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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지 마세요, 사람 탑니다 - 지하철 앤솔로지
전건우 외 지음 / 들녘 / 2022년 7월
평점 :
버스에서는 책은커녕 글자를 1분 정도만 보아도 심한 멀미가 나기 때문에 되도록 창밖을 보거나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듣습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라면 세 시간 동안 책을 보아도 허리가 불편할지언정 멀미는 나지 않습니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다 보면 옆자리 사람이 여러 번 바뀌기도 하고 같은 사람과 계속 함께 가기도 합니다. 적당한 온도와 적절한 소음이 있는 데다 혼자 있다는 외로움도 떨칠 수 있기에 독서하기에 참 좋은 환경이 아닌가 합니다. 전자책을 보는 것도 좋고 얼마 전처럼 종이책을 읽는 것도 좋습니다.
가끔은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해하는 시선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자신 있게 "<밀지 마세요, 사람 탑니다>라는 지하철 앤솔러지를 읽고 있어요! 무척 재미있으니 기회가 되면, 서점에서 만나면 한 번 읽어보세요!!"라고 알려주고 싶다는 욕구가 꿈틀거립니다.
낯선 이에게 말을 잘 걸지 않는 타입이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읽고 있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풀어내고 있을게 뻔합니다. 어쩌면 낡아빠진 백팩을 들고 어딜 가는 걸까, 운동화는 도대체 얼마나 되었길래 저렇게 헐어빠졌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므로, 조용히 책 읽기에 집중합니다.
<밀지 마세요, 사람 탑니다>는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와 같은 장르를 주로 써왔던 작가들이 지하철을 테마로 하여 자신의 상상력을 풀어낸 앤솔러지입니다. 출판사 책 소개에서는 참여한 작가들이 주력해왔던 작가에서 벗어나서 코미디, 무협, 스릴러, 로맨스와 같은 다른 장르로 시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들의 글을 보아왔던 저는 드디어 기다려왔던!!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습니다. 심지어 10년 도 넘게 기다려왔었던 전건우의 지하철 무협 액션을 다시 만나게 되다니 그야말로 감개무량합니다. '호소풍생'에는 허공답보라거나 일지권 그런 건 쓰지 않지만 지금은 기억에서 멀어진 각종 초식을 사용하는 것만 보아도 즐거웠습니다. 고시원 기담의 등장인물 고시생 '편'의 아버지로, 중편이나 장편으로 다시 만나고 싶을만한 (황당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명섭 작가는 최근 역사 소설이나 청소년을 위한 탐정, 역사물을 많이 쓰고 있지만 잘 알려진 좀비 덕후입니다. 좀비와 맞닥뜨리면 어떻게 탈출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의 가이드를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평소 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보여주는 좀비물은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그날 지옥철에서 벌어졌던 아비규환을 잘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독특하게도 이 앤솔러지에는 정명섭의 소설이 두 편 들어있는데 '지옥철'과는 다른 슬픔과 괴로움이 있는 '쇠의 길'도 좋았습니다. 어쩐지 주인공이 자꾸 신화의 에릭과 같은 이미지로 연상되었는데, 팬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연상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 지하철에서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 성장하여 자신의 트라우마와 마주하고 용기를 내는 건 참 멋진 일이었습니다.
조영주의 '버뮤다 응암 지대의 사랑'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소설을 쓸 수도 있는 작가였구나 하는 생각에 놀랐습니다. 우연히 지하철에서 서로를 의식한 남녀가 관심을 주다가 가난한 자들의 사랑을 하는 스토리가 현실적으로 잔잔하게 흘러갑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었습니다. 허무함이 있기에 더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신원섭의 4호선의 여왕은 지하철 분량이 아주 적어서 조금 섭섭했습니다. 하지만 서운함을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즐거운 템포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도대체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제대로 알아내기도 전에 각종 사건에 휘말리는 그! 이 스토리는 드라마나 장편 소설로 나와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지하철 괴담으로 조회 수를 올려보려 라이브 방송을 하던 주인공이 그대로 다른 유니버스로 실려간다는 발상이 있는 '농담의 세계'에서는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하는 탁월함이 있었습니다. 보통 흔한 이세계물에서는 주인공이 다른 세상으로 끌려들어 가지만, 여기서는 그 반대! 갑자기 도착한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마스크를 쓰고 있네요? 김선민의 위트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스릴러로 한 획을 긋고 있는 정해연 작가는 '인생, 리셋'을 통해서 또 한 번의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생망을 외치던 남자가 지하철에 몸을 던졌더니 과거의 중요한 시점으로 돌아가버렸는데요, 그는 새로운 삶을 살고자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행복해졌을까요? 결국 자신의 삶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교훈까지 안겨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