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작품의 서술 방식이 논란이었는지 알 것 같아요. 문장 표현이 모호하고 경계를 흐린다고 할까요…? 대상이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분명하지 않은 표현으로 교묘하게 진실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독자에게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고 있거든요.하지만 바로 이런 모호한 서술이 저주와 비밀이 주제인 작품 전반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안성맞춤으로 어울려서 개인적으로는 정말 좋았네요.여주가 전생을 기억한다는 클리셰도 의미있게 활용되고 있어서 흥미로웠는데요. 불행했던 전생에서 여주가 획득한 능력과 경험이 결국 현생의 치명적인 위협을 물리칠 수 있게 한 기반이 되었다는 큰 그림이 절묘했네요.
마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 소설을 보는 것 같았네요. 주인공들의 직업이 학문 연구, 그것도 인문학 연구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유치하다가도 한없이 지적으로 펼쳐지는데요. 장르 소설에서는 흔치 않은 그 지적 대화의 장황함과 묵직함이 개인적으로는 완전 극호!!!였네요.솔직히 초반의 남주는 여주의 어려움을 몇천만 배 더해주듯 뺀질뺀질 깐족깐족 무매력이었지만요. 어느새 여주와 부딪히면서 점차 변화해가는 모습이 흥미진진한 관전 포인트가 되었네요.하지만 이 이야기는 로맨스의 달달함에 마냥 취해 있지는 않습니다. 19세기 말 학문을 연구하는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부당한 압박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짚어내고 있으니까요. 더욱이 대학원이라는 무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덕분에 현 대학원생들에게 PTSD를 안겨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서술되고 있네요. 굳이 계몽적인 프로파간다를 부각시키지 않아도 충분해서 정말 좋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