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한효정 옮김 / 단숨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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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1칼로리의 음식을 생산하기 위해 1리터의 물을 허비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의 두 배에 달하는 온실가스를 공기 중에 내뿜고 있고.

신문을 펼쳐봐. TV를 켜봐가뭄과 홍수태풍.

나쁜 소식 없이 하루도 지나가는 법이 없지만 기후 회의에서 내놓은 결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뿐이야.

그리고 테러는 온갖 곳에서 일어나고 있지.

빈곤으로 잃을 게 없는 아이들이 용병으로 전쟁에 참가하고 있고."

 

이 책의 메시지는 굉장히 명백하고 더없이 직설적이다메시지가 뚜렷한 작품은 많이 읽어 보았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직설적인 작품은 또 처음이라 지금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물론 단순히 직설적이기만 했다면 이 작품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을 것이다오히려 나는 직설적으로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하는 작품을 정말 싫어한다나는 심사가 꼬인 사람이라서 메시지가 명백하면서도 절대 등장인물이나 묘사해설로 등장하지 않고 내용즉 작품 전체에서 간접적으로 독자가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을 훨씬 선호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소설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작품보다 메시지가 우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메시지가 분명하고 직접적인 작품의 경우 메시지를 위해 작품이 '희생'됐다는 느낌을 받기 마련인데이 작품은 메시지가 곧 사건의 중심이며 방해자의 목적이다다시 말해 작품에 메시지를 잘 '활용'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마닐라 독감'이라는 유행성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지구독일 베를린의 길거리를 전전하는 노아는 자신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다그는 어느 날 총상을 입은 채 거리에서 깨어났고노숙자인 오스카가 노아를 돌보았다.

어느 날 노아는 신문에서 어떤 그림을 그린 화가를 찾는 광고를 보게 되는데그것을 보고 머릿속에 섬광을 느낀 노아는 자신이 그 그림을 그렸다고 제보를 한다.

그리고 노아가 제보 전화를 건 그 순간정체 모를 권력자들이 노아를 쫓기 시작한다.

 

"우리가 왜 이렇게 무감각한지 자네는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우리가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틀렸어우리 의식에서 그걸 떨쳐내도록 학습했기 때문이야."

 

기억상실이라는 흔한 소재에환경보호라는 흔한 주제다.

그런데 이 책 너무 재미있게 읽었고비하인드 도어와 애프터 안나』 이후 망설이던 내게 서양 스릴러에 대한 믿음을 심어 주었다.

어떤 점이 그렇게 특별했을까.

먼저 서사 자체가 재미있었다기억상실이라는 소재가 흔한 만큼 이후 전개도 필연적으로 같은 소재의 작품들과 똑같아질 수밖에 없다주인공이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결국 관건은 서사를 얼마나 흥미롭게 이끌어가는가에 주목하게 된다노아는 서사적 긴장감을 절대 놓치지 않은 채 플롯을 끝까지 힘있게 이끌어갔고결국 나라는 독자 한 명을 만족시켰다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드러나는 진실도 제법 놀라웠고결말도 깔끔해서 좋았다.

그리고 상기 언급했듯 주제와 서사의 어우러짐이 탁월한 것도 장점이다작품 전체에서 주제는 계속해서 피력되는데(특히 재파이어를 통해서사는 서사대로 전개감 있었다.

흔한 것을 흔치 않게 표현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이제 예술가들의 임무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얼마나 새롭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라 하겠다.

 

다만 아쉬운 점 두 가지노아의 시점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장이 바뀔 때마다 다양한 사람의 시점으로 넘어가는데처음에는 그래서 전개가 조금 산만하다후반부에 가서 매끄럽게 통합되긴 하지만.

그리고 또 한 가지는앨리샤와 제이 모자의 끝이 불분명하다는 것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장치가 있긴 하지만노아 측 서사가 만족스럽게 마무리된 데 비하면 다소 부족하다.

