 호러, 추리물의 대표 작가로 보시다시피 필명은 에드거 앨런 포에서 따왔습니다. 주요 작품은 이번 <에도가와 란포 기담집>에 수록된 거울 지옥, 애벌레, 인간의 자 등이 있는데요, 이 단편들만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추리물로는 명탐정 아케치 코고로 시리즈가 있는데, 미스터리 코믹스를 즐기는 분은 벌써 어? 하는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년탐정 김전일에서는  매력적인 경찰 캐릭터 아케치 켄고, 명탐정 코난에서는 미워할 수 없는 탐정인 모리 코고로로 활동 중입니다.



그 외에도 문호 스트레이독스에서는 에도가와 란포라는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능력은 초추리. 현장 정보 만으로도 빠르게 추리해 내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기담집에서는 아케치 코고로를 만날 수는 없지만 '메라 박사의 이상한 범죄'에서 작가 본인인듯한 캐릭터를 만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16편의 기이한 이야기


쌍생아 - 일란성 쌍생아로 태어났지만 성향과 품성은 너무 달랐던 남자의 이야기. 자업자득. 제 손으로 무덤 파기


붉은 방 - 99명을 교묘한 방식으로 살해한 남자 T의 고백. 그가 노리는 100번째 타깃은?


백일몽 - 늦은 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대중들에게 너무나도 당당히 살인을 고백하는 남자. 지어낸 이야기라 여기며 웃고 환호하는 사람들. 주인공이 본 밀랍 인형은 정말 3,721동안 남자가 천천히 시랍으로 만든 그녀의 아내일까


1인 2역 - 아내에게 장난을 걸고 싶었던 난봉꾼 남편이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침실에 잠입한다. 두려워하는 걸 보고 기뻤지만, 아내는 점점 그 가상 인물에 빠져드는데.


인간 의자 - 나에게 커다란 소파, 안락의자 두려움을 남긴 소설. 그녀에게 보낸 편지를 함께 읽다 보면 누구나 그럴 것.


가면무도회 - 자극을 추구하는 '20일회' 하지만 수많은 퇴폐, 파렴치함 속에서도 결코 용납 못 할 일은 존재했다.


춤추는 난쟁이 - 이토록 잔인하고 무례한 인간들이라니! 당해도 싸긴 하지만 결과는 너무 참혹했다. 애드가 앨런 포의 '절름발이 개구리'를 연상케 하면서도 결이 다른 스토리


독풀 - 낙태를 위한 풀이 필요했던 시절의 씁쓸한 이야기


화성의 운하 - 숲속에서 마주한 기묘한 감각과 경험. 소름 돋는 부분은 분명, 도입 부분의 "또다시 이곳으로 와버렸다는 소름 돋는 매력이 나를 떨리게 만들었다.-p.169" 일 것.


오세이의 등장 - 부유하지만 병약한 남편을 두고서 불륜 중인 오세이. 가쿠타로의 불운한 죽음. 만일 집 안에 골동품 궤가 있다면 두려워졌을만한 이야기. 물론 당시의 일본.


사람이 아닌 슬픔 - 부잣집에 시집가 시부모님과 남편의 사랑을 받은 교코. 밤마다 사라지는 남편의 뒤를 밟다가 외도가 아닐까 의심스러운 대화를 듣게 되고. 상대 여자를 찾으려 노력하는데... 결국. 비극.


거울 지옥 - 두려움과 궁금증.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 안쪽이 거울로 된 구체 안에 들어가면 정말 어떤 광경을 보게 될지.


목마는 돌아간다 - 기담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아내와 아이가 있는 나팔수 아저씨가 18세 아가씨에게 호감 혹은 연정을 가지고 혼자 썸을 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이하긴 하다.


애벌레 - 당시 일본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분위기를 가졌다며 금서로 지정했던 소설. 전쟁에서 팔, 다리, 청력을 잃은 남편을 돌보는 아내. 금지된 욕망만이 자신을 지배하는 걸 느끼며 아내/남편 모두 짐승이 아닐까 하는 감정에 빠져든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이지만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소설.


누름꽃과 여행하는 남자 - 기차 안에서 만난 노인이 들려주는 기이한 이야기.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는 한데, 어쩌면...이라는 가능성을 여는 건 에도가와 란포의 필력이 아닐까.


메라 박사의 이상한 범죄 - 한 건물에서 자꾸만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과연 자신이 직접 선택한 결과일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교묘하게 꾸며진 살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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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크와 팩트 - 왜 합리적 인류는 때때로 멍청해지는가
데이비드 로버트 그라임스 지음, 김보은 옮김 / 디플롯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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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판단, 충분한 고민, 정보를 모아서 분석하여 정리하는 힘.


이런 모든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도 정말 얼토당토않은 사기에 걸려들거나 음모론에 휘말리는 경우를 뉴스에서 종종 보곤 합니다. 저렇게 똑똑한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고? 혹시 한 패 아니야?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죠.



