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을 용기 - 일해야 산다는 강요에 맞서는 사람들
데이비드 프레인 지음, 장상미 옮김 / 끌리는책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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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프레인의 <일하지 않을 용기>는 현대의 일 중심 사회 구조를 분석하여 현대인이 일에 대해 갖게 된 노동 윤리의 맹점을 파헤치고, 우리가 바라는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제공하는 사회과학서이다. 


이 책은 총 8장의 목차로 되어 있다. 하지만 더 건강한 삶, 자율적인 자기 계발을 통한 행복감 획득을 위하여 소모적 노동을 줄이는 대안적 삶의 방향을 고찰해보자는 주장 아래, 이 책의 목차는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분류 가능하다. 첫번째 부분은 일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의 도덕화 현상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은 주류 사회에 대항하여 탈 노동을 선택한 사람들에 대한 사례 연구이다. 마지막 부분은 덜 벌고 더 자유로운 삶을 위한 사회적 연대와 전략 검토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인생의 80%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과 직업에 대해 정말 굉장히 많은 편견들이 깨지는 걸 느꼈다. 내게 일은 생존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삶의 일부이며, 자아실현의 도구이고, 자원 획득을 위한 수단이다. 당연히 일을 통해서 스트레스도 받지만, 보람도 느끼기에, 일을 관둔다는 선택지는 애당초 내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이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저자는 제자들에게 '로또에 당첨되면 일을 할 거냐'고 묻고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렇다'라고 답한 것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충격을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저자의 책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일이란 용어는 저자가 서장을 통해 길게 설명했듯이, 맥락에 따라 다채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실제로 직업을 통해서 자아를 구현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저자가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자아실현 및 자기계발의 도구이자 금전적 대가를 동시에 안겨주로, 인간적이며 좋은 환경의 일자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개인을 거대한 소비형 자본주의의 거대한 시스템의 미미한 부속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래서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7-8시간을 참고 견뎌야 탈출할 수 있는, 여가조차 다음 날의 생산성을 위해서 소모적 휴식으로 저당잡히는, 나쁜 일자리를 말한다. 저자는 독자에게 묻는다. 이렇게 나쁜 일자리를, 왜 박차고 나오면 안되는가.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실직자는, 실패자나 사회부적응자 내지는 성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인격과 동의어가 되었느냐고 반문한다. 이에 대해 답을 하기 전에, 우리가 소위 청교도적 질서에서 기원한 노동 윤리에 오랜 세월 지배당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종교 개혁에서 기원한 청교도적 입장에서는 직업을 하느님의 소명, 소위 calling이라고 부르며 노동을 신성시하였다. 당연히 일을 하지 않는 잉여 인력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 저주 받은 종족이 되는 건 이와 같은 논리 구조하에서는 자명하다. 현대로 들어오며 종교적 색채는 자본주의의 탈을 쓰고 인간을 세뇌한다. 케인즈를 비롯한 저명한 사회경제학자들은 인류의 생산성 증대가 노동시간의 감축을 불러 올 것이라 예측하였다. 하지만 현대의 비대한 자본주의는 기존 소비의 영역이 아닌 지대까지 세력을 확장해 가며, 노동의 대가로 여가가 아닌 더 다채롭고 더 편리한 소비 기회를 제공한다. SNS와 미디어는 이러한 소비를 삶의 질 향상이란 명분 아래 한층 더 부추긴다. 그 결과 우리는 꼭 필요하지 않은 소모품으로 집을 가득 채우고, 기업은, 부당한, 심지어 저자의 비판으로라면 불필요하기까지 한 소모품을 생산하기 위한 나쁜 일자리를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이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동을 대가로 물건을 사고, 불쾌한 소비 경험에 좌절하며, 또 카드값을 메꾸기 위해 개인의 시간을 돈으로 바꾸게 된다는 통찰은 매우 날카롭고도 설득력 있어서 글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노동이 과연 내 인생의 중심이어야만 하는가. 노동을 당연시 하고, 이 거대한 소비 시스템에 매몰되는 노동구조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비생산적 인력이 어찌하여 부도덕하고 형편 없는 계급으로 매도되어야만 하는가. 아침 8시 출근, 저녁 8시 퇴근 후 지쳐서 집에 오면 유튜브나 하다가 언제 잠드는지도 모르는 채 잠들었다가 같은 일과를 반복하고, 주말에는 사회적 활동을 할 여력도 없어서 종일 침대에 뒹굴며 게임과 SNS 따위에 빠져 사는 삶이, 과연 내가 내 삶을 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렇게 쉬는 퇴근 후의 시간과 주말이, 회사에, 직장에 저당잡힌 삶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책을 통해 저자가 묻는 목소리에, 나는 당당히 답할 수가 없었다. 과연 이 책을 읽는 수많은 유급 노동자들은 얼마나 많이 일이 있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고 답할 것인가. 


