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로 가방끈이 짧은 저에게 #선결혼후연애란 으레 남여주 둘 중 하나는 재벌 츨신이고 둘 중 하나는 이미 상대방을 짝사랑 중이거나 최소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이며 내부 또는 외부의 빌런 때문에 계약 결혼의 갈등이 격화된다는 클리셰의 이야기였는데요. 이 소설 덕분에 #선결혼후연애에 대한 선입견이 싹 사라지고 말았네요. 남주는 자수성가하여 자신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능력자입니다. 어릴 적 생모에게 버림받았지만 비뚤어지거나 망가지지 않고 제게 소중한 사람은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는 성숙한 사람입니다. 여주 또한 재벌 출신이 아닙니다. 중산층 가정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단단한 사람이지만 과거 크나큰 상실을 겪은 후 마음을 닫아걸고 혼자 상처를 감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한부 판정을 받고 투병중인 아버지의 마지막 염원을 위해 계약 결혼을 계획할 정도로 용감하기도 하죠. 여주는 아버지의 마음을 위해 남주는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결혼 계약을 맺지요. 이야기는 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치명적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차분하고 따스하게 그려냅니다. 그 과정에 어떤 꼬임이나 오해가 없는 이유는 둘의 캐릭터에 있는 것 같네요. 남주와 여주 모두 과거에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곧은 심성을 갖고 있으니까요. 용기있고 솔직하기까지 하니 둘이 가까워지는 과정에 그 어떤 잡음도 끼어들 수 없는 거죠. 두 사람의 온전한 마음과 감정 이외에는요. 게다가 주변 인물들도 보통의 선량한 캐릭터들이니 K-유교를 거스를 만한 복잡한 사건이 빵빵 터지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잼있습니다. 아니 그래서 잼있습니다. 잔잔하고 따뜻한 매력. 건강하고 맛있는 사찰 음식을 먹는 맛이라고나 할까요…?
(※ 주의!!! 스포일 수 있습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사고 체계를 가진 괴물 빌런 남주가 히어로 여주에게 반해서(?) 납치한 후 다채로운 갖가지 플레ㅇ… 흠흠… 냅다 결제한 저는 물론 둘의 격렬한 관계 속에 아늑하게 녹아들어간 취향 굳건한 독자이기는 하지만요. 자꾸 이런 의문이 들더란 말이죠. "왜 굳이 여주가 히어로여만 했을까?" 이야기의 목적이 강압적이고 다양한 플레이를 통해 므흣함을 주는 것만이었다면 여주가 히어로가 아니라도 상관 없었겠죠. 남주의 가학적인 애정에 망가져가는 대상이 그저 여성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은 여주가 히어로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e-Book의 특성을 살려 TV 뉴스 화면에 뜨는 속보라든가 인터넷 뉴스 포탈의 댓글, 동영상 사이트 등을 구현해내면서 한때는 히어로였던 여주의 명성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더 이상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게 되는 잔인한 과정을 차근차근 전개합니다. 그러니 당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이런저런 플레이는 그냥 페이크였다고. 이 짧은 소설은 보다 깊고 어두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여주는 매우 성실한 히어로였죠. 히어로로서의 자부심도 강했구요. 그녀가 빌런에게 납치된 것도 무고한 목숨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제껏 히어로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 히어로의 희생 덕분에 목숨을 구한 사람들, 히어로의 활약과 희생을 칭송하던 사람들은 어땠나요…? 히어로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빌런이 퍼뜨린 조작된 루머에 홀려 그녀를 비난하고 부정하고 급기야 망각해버렸죠. 아주 쉽게요. 이 과정에서 괴물 빌런은 그다지 큰 노력을 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그럴듯한 거짓말을 인터넷에 퍼뜨리기만 하면 됐으니까요. 이렇게 빌런은 히어로의 사회적 생명을 완벽하게 끊어버리고 그녀를 완전히 제 소유로 만들어버린 거죠. 이거 너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과 똑같지 않나요? 선량하고 뛰어난 개인이 의도가 불순한 무리들에게 알게 모르게 짓밟히는 만행은 현실에서 비일비재 합니다. 하지만 제일 소름끼치는 건 히어로의 진실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흑색 선전에 생각없이 넘어가버린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입니다.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사실을 더 정확하고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는 노력 없이 그저 전해지는 그때그때의 말의 홍수 속에서 부유하는 해파리떼… 그렇게 흐늘거리다가 언젠가 괴물 빌런들에게 소리소문 없이 도살당하는 개돼지 신세가 돼버리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이 소설이 제게 준 것은 므흣한 취향의 아늑함이 아니라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는 경고였습니다.
로판 고인물 독자인 저에게는 무척이나 신기한 작품이었습니다. 우선 빈집털이범 여주가 공작 없는 공작성을 무단 점거하고 공작 부인 행세를 하다가 남주인 공작을 운명적으로(?) 만난다는 얼렁뚱땅 설정을 얼레벌레 납득하게 만들었지요. 게다가 전체 소설의 길이가 아주 짧지만 이 단편 안에 여주의 서사, 남주의 서사, 둘 사이의 감정선 변화, 로맨스의 개연성뿐만 아니라 충실한 묘사로 핫한 씬까지 꽉꽉 차 있더란 것이죠. 기가 막히게도 거기에 더해서 임출육에다 후대의 로맨스까지도 볼 수 있었네요. 보통 장편 서너권 정도로도 아쉬울 내용들을 단편으로 바짝 압축시킨 다이제스트판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면서도 플롯 전개에 아쉬움이 남지 않은 이유는 분명 작가님의 뛰어난 필력에 있겠지요. 압축했지만 생략되지는 않은 충실한 내용의 글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참신한 사실을 이 신기한 작품에서 생생하게 목격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