필리핀 마닐라의 빈곤층인 앨리샤와 제이는 이 책을 펼치자마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고주인공 노아와 하등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인물들이다주제가 주제이니만큼 타 국가의 빈곤층에 서사를 부여한 것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그런데 노아가 목적을 이룬 데 비해 이들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어쩌면 이들의 결말은 재파이어의 "노아 프로젝트는 그 모든 것을 끝냈을지도 몰라하지만 넌 빈곤이 지속되도록 만든 거야." 방증일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렇다는 건 노아가 틀렸다는 뜻이 되어 버리고결국 약을 삼켰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양측의 선택 모두 최선은 아니었다는 뜻은 되겠으나이들은 끝까지 선진국 상류층에게 휘둘리기만 했다는 뜻도 되겠다.

 

'학살이 선택지가 될 수 없다는 것만은 알고 있어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죠.'

 

Room 17의 사상은 마블 시리즈의 타노스와 비슷하다.(물론 저자가 원고를 넘긴 게 2013년이니 타노스가 Room 17과 비슷하다고 해야 맞겠지만)

타노스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는 행위를 정당화했다면 Room 17은 연구와 수치를 근거로 삼는다경재적 부유함이 '절반'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양측 다 똑같고.

어쩌면 재파이어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인간은 늘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소설뿐만 아니라 영화나 만화 등의 수많은 작품 속에서 인간의 행동에 증오를 품은 악당에 의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수많은 작품 속의 수많은 히어로가 인간의 선의를 믿고 목숨 바쳐 인간을 구했다.

재파이어의 말에 노아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파멸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이미 오래전에 모든 걸 잃어버렸을지도요.

그래도 난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내가 죽음을 막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우리가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차이를 만드는 거예요."

 

우리는 변해야만 한다.

우리는 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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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강남
주원규 지음 / 네오픽션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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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오히려 더 밝은 곳그렇다고 밤인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는 곳.

대치동 447번지에 위치한 38층 고층아파트 침실에서 내려다본 강남이다.“

 

강남에서 일어나는 부와 쾌락의 어두움을 그린 소설메이드 인 강남이다.

저자는 주원규열외인간 잔혹사반인간 선언』 등의 책을 쓰고 tvN 드라마 <아르곤>을 집필한 작가다.

드라마 작가라서 그럴까이 책 역시 드라마나 영화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소재도 소재고묘사나 사건 전개 등도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장면들이 머릿속에 쉽게 상상되는 책이었다.

표지 디자인이 꽤 잘 된 책이라고 생각한다양복을 입고 얼굴을 가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슈퍼맨과 배트맨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작중 '설계자'의 역할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일러스트다.

 

?Y로펌의 주목받는 변호사인 '민규'는 일반 변호사들이 하는 일과는 조금 다르다강남의 재력가권력가들에게 의뢰를 받고 유명인들이 사건이나 사고에 휘말리면 그것을 의뢰인들이 원하는 대로 조작하는 것이 민규의 일이다이러한 일을 하는 변호사를 이른바 '설계자'라고 부른다.

어느 날 강남의 카르멘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열 구의 시체가 발견된다다섯은 남성다섯은 여성인데시신은 전부 나체다사인은 사체 복부의 자상정황상 마약에 취해 혼음 파티를 즐기다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여성 다섯은 콜걸남성 다섯은 금감원증권회사부동산 브로커 등인데문제는 그 다섯 명 중 하나가 인기 연예인 '몽키'이다.

민규가 받은 의뢰는 몽키의 죽음을 보다 명예롭게 포장하는 것.

그리고 또 한 명의 주인공인 강력계 형사 '재명'이 있다.

재명은 하루아침에 3억 원의 도박빚을 지게 되는 등 행실이 별로 좋은 형사는 아닌 것 같다그러다 카르멘 호텔 펜트하우스 사건을 접하게 되는데그는 몽키의 친부인 서린개발 회장 민경식에게 의뢰를 받게 된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찾아 잔혹하게 죽여달라고.

 

?어두운 주제에 비해 스토리 자체는 제법 평이하다복잡한 추리를 필요로 하거나 시간대를 왔다갔다하는 일 없이단지 민규와 재명에게 초점을 번갈아 맞추며 사건 전개에 집중한다소재도 흥미로운 만큼 몰입해서 책을 읽을 수 있다.