딸냥이의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 입원 시킨 후 일을 하다가 수술대에서 아이를 떠나보낸 일이 작년에 있었다. 그 날이 내 딸의 마지막 날이었을 줄 알았다면, 나는 과연 일 따위를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 점이 너무 괴로웠고, 죄스러웠으며, 속상했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울컥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일 이후 느끼는 바가 컸던 나는 오랜 결심 끝에 올해부터는 차라리 덜 먹고 덜 쓰더라도 시간을 확보하겠다는 일념 하에 주말과, 평일 하루를 온전히 비웠다. 이 책에 나오는 탈노동을 선택한 수많은 이들처럼 확실히 금전적으로는 쪼들리는 느낌이 있지만, 삶의 만족도는 올라갔다. 


만족스러울 만큼은 아니어도, 아이들과 교감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투자할 최소한의 내 시간과 기력을 확보한 나는 내가 내 인생을 갈아서 맞바꾼 것들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목도할 수 있었다. 소위 내 또래의 평균적인 삶의 수준을 맞추기 위해서 내가 밤에 들어가 잠만 자는 집을 위해 쓰던 막대한 주택자금, 일할 시간 확보를 위해서 인스턴트와 패스트푸드 위주의 부실한 식단으로 인한 건강 악화, 산더미 같이 쌓인 포장도 뜯지 못한 온갖 소비재들. 내 인생은 고작 그런 것들을 위해 공중분해되고 있었다. 저자가 말했듯, 삶의 만족은 소비에 있지 않고, 통제 가능한 시간이 많아질수록 소비지출은 감소한다. 나는 그걸 바뀐 내 삶, 탈노동까지는 아니어도 노동 감소를 통해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노동은 선택가능한 삶의 한 요소이지, 노동이 우리 존재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노동을 삶의 가치 척도로 삼고 있는 현대의 일중심 사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덜 일하고 더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부족한 인간의 일탈적 선택이 아니라, 정당한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사회적 담론은 꼭 필요하다. 우리 삶에는 노동 이외에도 가치 있는 순간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일 필요는 없다. 이를 위해서 저자는 사회의 구조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최소로 일해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본소득을 보장해줌으로써, 적은 노동으로도 개인이 자유롭고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 외 노동시간의 단축, 탈노동 연대의 네트워크 구축을 저자는 시스템적 개선책으로 주장한다. 나는 이에 더해 공공 돌봄 및 평생교육 및 문화 예술 활동 지원 같은 사회적 서비스의 확대, 자동화 시스템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기업에 일부 환수하는 조세 개혁과 돌봄과 자원봉사, 창작과 체험농장 같은 비노동 영역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일 외에도 의미 있는 삶이 있을 수 있음을 공감하는 열린 사회를 위해서 우리는 한번쯤 저자와 더불어 일의 의미에 대해서 성찰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끊임없이 일해야 생존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기존의 가치관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이다. 실업을 개인의 실패로 간주하는 사회적 편견에 회의를 느끼거나, 생산성 외의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고 싶다면, 이 책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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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 교양 100그램 7
김준형 지음 / 창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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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 교수의 저서 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는 트럼프 시대를 기점으로 변화한 미국의 외교 전략과 국제 정치의 구조적 변화를 분석한 국제정치·외교 교양서이다. 저자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과 태도를 중심으로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 노선이 국제 질서에 미친 영향을 탐구하며, 이를 통해 세계정세의 불안정성을 심도 있게 조명한다. 나아가 급변하는 국제 정치 환경 속에서 한국 외교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균형 잡힌 성찰을 제시한다.

 

국제 정세는 역사, 문화, 경제와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얽혀 있는 복잡한 분야로, 일반 대중에게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전문적 내용을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창비 교양100그램 시리즈의 특성에 맞게 핵심 사항을 간결하게 정리하며 자국 중심주의로 급선회한 미국의 외교 전략이 파행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 집중한다. 이러한 접근은 독자들에게 명료하면서도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한다.

