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꾼적이 있다. 적의 성을 노래를 불러서 부수는 사람이 있었다.

꼭 그런 물리적인 형태가 아니라도 노래의(혹은 음악의) 힘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싶다.

보통 노래는 사람의 감성을 움직일 뿐이다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작품에서 노래는 식물의 생장에 관여한다. 노래를 불러주면 식물들은 쑥쑥 큰다. 물론 이에 관련된 과학적인 연구결과도 있다고 한다. 클래식 음악을 일정하게 들려주면 식물이 우수하게 성장한다는... 그러나 그런 미비한 결과가 아니라 이 작품에서 노래의 역할은 실로 막강하다.

신에 기원하는 수많은 주문이나 소원등이 노래의 형태로 있음은 낯선 사실은 아니다. 실제로 찬송가의 경우도 내용은 신의 찬양을 담은 것이고 주문 또한 리듬을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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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죽음도 불사할 정도의 사랑이라는 것이 실제할까? 하고 지금은 조금 회의적으로 생각하지만 과거 이 책을 읽었을 때는 그 감동에 밤을 지새웠었다. 물론 지금 그 감동이 퇴색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읽어봐도 참으로 명작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조금더 나이를 먹고 보니 감동 외적인 면에서 관심이 가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타루가 설리'라는 인물은 사실 상식적으로 문제가 많다고 본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어찌보면 원수)에게 복수하려고 시집가서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그러저러하게 살다가 원래 남자가 돌아오니 거기로 마음이 갔다가.. 그렇다고 남편을 완전하게 차버리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처럼 속이고 아들만 찾아다니고... 완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여자.. 가 아닌가.    게다가 행동력만은 있어서 누군가를 죽인다던가 여기저기 얼굴을 드러낸다던가 하는 일에는 열심이다.

사실 이런 무상식인 여주인공.... 나는 별로인데.. 어째서 이 작품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남주인공이 그만큼 상식적이고 애절한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심지어 조연들도 애절한 사랑을 한다.)

남주인공인 '유진하'는 장래를 약속한 소꼽동무를 위해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배신감도 느껴봤을 텐데.. 다른 여자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오로지 여주인공 하나만 보고 살아간다.

이것은 김혜린의 작품의 전반에 걸친 경향이 아닌가 싶다.

남성쪽이 상식적인 사랑을 한다. 여성쪽은 생활력이 있다(?)

김혜린의 작품은 어떤 식으로든 해피엔딩을 표방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도 남녀주인공은 일생을 갈림길을 걷다가 겨우 죽기직전 함께 한다. 이런 것이 행복인 것일까? 절대 아니다. 두남녀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에서 열심히 그저 사랑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상식이든 비상식이든 그런것을 따질 겨를도 없이 그저 열심히....

그럼 결과적으로 목숨을 건 사랑이라는 것은 비상식이라는 건가? 우스운 결론이 되어버렸다.

현대에도 이런 힘겨운 사랑이 등장할만한 험난한 상황이 있을 것인가가 문제가 아닌가 싶다. 어느 시간, 어느 힘든 상황에도 인간은 조금은 진부한 그 '사랑'이라는 것을 꽃피움으로 해서 새로운 길을 헤쳐온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나는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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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생각을 하곤 한다.

다른 생물체들과 공존하고 있는 이타 존재들과는 달리 인간은 그 정점에서 정복만을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이런 경향은 서구의 산업화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데 이전 공존을 모색했던 동양의 사상 또한 경제..라는 문제에 의해 서구의 산업화를 따르면서 이전의 사상들이 쇠퇴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같은 노선을 따르고 있다.

그 노선은 요약하면 인간에게 이익이면 '선', 해가 되면 '악'

참으로 간단명료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경향은 거의 모든 판타지 물에서도 동일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근간에야 여러 변종-악당도 인간이 있다-이 나타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인간이 절대선임을 주장하는 그릇된 사상은 주류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절대선이 아님은 '환경문제'만 보더라도 명약관화하다.

인간은 지구상의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체의 멸종을 목표로 생활하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그들 몇몇이 인간과의 공존-혹은 기생-에 성공하거나 인간을 앞질러 진화해나가면 인간은 질투하는 듯 그들을 '악'-혹은 해충-으로 규정 짓는다. 그리고 그 생활방식에 의해 인간들에게도 그 폐해가 돌아오자 그제서야 마치 자신은 피해자인양 '환경보호'를 소리높여 외치기 시작한다.

지구에게 인간이란 없어져 주었으면 하는 쪽일 것이다.

충사..는 모든 것을 다 젖혀두고 모든 것과의 '공존'을 갈망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과도 동물과도 식물과도 다른 존재인 '벌레'는 그저 생활한다. 그것이 인간에게 폐를 끼치는지 어쩌는지 자신들은 모르는 것이다. 그저 열심히 생활해나갈 뿐인 존재. 다른 동식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인간들은 지금까지의 행동에 대한 벌을 어떤 식으로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가해자의 입장에서 반성하고 행동해야만 할 것이다.

마치 x의 세계와 같이 어느쪽이 멸망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인지는... 누구도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tono의 더스크 스토리에 좋은 이야기가 나온다. '동식물은 홀로 멸종해갈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멸종할 때는 다른 동식물들을 모두 데리고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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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인기작가가 되어버린 야자와 아이의 대표작이다.

시니컬하고 그저그런 연애물을 그리던 작가가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계기가 된 작품이 아닌가 싶다.

개성넘치는 등장인물들이 학생회를 꾸려가며 벌어지는 일을 중심으로 한 연애물이다.

틀에 박히지 않은 인물들과 서로간에 배려하는 상황들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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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는 도쿄근처에 있는 도시다. 주인공인 알파는 요코하마에 물건을 사러간다. 나는 요코하마에 가고 싶어졌다. 나는 요코하마에 가본적이 없다. 내가 가보고 싶은 요코하마의 모습은 랜드마크 타워가 있고 주변엔 노점이 있는 작은 시장같은 분위기의 도시다.

무사시노에는 코코네가 산다. 무사시노도 도쿄근처의 도시다. 나는 무사시노에도 가보고 싶어졌다. 나는 무사시노에도 가본적이 없다. 내가 가보고 싶은 무사시노는 거대한 나무들이 동굴처럼 펼쳐진 곳이다.

카페 알파의 세계는 미래 지구이다.  해수면이 상승하여 육지는 잠기고 있다.인구는 줄고 대신 로봇이 주류를 이루어간다. 이대로라면 인간은 사라져도 로봇들은 남을 것이다. 주인공도 로봇이다.

그것이 과연 인간의 멸망이며 가장 비극적인 최후인가?

그렇지 않다. 그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살아가며 치열하다기 보다는 여유롭게 또다른 삶을 살아간다. 인간과 가까운 로봇들과...내일 멸망한다고 해서 오늘 절망하고 미쳐가야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멸망은 내일의 일일뿐 오늘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나쁠리는 없다. 누군가 이야기했듯이 사과나무를 심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더 살아가려는 희망이라기 보다 그저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일이 즐거워서라면 더 좋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누군가 내가 만났던 이의 부고를 들었다. 인간이란 혹은 인간이 아니라도 모든 생물체라는 것은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날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 보단 오늘의 행복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쪽이 현명할 것이다. 그리고 카페 알파의 모든 이들은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저 그렇게 시간을 보내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는 않은 듯 싶다.

앨리스(팜 시리즈)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러나 약간의 견해의 수정이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들며 인간은 그렇게 해서 새로운 문을 열어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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