작품에서 그려지는 강남 상류층의 모습은 정말 지저분하다마약은 기본에 스리섬 등의 용어가 빈번히 등장하고 형사에게 돈을 쥐여 주며 살인청부도 한다영화나 드라마 등 대중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패한 상류층의 전형이다돈도 많고 권력도 있고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중산층들보다 잘났다는 사람들이 한다는 짓은 전혀 잘나 보이지가 않는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보통 이런 장르의 서사에서는 주인공이 보다 정의로운 중산층으로 등장하여 최종적으로 부패한 그들이 마땅한 벌을 받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데(영화 베테랑이나 검사외전을 떠올려 보자), 이 작품은 두 주인공마저 모두 직업윤리를 망각한 채 돈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그리고 끝까지 변하지 않는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예시로 든 두 영화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인 형사 캐릭터조차도 이 작품에서는 도박빚이나 지고 살인청부에 협조하는 인간이다그런 주인공이 두 명 다 법의 집행자라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랄까.

도무지 저자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작가의 말까지 읽어 보니공멸의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를 강남의 오늘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말인즉슨실제로 강남에서는 이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거나 일어났다는 뜻일까.

작중 인물이 사망하며 '어쩔 수 없지여긴 강남이니까.'라는 말을 하며 죽음을 받아들일 정도로 강남은 '그들만의 리그'라는 건가.

 

?나는 강남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거기서 살아본 적도 없다그냥 땅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싸며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들의 마을이라는 것밖에는.

이 책은 자본에 미친 자들이 어떤 비극을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해 줄 만큼 심오한 책은 아니다대신 내가 주목한 점은 다른 쪽인데작중 등장하는 콜걸 '정혜주'와 '검은 개들의 왕'이라 불리는 포주 '엄철우'이다.

정혜주는 그쪽 바닥에서는 유명해서 높으신 분들만 상대하고엄철우는 국적도 출신도 모르는데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엄청난 포주라고 한다그런데 책에서 묘사하길 스모키 화장과 모자로 가리는 그들의 얼굴이 젊다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어려 보인다고 한다.

이들이 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만어리다는 말이 더 어울릴 나이대의 사람들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 곳이 지금의 시대라는 것은 느껴졌다.

 

나한테 궁금한 건 이제 딱 하나야내 통장에 30억이 꽉 채워질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인데한 가지 불편했던 점.

콜걸들이 많이 등장한다그건 상관없는데 다른 등장인물은 그녀들을 사람 취급도 안 하고부자가 그녀들 중 하나를 집단강간할 정도로 취급이 정말 안 좋다그리고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전부 콜걸이다.

이 책이 인권을 말하는 작품도 아니고 도덕과는 거리가 멀며여성 인물을 무조건 넣어야 한다거나 올바르고 정의로운 인물로 나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긴 한데왜 꼭 이래야 했는지 난 잘 모르겠다.

게다가 주인공 민규는 작품의 첫 등장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묘사가 나오고줄거리의 중요한 사건인 카르멘 호텔 펜트하우스 사건도 혼음 중 일어난 사건이다.

강남의 욕망과 일그러진 쾌락을 그리고 싶었던 건 알겠는데 왜 꼭 이렇게 성적인 부분을 부각해야만 했을까?

성적인 묘사를 그리 반기지 않는 내 취향 문제도 있긴 할 텐데그래도 좀 아쉽다안 그래도 소재 자체가 자극적인데 지나치게 자극성만 추구한 것 같달까.

 

진실감춰질 수 없는 것가공되지 않은 본연의 것.”

 

?화려함으로 무장한 채 온갖 오물을 묻히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메이드 인 강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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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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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쁘고 아무 생각 없는 별이 되는 대신 부끄러운 유기아동이 되어서 세상의 몫이 되어야 마땅한 창피함을 대신 짊어졌다."

 

당당하고똑똑하고독특한 아이 '윤설'의 이야기인 설이이다.

 저자는 심윤경자전적 성장소설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주인공 설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풀잎보육원 앞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졌다설이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벌어진 이 일은 설이의 삶을 정의하는 가장 큰 부분이 되어 버렸다.

 설이는 세 번 파양당해 함묵증을 앓은 경험이 있고올해 열세 살이 되었으며졸업을 앞둔 지 얼마 되지 않아 세 번째 파양을 당하는 바람에 우상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설이에게 미안했고안타까웠다.