 

책의 내용은 세 가지 주요 부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가 균열되며 신냉전 체제가 도래한 원인과 그 파급효과에 대한 분석이다. 저자는 미국이 트럼프 행정부 이후 더 이상 세계 패권국가로서 국제 사회의 조정자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WHO 탈퇴, WTO의 자유무역지대 정신과는 상충되는 일방적 관세 부과, 그리고 유엔 탈퇴 논의까지 언급하며, 미국 스스로가 만든 국제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가당착적 행태를 비판한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여전히 세계 경제 및 안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성은 한층 더 심화된다. 저자는 이로 인해 세계는 다시금 미국·중국·러시아에 의해 삼분되는 신냉전 체제로 돌입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두 번째는 한국 외교의 방향성을 탐구하는 부분이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주요 교역국 사이에서 경제와 안보 측면 모두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저자가 제안하는 한국 외교 노선은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실용주의적 접근이다. 그는 미국과 경제적·군사적 동맹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중국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평화를 중심으로 한 협업 외교 전략을 모색하며, 미국이 만들어낸 분열 상황에서 제3국과의 연대를 통해 대안적 외교 경로를 탐색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비용 대비 실효성을 갖춘 현실적 지침으로 다가온다.

 

마지막 부분은 민주 국가에서 시민의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저자는 정부의 외교 정책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경우, 시민사회가 이를 견제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외교가 국가만의 전유물이 아닌 시민 의식과 참여를 통해 더욱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외교 정책에 대한 시민 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전례가 여럿 있다. 예컨대, 박정희 정권 당시 김종필-오하라 메모 협정을 둘러싼 대규모 시민 시위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가 바로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시민의 외교 정책 견제를 통해 더욱 책임 있는 정부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국회 의원으로서 활동 중인 저자가 이와 같은 시민 참여를 법제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시민 감시의 실효성을 강화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된다.

 

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는 변화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한국이 자주적이고 균형 잡힌 외교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체계적이고 날카로운 분석을 제공한다. 외교와 국제정치에 관심을 가진 독자,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역할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관점과 사고의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미국 외교의 변화를 탐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이 직면한 국제적 도전과 기회, 그리고 민주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폭넓게 논의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변화하는 세계 속 우리의 위치를 고민하게 만드는 책으로서, 깊은 독서를 권하고 싶다.

 

#미국의배신과흔들리는세계 #김준형 #외교 #교양100그램 #그램독서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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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예술가들 - 창작은 삶의 격랑에 맞서는 가장 우아한 방법이다
마이클 페피엇 지음, 정미나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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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을 읽고

<예술은 삶과 떨어진 자리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1. 마이클 페피엇과 그의 작품

영국의 저명한 미술 평론가인 마이클 페피엇의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Artists' Lives)』은 예술가들의 자전적 에세이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사랑하는 반 고흐를 비롯한 27인의 예술가들의 삶이 담겨 있다. 이 책이 예술을 사랑하는 평범한 독자들에게도 깊은 호소력을 드리우는 이유는 단순한 예술가의 열전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와 하등 다르지 않은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2.예술가로서의 고흐

저자는 60년간 수많은 예술가를 인터뷰하고, 그들의 작업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얻은 경험과 통찰을 애정을 담아 에세이로 정리하여 출간하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예술가를 우리와 차원이 다른 존재로 묘사하는 등 우상화하지 않는 점이 좋았다. 예술가도 고독과 슬픔, 광기와 환희, 집착과 불안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인간이며, 우리가 그들의 작품에서 깊은 감동을 받는 이유는 그들의 작업에서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3. 고흐의 작품 세계

저자는 책을 통해 다루고 있는 예술가들 중 가장 많은 분량을 고흐에게 할애했다. 나 역시 올해 초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고흐전에 다녀온 적 있다. 나는 그의 그림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사람의 시선을 잡아매는 요인은 그 그림이 지닌 거칠고 강렬한 붓터치와 그 화풍 속에 생생하게 살아넘치는 불안정한 기운의 승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살아생전 동생인 테오를 제외하고는 대중의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생전에 팔린 작품은 거의 없고 평생을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여 살아갔다고 한다.경제적 궁핍 속에서 예술에 전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 또한 경제적으로 압박이 클 때는 글이 거의 써지지 않았다. 끊임없는 불안과 고독 속에서 홀로 투쟁하듯 그려낸 수백여 개의 그림을 보노라면 자연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4. 고흐전의 감동

올해 초 예술의 전당 고흐전에서 나는 그의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멈추어 서서 그림이 가진 슬픔과 불안의 감정을 나누었다. 고흐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그림으로 극복하고 싶어했던 십여 년과 수십 점의 소묘, 그리고 변해가는 화풍 속에서 몸부림쳤던 시간들을 보여주었다. 저자가 담담하게 써내려간 고흐의 일생은 내가 직접 보았던 고흐의 그림들과 맞물려 감정적으로 나를 울렸다.