때로는 오히려 그들이 옳은 말을 하는데도,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 - 때로는 그게 편향된 사고라 할지라도 -에 비추어 틀리다고 판단하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판단할 때는 그동안 쌓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가벼운 의견이나 판단과 관련된 일이라면 시행착오를 통해서 하나하나 배워나가면 됩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판단과 결정은 인류의 역사를 흔들기도 하고, 삶을 위태롭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넓은 시야를 가지고 다각도로 분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페이크와 팩트


이 책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렇게 좋은 책은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특히 SNS와 유튜브 등의 영상의 활용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기에, 올바른 정보와 그렇지 않은 걸 가리는 눈이 필요합니다. 예전의 언론 조작 정도는 우스울 정도로 경중을 따지지 않는 가짜 뉴스가 활보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잘못된 내용을 받아들이면 그 후로는 알고리즘이 알아서 계속 비슷비슷한 자극적인 혹은 잘못된 정보를 물어옵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만을 추려서 보고 알고리즘은 - 편리하게도 - 관심사를 가져다준다는 건 마냥 좋은 건 아닙니다. 왜,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똑같은 현상을 보아도 각자의 기준에 따라서 보고 판단하는데, 애초부터 편향된 정보만을 받아들이는 건 정말 위험합니다.



굳이 국제 정세나 경제 쪽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가짜 건강 정보 같은 건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의사를 멀리하고 자연치유를 가까이하라는 식의 글은 정말 많이 보셨을 겁니다. 예를 들어 당뇨에 어떤 식물 잎이 좋다더라는 소리를 들으면 처방을 끊고 맹신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반대하면 정말 그러한가에 대한 생각을 하기보다는 '해당 식물 잎'을 검색해서 나온 가짜 정보를 보여주면서, 거 봐라. 내 말이 맞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는 이미 식물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나온 결과입니다. <페이크와 팩트>는 이와 같은 오류를 지적하며 어떻게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지를 다룹니다.




데이비드 로버트 그라임스


<페이크와 팩트>의 저자는 물리학자이며 생물 통계학자, 암 연구자입니다. 현장에서 많은 암 환자들을 만났으며 이들을 힘들게 만드는 자연치유 혹은 대체 의학으로 그들에게 금전적인 이득을 꾀하려는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수도에 불소를 포함하는 것에 대한 반대, 백신 접종 반대 등은 음모론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개탄하며 논문과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편견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지만


바른 판단을 하기 위한 노력과 자신의 태도를 검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과학은 팩트만 말한다는 사실 역시 진실이 아닙니다.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여기기보다는 이게 맞을 텐데 하는 기대감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과학', '연구', '검증'이라는 단어가 활개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건강보조식품을 구입할 때 인체적용시험 결과가 첨부된 걸 보셨을 겁니다. 이때 참여 인원을 확인해 본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30~40대 여성 36명을 대상으로 했다는 단서가 있다면 거의 무의미하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실험 군과 대조군으로 나누어 테스트하는데, 각각 18명인 셈이 됩니다. 그리고 실험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가 대학에 다닐 때에는 가장 큰 결괏값과 작은 결괏값 (혹은 그룹)은 제외하였습니다. 그러면 결국 16명의 데이터입니다. 160명도 1,600명도 아닌 16명이 참여한 겁니다. 만일 70%가량에서 긍정적인 데이터가 나왔다면 11명에서만 나타난 결과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이런 내용을 디테일하게 확인하지 않습니다. 단지 인체적용시험 결과가 있으니까 꾸준히 먹으면 효과가 있겠구나 하면서 받아들입니다. 물론 먹었을 때 컨디션이 달라진다거나 변화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모두 다 플라세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정보를 받아들일 때는 이게 팩트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고의로 속이는 자들


세상에는 일부러 결과를 누락시키거나 과장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이득을 취하려는 집단이 상당히 많습니다. 앞서 거론한 거처럼 상식이 부족하거나 배움이 짧아서 걸려드는 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뻔한 수작에 속았다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어제도 속았고, 지금도 속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안전과 세상을 올바로 보는 눈을 키우기 위해서 <페이크와 팩트>를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총평


들어가는 글만을 읽었는데도, 이렇게 좋은 책은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께도 제법 되고 가끔 어려운 용어나 설명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저도 사실 중간에 확률 부분에서 잘 이해가 안 가서 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만약 읽다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은 아아... 그렇구나 하면서 일단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건너뛰며 읽는다 하더라도 얻어지는 게 많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정말 논리 정연하고 딱딱 떨어지는 문장을 만나서 정말 좋았습니다.



너무나 깔끔하게 잘 나와서 번역가가 누군가 책 뒷면을 확인했을 정도로 정돈된 도서입니다. 따라서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싶거나 속지 않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면 <페이크와 팩트>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편협하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어리석으며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이다.

