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별 - 황석영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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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삶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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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 카를로 로벨리의 존재론적 물리학 여행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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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란 무엇인가? 최근 몇 달 간 이 문제는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컴퓨터의 가상 세계 속의 존재와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이 세계의 존재는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는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부터 현대의 양자 중력에 이르기까지 과학이 대답해온 '실재(reality)'의 의미에 대해 탐구해가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의 결론에서 말하는 실재는 참으로 미묘하다.

 모든 것이 양자(quantum)들의 네트워크로 되어 있다는 것! 아니, 모든 '것'이 아니다. '물질'만 그런 것이 아니다. 비어있는[空] 공간과 시간조차 양자들의 네트워크가 움직여 만들어내는 일종의 산물이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세계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마치 물질처럼 만들어지다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 나와 같다니, 무(無)와 유(有)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간과 나의 차이를 만드는가? 무엇이 나와 사람들의 차이를 만드는가? 책의 후반부에서 카를로 로벨리는 그 해답으로 '정보'를 제시하고 있다. '정보'란 가능한 상태의 수를 양으로 환원한 것이다. 그 상태의 수가 많을 수록 정보량은 많은 것이다.

 사실 일찍이 열역학이나 양자역학으로부터도 '정보'라는 존재가 예고되어 왔다. 그 이유는 정보가 세계의 관계와 연결망, 그리고 상호작용에 관한 미스터리를 풀 열쇠이기 때문이다. 이다. 이런 상호작용을 무시했던 고전역학에서는 정보의 중요성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양자 중력은 양자역학의 아이디어를 차용한다. 여기서도 또한 정보가 중요하다.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정보'의 상호작용, 그것이 양자들의 네트워크에서 우주의 '존재'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는 나의 의문에 약간의 해답을 던져주었다. 모든 것이 정보로부터 비롯된다면, 즉 it from bit라면, 사회 속의 나, 가상 세계 속의 나 등도 모두 하나의 '존재'로서 성립할 수 있다. 그 존재가 실행되는 차원이 다를 뿐 현실과 사회, 가상 사이의 위계는 없다. 나는 그동안 현실의 '나'만이 진정한 존재고, 나머지는 단순한 아바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머지들 또한 하나의 존재이며, 이들이 겹치고 관계를 이루며 '나'라는 존재를 생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은 여전히 현실 속의 '나'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 속의 내가 자리를 잃는다면 총체적인 '나'는 붕괴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 관계나 컴퓨터에 갖혀 현실을 잃어버리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 같다. 자칫 내가 붕괴해 버릴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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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계곡 셜록 홈즈 전집 7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박상은 옮김 / 문예춘추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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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홍색 연구(1887)>와 마찬가지로 <공포의 계곡(1915)>은 2부 구성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2부 구성은 주홍색 연구처럼 단순하지 않다. 주홍색 연구에서 사용된 2부 구성의 경우 사건과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긴 배경을 나열해 놓은 것에 불과했다. 물론 공포의 계곡도 그렇긴 하지만,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두 챕터가 서로 닮아있다. 두 챕터가 모두 더글러스(맥머도, 혹은 에드워즈)의 '연극'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미국 버미샤 계곡에서 더글러스가 맥머도라는 이름으로 행했던 연극은 일당을 체포하며 끝난 줄 알았으나 영국에서의 살인사건을 통해 그 연극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어쩌면 더글러스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공포의 계곡'은 이러한 가면, 페르소나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가면에서 '벗어나려' 하는 자가 더글러스라면, '벗기려'하는 자가 바로 홈즈이다. 이 둘은 그런 가면, 즉 알을 깨기 위해 안과 바깥에서 노력한다. 이는 <데미안(1919)>에서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포지션, 즉 줄탁동시()의 관계와 같다. 그런데 코난 도일은 모리어티를 통해 더글러스를 죽임으로써, 헤르만 헤세와 정반대로 그런 노력을 조롱한다. 모리어티가 마지막에 홈즈에게 보낸 메시지는 탐정으로서 홈즈가 해왔던 일들 전체를 조롱하는 것이다.


 이것이 더욱 의미심장한 이유는 '셜록 홈즈 시리즈' 자체가 코난 도일에게 연극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을 걸쳐 홈즈를 죽이고 싶어했다. 사실 모리어티는 그런 연극을 끝내기 위해 기용된 캐릭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끝나지 않는 '공포의 계곡'이었다. 다시 셜록홈즈를 되살리며 코난 도일은 그런 노력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설에 그대로 투영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포의 계곡>은 셜록 홈즈 시리즈 중 가장 자전적인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는 그 전에 등장했던 요소들이 많이 등장한다. 모리어티 교수(마지막 사건), 2부 구성(주홍색 연구), 암호 풀이(춤추는 인형), 불가능한 범죄(얼룩 끈), 도입부에서 물건을 통한 추리(바스커빌 가의 사냥개) 등등.



이런 세상에, 홈즈 선생님, 이런 세상에!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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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크리스토 백작 1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25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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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복수하는 자가 아니라 심판하는 자다. 그는 자신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자들에게 치밀하게 접근하여, 그들의 죄를 파헤쳐 심판한다. 그 죄의 유형은 가지각색이며 심판 방법 또한 가지각색이다. 그런데 빌포르를 향한 심판의 칼끝은 빌포르를 넘어 그의 가족들에게까지 향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어째서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가족들의 죽음이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아닌 빌포르의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빌포르가 부인에게 내린 심판도 합리적이고 부인이 아들에게 내린 심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사실 이 작품의 모든 이는 심판을 내린다. 아니, 모든 인간은 심판을 내리는 존재다.

 작품 속 많은 종류의 죄와 심판, 그리고 그 합리성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탐구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침묵은 죄가 될 수 있는가(카드루스), 연좌제는 옳은가(빌포르 부인), 정치적 견해도 죄인가(모렐, 에드몽 당테스), 떠난 이를 버리거나 잊어도 되는가(메르세데스). 또 선량한 모렐 집안이 심판의 집안과 엮여 심판의 바퀴에 들어간다는 점과 등장인물의 심판이 변화한다는 점은 죄에 대한 탐구를 더욱 고차원적으로 증폭시킨다.

 죄라는 것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삶이라는 여행이다. 그는 14년의 삶을 죽은채로 있었기에 죄에 대해 얕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죄를 탐구하러 여행을 떠난다. 인간은 심판하는 존재이며 삶이라는 여행은 죄의 탐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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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
알퐁스 도데 지음, 정택영 그림, 이재형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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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에세트는 천당과 나락을 오간다. 순수함의 대명사 알퐁스 도데가 그려내는 나락의 모습은 적나라하다. 다니엘은 어째서 천당과 나락을 계속해서 오가는가? 천당과 나락의 차이는 없다. 인물의 배신, 혹은 사물의 배신이 천당을 나락으로 만든다. 그것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자크 에세트의 도움은 천당으로 끌어로려주는 구원의 손길이기도 하지만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추이기도 하다. 다니엘은 끊임없이 괴로워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체성을 되찾지 못한다. 자크 에세트의 마지막 구원 때, 다니엘의 상태는 여전히 불안하다. 언제 나락으로 바뀔지 모르니까.

 그런데 자크가 죽는다. 그렇다. 신은 죽었다. 자크의 죽음에 대한 슬픔, 그것은 주체성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도예, 시를 갈망한 다니엘에게 그것은 포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 다니엘에게 맞는 일은 그것이었다. 무엇보다 다니엘의 이름이 간판에 붙어 있다. 도예의 길, 그것은 안락한 삶을 바라는 나약함이 아니라 진정 자신에게로 향하는 소박한 강인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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