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로 가방끈이 짧은 저에게 #선결혼후연애란 으레 남여주 둘 중 하나는 재벌 츨신이고 둘 중 하나는 이미 상대방을 짝사랑 중이거나 최소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이며 내부 또는 외부의 빌런 때문에 계약 결혼의 갈등이 격화된다는 클리셰의 이야기였는데요. 이 소설 덕분에 #선결혼후연애에 대한 선입견이 싹 사라지고 말았네요. 남주는 자수성가하여 자신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능력자입니다. 어릴 적 생모에게 버림받았지만 비뚤어지거나 망가지지 않고 제게 소중한 사람은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는 성숙한 사람입니다. 여주 또한 재벌 출신이 아닙니다. 중산층 가정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단단한 사람이지만 과거 크나큰 상실을 겪은 후 마음을 닫아걸고 혼자 상처를 감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한부 판정을 받고 투병중인 아버지의 마지막 염원을 위해 계약 결혼을 계획할 정도로 용감하기도 하죠. 여주는 아버지의 마음을 위해 남주는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결혼 계약을 맺지요. 이야기는 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치명적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차분하고 따스하게 그려냅니다. 그 과정에 어떤 꼬임이나 오해가 없는 이유는 둘의 캐릭터에 있는 것 같네요. 남주와 여주 모두 과거에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곧은 심성을 갖고 있으니까요. 용기있고 솔직하기까지 하니 둘이 가까워지는 과정에 그 어떤 잡음도 끼어들 수 없는 거죠. 두 사람의 온전한 마음과 감정 이외에는요. 게다가 주변 인물들도 보통의 선량한 캐릭터들이니 K-유교를 거스를 만한 복잡한 사건이 빵빵 터지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잼있습니다. 아니 그래서 잼있습니다. 잔잔하고 따뜻한 매력. 건강하고 맛있는 사찰 음식을 먹는 맛이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