5. 팬심의 원천

이 책은 예술적이고 자전적인 에세이라고 할 수 있으나, 내가 480여 쪽의 분량을 읽고 느낀 점은 이 책은 존재 자체로 거대한 팬심의 증빙이라는 것이다. 한때 아이돌을 무척 사랑했던 나에게 좋아하는 예술가의 삶을 연구하여 글로 만들어내고자 했던 저자의 바람은 전혀 놀랍지 않다. 처음에는 아이돌의 노래가 좋아서 듣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에 흥미가 생겼다. 그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을 찾아보고, 그의 언행을 통해 드러난 생각과 가치관에 관심이 생기면서 급기야는 그 가수의 삶과 성장 환경에까지 관심이 확장되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한 노래의 탄생 과정을 가수와 엮어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던 것처럼, 저자도 예술가의 작품을 좋아해 그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삶을 추적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무언가가 아니라면 팬심이 아니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어떤 계산도 없이 오직 좋아하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싶은 순수함을, 나는 이 책에서 저자의 글을 통해 계속 발견할 수 있었다.


6. 깊은 매력의 책

사랑은 흔히 숨길 수 없다고 한다. 누군가의 지독하게 순수한 사랑을 가득 담아낸 자전적 에세이 속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삶에 공감하고, 미처 몰랐던 예술가들에게 호기심을 품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의 작품과 인생을 너무나 사랑해서 이를 전파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본 이라면, 누구나 깊게 매료될 수 있는 책이다. 살아있는 예술가의 곁에서 호흡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창작의 본질이 삶을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을 조명하는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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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지구라는 놀라운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아이작 유엔 지음, 성소희 옮김 / 알레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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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서사 작가인 아이작 유엔의 <지구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생물학과 생태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문학적인 언어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조명한 독특한 자연 에세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포유류, 양서류, 곤충과 식물, 고대 생물과 화석 등 다양한 생명체의 생존 전략을 마치 그들을 인간처럼 생각의 주체로 삼는 의인법을 사용하여 기술하여 굉장히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최선보다는 차선을 택하거나, 주목받지 않는 방식으로 번성하는 생존전략 같은 건 무조건 눈에 띄기를 바라는 현대의 삶을 반추하게 만들었다. 최고가 되어 주목 받으면 생존에 불리해지는 생명들처럼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면 적도 늘어나는 건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란 생각이라 흥미로웠다. 


의인법을 통해 나무늘보, 삼엽충, 지의류, 카피바라나 거북 같은 포유류를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의 시각에서 인류를 바라보는 서술 방식은, 과학계에 요즘 트렌드를 보여주는 느낌이라 세련된 인상이었다. 지구의 중심이 인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최근 과학계에는 각각의 개체를 집중적으로 파고들며 공존하는 생물권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이 책의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서술은 가독성을 높이고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최근 과학계의 트렌드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시각을 상상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만으로도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행성이 인류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매우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서양식 사고가 팽배해지면서, 우리 내면에서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던 선조들의 지혜를 상당 부분 상실했다. 인공적으로 정원을 만들지 않고, 땅과 엇비슷한 높이에 정자를 지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모두의 정원으로 삼았던 동양의 지혜가, 나는 지금과 같이 더 높이, 더 많은 사람들을 살 수 있게 만드는 국토 곳곳이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인 현대에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넓지도 않은 땅 곳곳을 파헤쳐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동물들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건 이 책이 보여주는 것 같은 느리고 꾸준히 이어지는 생명체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이 아닐까. 편의성의 이름으로, 효율성과 가성비의 논리로 점철된 우리 삶에 자연이란 그저 이용과 착취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깎아내린 헐벗은 산과 비탈은 폭우시 산사태의 원인이 된다. 빠르게, 더 많이 지어 올린 빼곡한 아파트들은 닭장이란 비난을 받으며 대량 미분양 사태에 직면해 있지 않은가. 매년 태풍과 지진 같은 대형 재해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혹독한 방식으로 자연을 학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도로 곳곳에 로드킬을 당한 고라니, 길고양이, 새들의 사체를 볼 때마다, 그리고 한순간의 무분별로 수백년 간 빼곡하게 숲을 가득 채웠던 산이 전소되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참담한 기분을 억누르기 어려운 내게, 이 책은 반가운 산소통 같았다.