- 윌리엄 드러먼드 오브 로지아몬드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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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망자, ‘괴민연’에서의 기록과 추리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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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절대 지나칠 수 없는 작가들이 있죠. 그중 하나가 미쓰다 신조일 텐데요, 1994년 단편으로 데뷔한 이후 21세기부터 눈부신 활약을 벌여오고 있어요. 다양한 세계관이 있는데, 저는 그중에서 '미쓰다 신조'라는 작가가 주인공인 '작가 시리즈'를 좋아해요. 그리고 호러의 진수를 보여주는 '집 시리즈'도 퍽 좋아해요. ​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 '사상학 탐정 시리즈'와 '도조 겐야 시리즈'는 읽지 못했어요. 앞으로 더 만나볼 작품이 남아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런데 이번에 '괴민연 시리즈'가 새로 나와버렸네요. 호러와 미스터리 둘 다 좋아하는 저는 콘셉트만 보고서도, 페이지를 열기 전부터 흥미롭겠다고 여겼어요! ​ 그런데, <걷는 망자>를 다 읽고 났더니 '사상학 탐정 시리즈'와 '도조 겐야 시리즈'도 꼭 봐야겠다는 조급함이 들기 시작했어요.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시면 돼요. 어쩜 이런 인연이 다 있을까, 미쓰다 신조 세계관의 확장인 건가! ​ <걷는 망자>는 명탐정 도조 겐야가 소속(?) 된 무묘대학교의 괴이 민속한 연구실에서 거의 붙박이처럼 생활+연구+소설을 쓰고 있는 덴큐 마히토와 대학생인 도쇼 아이의 인연으로 시작해요. 겁이 많은 덴큐 마히토는 도쇼 아이가 들려주는 괴이한 이야기를 듣고 지혜를 쥐어짜서 미스터리를 풀어내죠. ​ 예전에 잠밤기(잠들 수 없는 밤의 기묘한 이야기)라는 블로그가 있었는데요, 주인장인 더링(송준의)님이 제보받은 이야기를 정리해서 올리곤 했어요. 정말 무서운 이야기들이 올라와서 읽기만 해도 소름이 오소소 돋았는데, 회원들은 필사적으로 이를 웃음으로 승화시키곤 했었어요. 그래야 잠들 수 있으니까요. ​ 덴큐 마히토도 아마 그런 맥락이었던 거 같아요. -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도쇼 아이는 그런 그가 은연중에 마음에 드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던 첫 번째 사건인 '걷는 망자'를 시작으로 계속 그를 만나러 와요. 물론 도조 겐야가 보낸 편지를 읽어주러 방문하기도 하지만, 싫으면 절대 찾아가지 않았을 거예요. ​ 그도 그럴 것이 도조 겐야는 아까 말했듯이 괴이 민속학 연구를 하잖아요.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온갖 괴이한 물건들이 쌓여있거든요. 이번의 이야기는 어떻게 추리해낼지 살짝 기대를 하기도 하면서 방문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한답니다. ​ 도쇼 아이는 호러를 물어오고, 덴큐 마히토는 그걸 풀어나가는 콤비가 정말 멋들어진 소설이에요. 연작 단편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은 별개의 이야기이면서 완성도가 높아서 보는 즐거움이 있답니다. 처음에는 호러+미스터리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상학 탐정 시리즈'를 생각해 보면 - 어쩌면 러브 스토리일지도. ​ 추천사 중에서 산케이 신문에서는 '도조 겐야 시리즈'의 스핀 오프라고 하는데, 저는 '사상학 탐정 시리즈'와 연계해서 깜짝 놀랐으니까. <걷는 망자>를 읽었다면 두 시리즈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거 같아요. ​ 공포와 미스터리의 절묘한 조합! <걷는 망자>만으로도 '괴민연 시리즈'를 계속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어요. ​ ……머리가 없다. 대문 밖에 있는 사람 같은 형체에는 머리 부분이 없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햇살이 강해서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흰색 바탕에 빨간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새빨간 구두 차림이었다. 짧은 옷소매에서 나와 있어야 할 두 팔도, 머리와 마찬가지로 없었다. 다만 가슴은 몹시 컸다. 두 다리는 붙어 있었지만, 그것도 어쩐지 이상했다. 닭 같은……. -p.121 ​ 다섯 개의 무섭고 괴이한 이야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혹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들과 관련된 스토리를 대상으로 해요. 묘사가 절묘해서 살아있는 듯, 죽은 듯 걸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이 안갯속에서 흔들흔들하는 거만 같아요. 그런데 이런 두려움을 덴큐 마히토가 현실적으로, 논리적으로 풀어내면서 괴이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요. ​ ​ ​ 하지만 저는 그게 더 무서웠어요. 차라리 괴이, 유령, 요물 같은 것이라면 판타지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 텐데, 논리로 풀어 낸 결론은 너무나도 잔혹해서 두려웠어요. ​ <걷는 망자>는 김은모님이 번역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믿고 보는 김은모♥라고 여기는 터라. 이 책도 마음 놓고 재미있게 읽었어요. 파자를 이용하거나 이니그마도 제법 있었는데, 번역할 때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이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답니다. ​ 스토리 구성력이 좋은 작가 미쓰다 신조와 믿고 보는 김은모 조합으로 재미있게 읽은 책 <걷는 망자>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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