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언덕 중간의 집 ㅣ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이정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며칠 뒤면 딸아이의 생일입니다. 우리 둘이 세상에서 만난 지 벌써 만으로 15년이 되었군요. 한 몸이었을 때를 제외하고도 그렇게나 되다니. 감격스럽습니다. 딸과 저는 보통의 다른 모녀 사이와는 다른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좋은 뜻으로 말하는 분도 있고, 좋지 않은 뜻으로 말하는 분도 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지금과 같은 관계가 된 것은 일종의 전우애 같은 것이 섞여 있기 때문이니 전쟁을 겪지 않은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요.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와 함께 목숨을 건 대모험을 합니다. 여물지 않은 머리로 산도를 뚫고 나오는 데에는 엄마가 밀어내는 힘과 아이의 나오려는 힘이 함께 제대로 박자를 맞추어야 합니다. 죽을 만큼 아파야 아이가 태어나지만, 어쩌면 아기의 아픔이 엄마보다 더 할지도 모릅니다. 아픔을 겪고 세상에 나왔더니 눈부신 조명에 처음 보는 생명체들이 우글거립니다.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것을 시작으로 아기는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법과 하나의 온전한 생명체로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익히게 됩니다. 그 과정에는 엄마와 아빠 같은 양육자의 역할이 무척 중요합니다. 초보 인간이 초보 부모와 함께 하는 날들이니 얼마나 위태롭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슬기롭게 헤쳐나갑니다. 이 모든 것이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요.
그렇지만, 강요된 모성애는 옳지 않습니다. 엄마니까 이렇게 해야 하고, 희생해야 하고, 마땅히 해야 하고... 한두 시간씩 쪼개어 대여섯 번 자는 생활이 이어지면, 포로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누군가 다정한 말로 다독여주고, 육아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시큰거리는 손목으로 아이를 씻기고 미역국도 끓여 먹어야 합니다. 아기 옷이며 수십 장의 가제 손수건을 손빨래해서 널어놓으면 철없는 남편이 밥 타령을 합니다. 싫은 소리라도 할라치면 다른 집 여자들은 그러고 몸매 관리까지 잘만 하던데 너는 게을러 가지고 집안 꼴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타박합니다. 자괴감이 듭니다. 정말일까, 남편의 말대로 제 몸 사리느라 엄살을 떠는 걸까. 다른 여자들은 애를 업고 마트 가서 장도 잘만 봐오는데, 게을러빠져서 남편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전화했다며 화를 냅니다. 저혈압으로 갑자기 쓰러진 날에도 창백한 얼굴로 혼자 병원을 가고 그리고 청소를 하고 아기를 봅니다. 제대로 못해냈다는 말을 듣기 싫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수많은 전쟁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 한 조각의 전투를 떠올렸습니다. <언덕 중간의 집> 의 리사코와 미즈호를 보면서요.
세 살난 딸을 둔 전업주부 리사코는 형사재판의 보충 재판원 (배심원)으로 선정됩니다. 미즈호라는 여자가 젖먹이 아기를 욕조에 빠뜨려 죽게 만든 사건의 재판이었는데요. 비슷한 나이에다 아기가 있는 리사코는 미즈호의 사건 재판이 진행될수록 그녀에게 감정 이입하게 되고, 그녀의 시어머니, 남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의 속내를 깨닫게 됩니다. 가족과 함께 있지만 자신은 혼자였다는 사실과 그들의 보이지 않는 덫에 걸려 있었다는 걸 알고 몸서리칩니다.
리사코는 미즈호를 보았지만, 저는 그녀들을 보았습니다. 아이를 학대하거나 하는 것에 동의를 하는 건 아니지만, 심신 미약에 가까울 정도로 내몰리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외모도 형편없고 할 줄 아는 것 하나도 없는 내가 과연 세상에 나가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직장은 구할 수 있을까, 아르바이트라도 좋은데. 네가 나가서 한 달에 30만 원만이라도 벌어오면 내가 인정한다. 네까짓 게 어떻게 일자리를 구하느냐는 폭언은, 어렸을 때 아빠에게 수없이 들었던 네까짓 게, 여자가 어딜, 말도 안 되는...이라는 말들과 이어져 집 밖으로 나서는 게 두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아이와 함께 생존하고 있습니다.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상인과 비슷한 모습으로 - 비록 무척 가난하지만 -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속은 <편의점 인간>입니다. 날갯짓을 하는 게 두렵습니다. 그래도 나는 엄마니까. 이 전투의 대장이니까. 강요된 모성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 지키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형을 받은 미즈호는 그렇다 쳐도 앞으로 열심히 살아가야 할 리사코는 좋은 선택을 하고, 좋은 길로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어쩐지 마음이 아프고, 감정이 이입되어 진하게 읽어버린 <언덕 중간의 집>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