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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강남
주원규 지음 / 네오픽션 / 2019년 2월
평점 :
“밤이 오히려 더 밝은 곳. 그렇다고 밤인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는 곳.
대치동 447번지에 위치한 38층 고층아파트 침실에서 내려다본 강남이다.“
강남에서 일어나는 부와 쾌락의 어두움을 그린 소설, 『메이드 인 강남』이다.
저자는 주원규, 『열외인간 잔혹사』, 『반인간 선언』 등의 책을 쓰고 tvN 드라마 <아르곤>을 집필한 작가다.
드라마 작가라서 그럴까, 이 책 역시 드라마나 영화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재도 소재고, 묘사나 사건 전개 등도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장면들이 머릿속에 쉽게 상상되는 책이었다.
표지 디자인이 꽤 잘 된 책이라고 생각한다. 양복을 입고 얼굴을 가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슈퍼맨과 배트맨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 작중 '설계자'의 역할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일러스트다.
?Y로펌의 주목받는 변호사인 '민규'는 일반 변호사들이 하는 일과는 조금 다르다. 강남의 재력가, 권력가들에게 의뢰를 받고 유명인들이 사건이나 사고에 휘말리면 그것을 의뢰인들이 원하는 대로 조작하는 것이 민규의 일이다. 이러한 일을 하는 변호사를 이른바 '설계자'라고 부른다.
어느 날 강남의 카르멘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열 구의 시체가 발견된다. 다섯은 남성, 다섯은 여성인데, 시신은 전부 나체다. 사인은 사체 복부의 자상. 정황상 마약에 취해 혼음 파티를 즐기다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 다섯은 콜걸, 남성 다섯은 금감원, 증권회사, 부동산 브로커 등인데, 문제는 그 다섯 명 중 하나가 인기 연예인 '몽키'이다.
민규가 받은 의뢰는 몽키의 죽음을 보다 명예롭게 포장하는 것.
그리고 또 한 명의 주인공인 강력계 형사 '재명'이 있다.
재명은 하루아침에 3억 원의 도박빚을 지게 되는 등 행실이 별로 좋은 형사는 아닌 것 같다. 그러다 카르멘 호텔 펜트하우스 사건을 접하게 되는데, 그는 몽키의 친부인 서린개발 회장 민경식에게 의뢰를 받게 된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찾아 잔혹하게 죽여달라고.
?어두운 주제에 비해 스토리 자체는 제법 평이하다. 복잡한 추리를 필요로 하거나 시간대를 왔다갔다하는 일 없이, 단지 민규와 재명에게 초점을 번갈아 맞추며 사건 전개에 집중한다. 소재도 흥미로운 만큼 몰입해서 책을 읽을 수 있다.
작품에서 그려지는 강남 상류층의 모습은 정말 지저분하다. 마약은 기본에 스리섬 등의 용어가 빈번히 등장하고 형사에게 돈을 쥐여 주며 살인청부도 한다. 영화나 드라마 등 대중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패한 상류층의 전형이다. 돈도 많고 권력도 있고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중산층들보다 잘났다는 사람들이 한다는 짓은 전혀 잘나 보이지가 않는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보통 이런 장르의 서사에서는 주인공이 보다 정의로운 중산층으로 등장하여 최종적으로 부패한 그들이 마땅한 벌을 받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데(영화 『베테랑』이나 『검사외전』을 떠올려 보자), 이 작품은 두 주인공마저 모두 직업윤리를 망각한 채 돈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변하지 않는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예시로 든 두 영화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인 형사 캐릭터조차도 이 작품에서는 도박빚이나 지고 살인청부에 협조하는 인간이다. 그런 주인공이 두 명 다 법의 집행자라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랄까.
도무지 저자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작가의 말까지 읽어 보니, 공멸의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를 강남의 오늘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말인즉슨, 실제로 강남에서는 이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거나 일어났다는 뜻일까.
작중 인물이 사망하며 '어쩔 수 없지, 여긴 강남이니까.'라는 말을 하며 죽음을 받아들일 정도로 강남은 '그들만의 리그'라는 건가.
?나는 강남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거기서 살아본 적도 없다. 그냥 땅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싸며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들의 마을이라는 것밖에는.
이 책은 자본에 미친 자들이 어떤 비극을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해 줄 만큼 심오한 책은 아니다. 대신 내가 주목한 점은 다른 쪽인데, 작중 등장하는 콜걸 '정혜주'와 '검은 개들의 왕'이라 불리는 포주 '엄철우'이다.
정혜주는 그쪽 바닥에서는 유명해서 높으신 분들만 상대하고, 엄철우는 국적도 출신도 모르는데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엄청난 포주라고 한다. 그런데 책에서 묘사하길 스모키 화장과 모자로 가리는 그들의 얼굴이 젊다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어려 보인다고 한다.
이들이 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만, 어리다는 말이 더 어울릴 나이대의 사람들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 곳이 지금의 시대라는 것은 느껴졌다.
“나한테 궁금한 건 이제 딱 하나야. 내 통장에 30억이 꽉 채워질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인데, 한 가지 불편했던 점.
콜걸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건 상관없는데 다른 등장인물은 그녀들을 사람 취급도 안 하고, 부자가 그녀들 중 하나를 집단강간할 정도로 취급이 정말 안 좋다. 그리고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전부 콜걸이다.
이 책이 인권을 말하는 작품도 아니고 도덕과는 거리가 멀며, 여성 인물을 무조건 넣어야 한다거나 올바르고 정의로운 인물로 나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긴 한데, 왜 꼭 이래야 했는지 난 잘 모르겠다.
게다가 주인공 민규는 작품의 첫 등장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묘사가 나오고, 줄거리의 중요한 사건인 카르멘 호텔 펜트하우스 사건도 혼음 중 일어난 사건이다.
강남의 욕망과 일그러진 쾌락을 그리고 싶었던 건 알겠는데 왜 꼭 이렇게 성적인 부분을 부각해야만 했을까?
성적인 묘사를 그리 반기지 않는 내 취향 문제도 있긴 할 텐데, 그래도 좀 아쉽다. 안 그래도 소재 자체가 자극적인데 지나치게 자극성만 추구한 것 같달까.
“진실, 감춰질 수 없는 것, 가공되지 않은 본연의 것.”
?화려함으로 무장한 채 온갖 오물을 묻히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메이드 인 강남』이었다.