이름조차 몰랐던, 우리 곁에 늘 존재했지만, 우리가 제대로 바라봐 주지 않았던 자연에 대한 경외와 감탄을 획득하는 기회는 실로 소중하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처럼, 지구는 인류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하나 하나에게 각자의 삶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주변의 자연물들에게도 각자의 삶이 존재한다. 생물권에 대한 총체적 관심의 확장은 더 나아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공동체적 윤리 의식의 함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더불어 지의류의 느린 삶이나, 지구의 역사와 함께 해온 존재들에 대한 찬탄은, 채 백년 남짓의 길지도 않는 삶 내내 아등바등 좀 더 많이 움켜쥐고자 몸부림치는 인간의 탐욕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할 것이다. 


정신없이 바뀌고 발전하는 빠른 삶에서 가끔은 벗어나, 발 밑에 핀 손톱만한 파란 꽃잎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기고 싶은 이들에게, 새벽녘 싱그러운 푸른 잎사귀에 맺힌 이슬의 영롱함에 감탄하고 싶은 이들에게 산소통 같이 싱그러운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이 책은 이를 읽는 모든 이들에게 한숨 돌릴 여유와 강퍅한 마음에 단비 같은 촉촉함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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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1 - 홀로 남은 회색곰 왑의 눈물
함영연 엮음, 지연리 그림, 어니스트 톰슨 시튼 원작 / 열림원어린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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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1: 왑의 슬픔과 분노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성찰하며

 

어린 시절에 사랑했던 시튼 동물기가 열림원에서 복간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감사하게도 이번에 서평단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시튼 동물기 1권을 펼쳤다.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한 동화이지만, 수십 년이 지나서 다시 읽어도 여전히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을 보고 이는 어른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 시튼 동물기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홀로 남은 회색곰 왑의 슬픔과 분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왑은 총을 가진 인간의 손에 형제들과 어미를 잃는다. 왑 또한 발에 상처를 입은 채 두려움과 슬픔에 잠겨 죽은 어미 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어린 곰의 비극이 도입부터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인간이 놓아둔 덫과 총, 그리고 자연 속의 위험이 왑을 끊임없이 위협하지만, 왑은 홀로 모든 고난 속에서 살아간다. 잠시 잠깐 숲의 왕으로 군림하지만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못한 채 왑은 결국 화산재 가득한 한 공간에서 숨을 거두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곰은 본래 야생 속에서 강력한 포식자이자 생태계 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존재지만, 위험한 존재로 느껴지게 하는 것 역시 역설적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환경이라는 점이 깊은 생각을 하게 했다. 책은 단순히 곰이라는 동물의 이야기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 속에서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냉철하게 돌아보게 만든다.

작품을 읽는 동안 왑의 감정을 통해 동물들이 겪는 고통과 인간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열일곱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며 동물의 감정과 욕망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느끼는 삶을 살고 있다. 또한, 동물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그들이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감정과 의지를 가진 대상임을 깨닫게 된 경험도 많다.

 

작품 속 왑이 느낀 슬픔과 분노는 단순한 동물의 공격성을 넘어, 인간과 환경으로부터 비롯된 공포와 상처로 느껴졌다. 어릴 적부터 동물들과 깊은 교감을 느껴왔던 나로서는, 왑의 이야기가 곰과 같은 야생 동물이 겪는 고통과 인간 사회의 영향력을 강렬하게 보여준다고 느꼈다. 특히 왑이 화약 냄새를 느끼며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적개심을 보이면서도, 공격할 의도가 없는 노인 앞에서는 순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은 동물의 정서적 민감함을 잘 묘사한 부분으로 느껴졌다.

이 작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동물들에 대한 공격성은 종종 두려움과 상처에서 비롯되며,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동물들은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진심 어린 태도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전달된다는 점에서 공감과 이해의 힘을 재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히 감정적인 이야기를 넘어, 동물의 권리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동물들은 자신의 서식지에서 평화롭게 살아가야 할 주체이며, 인간은 이들과의 지속 가능한 공존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돌아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시튼 동물기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재조명하며, 현대 사회에서 동물권이나 생태계 보호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이번 독서를 통해 자연 속 동물이 겪는 외로움과 고통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책을 단순히 즐기는 것을 넘어 인간으로서 해야 할 책임을 성찰하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다 같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왑의 이야기를 한 번쯤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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