 설이의 삶은 많은 부분이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굴곡져 있었다설이 주변의 어른들은 설이를 멋대로 이곳저곳에 보내고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쳐다보지도 않거나 멸시한다설이가 쌓아 온 것들을 마음대로 정의하고 누가 정했는지 모를 세상의 기준에 맞출 것을 요구했다.

 한때 잠깐 내게 머물렀다 금방 떠나버린 나의 어린 시절내게도 분명 저런 것들이 요구되었다그렇게 해야 한다고 해서 그냥 그렇게 했고그때 그렇게 살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해 버리는 어른이 되었다.

 해야 한다고 하니까 했던 나와는 달리 설이는 자기 자신을 확실히 붙잡은 채그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거기에 당당히 반항하기도 한다화장을 하고집을 나오고어른들의 말에 또박또박 말대답을 하거나 흘겨보는 것은 반항이었기만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설이의 노력이었다.

 어느 작품에서 '나는 이제 세상을 바꾸지 못한 죄를 물어야 하는 나이인 게지.'라는 문장을 읽었던 적이 있다나도 어느새 그런 나이에 발을 들이고 만 걸지도 모른다.

 

"사실이라는 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 같아."

 그게 그렇게 무서우니까 세상엔 그렇게 많은 거짓말들이 있는 거겠지.

 

"얘야제발 어른 말을 좀 들으렴!"

 실제 이 대사가 나왔던 적은 한 번밖에 없지만그동안 등장한 모든 어른들이 설이에게 늘 그 말을 하고 있었다눈으로표정으로규칙으로 늘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그나마 예외는 설이의 위탁모인 이모 정도였을까설이의 생각개성가치 등은 어른들의 가진 것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고잔머리라고 정의되었다.

 모든 어린이들이 그렇다어른들이 보기에 어리고 미숙할지라도어린아이들에게도 분명한 생각과 좋아하는 것싫어하는 것이 있고그 모든 것들에는 이유가 있다한 아이이자 한 사람을 구성하는 그것은 어른들의 눈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비친다.

 그래내 모습과 같았다.

 절대 그런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어느새 나는 8살 어린 내 동생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고이 책을 읽으며 그 점을 처절하게 깨달았다어린애의 의견보다는 어른들의 의견이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그렇게 은연중에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해 왔다그렇게 아이들의 입을 막았다내 동생에게모든 어린이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아이'가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야 했는데나와 같은 사람이라고내 의견이 네 의견보다 우선될 이유 같은 건 없다고 말해줬어야 하는데.

 어른과 아이의 의견이 상충될 때는 언제나 어른의 의견이 우세하다어른은 아이보다 더욱 분별력이 있고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아이에게 더욱 좋은 선택을 내릴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는 걸 설이가 보여 준다한 명도 예외 없이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에게 설이는 분명히 외친다.

 "선생님은 거짓말쟁이에요!"

 

"내 안에는 삶이 나에게 가져다준 억울함의 휘발유 통이 가득 쌓여 있었고목구멍 아래에서 그것의 알싸한 냄새를 느끼곤 했다."

 

또다른 아이인 시현 역시 설이와는 조금 다르지만희생양이다.

 시현에게 중요한 것은 부모님에게 중요하지 않고부모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시현에게 의미 없는 것이다.

 물론 가족끼리 의견 충돌이 있을 수도 있고그럴 땐 잘 풀어나가면 된다지만중요한 것은 그것이 시현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마지막에 결과를 결정할 수 있는 마스터키는 시현의 손에 주어졌어야 하지 않을까.

 시현 역시 아이이고설이와는 또 다른 입장의 희생양이다그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잠깐 이 아이에게 묻고 싶다.

 설이에게 사과는 했느냐고.

 시현은 설이를 못살게 괴롭히고자존심을 짓밟고설이의 갈비뼈를 부러뜨렸다.

 이후 두 사람이 아무리 가까워지더라도시현의 잘못이 없어지진 않는다별거 아니라고들 하는 그 한 마디가 중요하다미안하다고이 한 마디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이런 시현과 우상초 아이들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희생양이 되어더 큰 괴물의 가능성을 품은 채 자라는 모습을.

 우상초 반 아이 중 한 명은, '아버지가 필리핀 가정부가 말을 안 듣는다며 배를 걷어찼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한다.

 아이라는 사람은 가능성의 집합체다어른들이 그 가능성을 멋대로 재단한 결과의도하지 않았던 품지 말아야 할 가능성이 생겨나고 말았다.

 시현은 그 대표격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저자는 말한다아이들이 침묵하는 세상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아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그걸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 책이 길이 되고 빛이 되었으면아이들 전체가 함묵증을 겪고 있는 이 세상에서 아이들의 말길을 환히 비춰 주었으면.

 

"넌 항상 네가 원하는 걸 알고 그쪽을 찾아가거든. 

나침반은 처음엔 원래 많이 흔들리지만결국 옳은 방향을 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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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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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허벅지를 꼬집으며 모든 걸 인내하는 모습이었다."

 

창비만화도서관 두 번째 작품인 올해의 미숙이다저자는 만화가 정원.

 정원 작가는 단편 만화 노르웨이 고등어」 「삼점몇키로를 그렸고웹툰 플랫폼 코미코에서 만화 불성실한 관객을 연재했다청소년소설 옥수수 뺑소니에 그림을 그렸다올해의 미숙은 첫 장편 만화책이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인 '장미숙'의 평범한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극히 평범해서그렇기에 서글픈 그런 삶.

 이 책은 아마 읽은 사람마다 감상과 의미가 모두 다를 것이다충분히 그럴 만한 작품이었다누군가는 더없이 지루했다 말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그 말에 장단 맞춰 주다가 남몰래 눈물 한 방울을 닦아 낼지도 모른다누군가는 미숙에게 도무지 공감이 안 간다고 할지도 모르고 누구가는 미숙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수없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작품 같기도 했다사람의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그래서 이 작품에 감상은 있을 수 있어도 비평은 별 의미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아껴 줄 거면 끝까지 아껴 주지....

...씨이발."

 

책을 읽는 내내 상처투성이 삶을 어떻게든 보듬고 핥고 끌어안은 채 살아가려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부터 좋지 않았던 것과 좋은 것 같다가도 결국 나빠지는 것들에 대해서그러다 어쩌다 만나는 좋은 것들을 우리는 필사적으로 붙잡고 살아간다고.

 작중 미숙의 상황은 좋지 못하다가정적이지 못했던 아버지는 폭력을 휘두르고동경했던 언니 역시 미숙을 때린다미숙의 엄마 역시 다정한 사람은 아니고학교에서는 '미숙아'라고 놀림을 받으며 못생겼다는 폭언도 서슴지 않게 듣는다.

 도저히 잔잔할 수 없는 배경 설정인데도 잔잔하다 싶었는데작품 내내 미숙은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화나거나 슬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거나 얼굴을 붉히는 일은 있어도소리 내어 우는 모습하다못해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한 번쯤은 크게 소리 내어 울거나 고함쳤어도 좋았을 텐데그럼 좀 시원해졌을 텐데그 많은 상처를 다 어떻게 안고 사나.

 후반부로 갈수록 미숙의 표정은 점점 더 고요해진다.

 

?나는 이 이야기가 '상처에 견뎌내며 사는 법을 배우는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장미숙'은 어렸을 때부터 다 자라 독립을 준비할 때까지 계속해서 상처받기만 한다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은 날도 있었지만 그것도 결국 상처로 남고 만다그런 상처들이 전부 지나가고미숙은 지금까지 그랬듯 태연하게앞으로도 상처투성이일 길로 걸어간다.

 작중 내내 미숙은 '미숙아'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받는다어쩌면 저 별명은 세상이 우리 모두에게 붙인 별명이 아닐까우리는 누구나 상처를 받는 데 미숙하다그걸 끌어안은 채 계속해서 살아가는 데는 더 미숙하다그런 우리에게 올해의 미숙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계속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고좋은 일은 그날 여름의 햇볕처럼 쨍했다 겨울이 되면 사라지고여름이 되면 다시 쨍하니 인생을 비출 거라고.

 우리는 올해도 미숙하고내년도 미숙할 것이고계속해서 조금 더 나아지겠지만 언젠가 어느 순간에서 우린 분명 미숙할 것이다사람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럼 그 순간에 우리는 여전히 미숙한 채로조금 더 나아지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의 일들이 먼 미래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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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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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가능성이 타고 남은 잿속에서 사악하게 반짝이는 현실일까요그게 없으면 훨씬 더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표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책은 평범한 샐러리맨이 우주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이다.

 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환한 별이 떠오른다꿈이라는 건 너무도 눈부시게 반짝이는 것이라서제대로 눈을 뜨고 쳐다볼 수도 없다그래서 그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가는 사람들도 반짝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와는 달리 책 속의 주인공 이진우의 여정은 참으로 고달프기 짝이 없다내가 느끼기에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순히 '꿈을 좇아라'뿐만 아니라 '원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토록 큰 노력이 필요하다'인 것 같다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진우와 다른 후보들은 책 속에서 몇 번이나 자신의 한계를 넘는다.

 

"삶은 가끔 사람을 기만하는 모양이다하지만 처음부터 가망 없는 일을 권유하진 않았겠지그 정도로 잔인하지는 않겠지."

 

작가는 책을 쓰기 위해 무려 13년의 자료조사 기간을 가졌다고 한다그 노력이 책에 깊이 녹아들어 있어서우주인이 되기 위한 자격이나 과정훈련 내용이 아주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직장을 얻은 이후로도 평소에 끊임없이 우주인을 되기 위해 몸을 단련하던 이진우조차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다바다에 불시착했을 때 탈출하는 훈련을 하기 위해 체감 온도 90도 속에서 겹겹이 옷을 껴입고 견디거나무중력 상태를 재현하기 위해 상공에서 빠르게 낙하하는 전투기 안에서 환복을 하는 것이 훈련 내용이다이 고된 훈련을 거치면서도 건강 상태가 무척 중요해서감기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탈락 위기에 놓이기도 한다.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는 이 생활을 하다 보면 회의감이 들 법도 한데등장인물들에게는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그저 탈락에 대한 두려움과동료이자 경쟁자인 서로를 향한 죄책감과뽑히고 싶다는 열망뿐이다.

 그 정도의 열정과 능력을 가지고서도 못 될 수도 있다는 현실이 책을 읽는 내내 차갑게 다가왔다.

 

"용기는 계속할 힘이 아니다힘이 없어도 계속하는 것이다우레 같은 외침만 용기가 아니다쉬었다가 다시 해보자나지막이 속삭이는 것도 용기다."

 

우주인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넷 중 단 하나나 둘만 우주로 나갈 수 있다아차하면 아무도 가지 못할 수도 있다.

 나 혼자만 잘하고 노력해서 되는 일이라면 그나마 좀 위안이 될 텐데내 손이 닿는 않는 외부적 요인 때문에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도 너무 크다이제 난 돌아갈 곳도 없는데.

 꿈이라는 단어가이토록 잔인하고 너저분하고 답답한 단어였던가읽는 내내 내가 그리던 꿈과는 너무도 큰 차이에 고민했던 것 같다그 과정이 언제나 즐겁거나 아무런 고난도 없으리라는 팔자 좋은 상상을 한 것은 아니지만(dream)이란 단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일 만큼 흙탕투성이일 줄은 몰랐다.

 

"언제나 그렇다모든 앞날은 지금 나한테서 출발한다."

 

하지만주인공 이진우의 행보를 마지막 장까지 지켜보고 생각해 보았다.

 꿈은 반짝일지라도 그 과정까지 빛나리라는 법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그 과정은 생각보다도 더 무덥고 힘들고 때로 아니 제법 자주 지저분하기도 한 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했다꿈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사람들의 열정이노력이어떤 것에 대한 그 애정이 빛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그런 사람들의 용기가여정이힘겨운 결단과 지난한 고민이 너무도 귀중해서 꿈이 빛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그 과정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힘겨울지도 모른다당신을 끝없이 울게 할 수도 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가게 할 수도 있다어쩌면 아무리 간절히 바라고 노력할지라도 결코 거기 가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나 역시 그렇겠지.

 하지만 이것만은 말하고 싶다그 모든 과정의 당신이 넘치도록 아름다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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